26.처결
“음… 설마 상급 엑스퍼트 기사였다니.”
다핸 남작은 보일이 보내온 서신을 읽으며 탄식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보일 경의 경지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기사단장 캘토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로 보일과 영주의 사이는 사실상 완전히 벌어졌다고 보아야만 했다.
“휴~ 어쩔 수 없지. 다만 보일 경이 직접 자경 대원들의 처결에 대한 요청을 해온 걸 보니 영지를 떠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샤론 마을을 이만큼 발전시킨 당사자이니 쉽게 마을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일이 영지에 남아 준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지.”
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강자는 왕국에서도 100명이 넘지 않았다.
상급기사와 검술을 얻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오크 랜드에서 나오는 오크들만 막아준다면 다핸 남작으로서도 영지 발전에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생겨 나쁠 것이 없었다.
다만 기존 소드 유저와 엑스퍼트 급 자경단에 피해가 간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습니다. 고위귀족의 기사단장 급 인물이 영지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곳 남부 영지에서는 사실상 상급 엑스퍼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남부의 영지 대부분이 하급귀족인 남작과 자작 급 영지에 불과했다. 오크들을 방비하기 위해 매년 막대한 비용으로 군사를 유지하고 있지만 농지가 적고 산이 많은 남부 영지의 특성상 다른 지역의 영지들보다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사들의 질이 떨어졌다.
기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예비기사에서부터 길러내야 하니 수많은 골드 소모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만일 기사가 엑스퍼트 급에 오르기라도 하면 그만한 봉록과 대우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재정이 열악한 남부 영지는 많은 자금을 들여 기사를 키울 여력이 떨어졌고, 그러다 보니 상급은커녕 중급 엑스퍼드 급 기사들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남부 영지는 상대적으로 용병들을 우대하며 기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골드를 쫓는 용병들이 낙후된 영지의 기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희박했다. 간신히 엑스퍼트 급에 오른 용병들이 신분제의 벽을 넘기 위해 기사가 되려고 남부를 찾긴 했으나, 대부분의 실력 있는 용병은 다른 지역의 귀족가나 용병 가문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엇보다 보일 경이 영지에 남아 있는 이상,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보일 경과는 비록 사이가 다소 틀어졌다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보일 경의 아들이라면 검술을 직접 만들었다는…?”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상급의 경지에 오른 보일 경을 미뤄 짐작해보면, 어쩌면 그 아이야말로 지고한 경지를 노려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지고한 경지라고 했나! 설마 마스터를….”
“그렇습니다. 상급에 오를 수 있는 검술과 직접 검술을 만들 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라면 마스터를 노려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설마 기사단장의 입에서 마스터란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지난번 그 아이가 검술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저 아이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가벼운 칭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 아이의 검술이 그리 대단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독특하고 새로운 검술이었습니다. 단순히 멀리서 지켜본 정도이지만 만약 조금 더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아마도 대단한 검술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일 경이 영지를 떠나는 것을 막아야겠군!”
“일단 최대한 보일 경과의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일에 영주님께서 관여하셔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번 건을 아예 보일 경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네의 말대로 이번 일은 보일 경에게 일임하는 게 좋겠군.”
남부 오지의 남작 영지에 보일 같은 상급 엑스퍼트가 정착할 일은 두 번 다시없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런 실력자와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생겼으니, 남작으로선 보일이 떠나지 않게 기분을 최대한 맞춰줄 필요가 있던 것이다.
* * *
“아직 결정하지 않으셨어요?”
카일이 갑작스럽게 던진 질문에 보일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결정은 아버지가 하셔야 해요! 이미 영주님의 전령도 다녀갔잖아요.”
“아직은…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
어물어물 대답하는 보일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보일은 다핸 남작에게 전령을 보내어 자경단 내의 사건을 알리고 처결을 물었다.
엑스퍼트들과 소드 유저 다수가 부상을 입고 전력에서 빠져나간 상황이라, 적당히 뭉개고 지나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단장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영주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일이었다. 이번 일에 영주와 기사단장이 관여한 사실을 밝히는 순간 영주와 보일은 양립할 수 없게 되기에 서로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형식적이라도 보고를 올려야 했다. 그렇게 올라간 보일의 보고에, 영주는 이 일에 관여한 자경단 처벌을 보일에게 모두 맡긴단 답을 전달했다.
이러한 영주의 답변은 보일이 하던 고민의 몸집을 부풀리게 했다.
남작이야 보일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처벌을 그에게 맡긴단 결론은 내린 것이나, 보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쟝과 조셉은 물론, 이제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된 5명에 대한 처벌을 골몰하게 됐을 뿐이었다.
“그럼 조금 더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꼭 죽이거나 하는 것이 처벌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만한 전력을 무작정 없애는 것도 능사는 아니잖아요. 뭐… 적당한 곳으로 보내는 것도 좋겠네요.”
카일이 한쪽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설마 녀석들을 오크 랜드로 보내잔 말이냐?”
“아니 무슨 그런 위험한 말을…. 저쪽엔 지금 정찰병들이 머무는 곳이 있잖아요.”
“거긴 여기서 하루 거리의 장소가 아니냐?”
“맞아요. 일주일 거리로 늘어났던 순찰 범위가 이제 3일 거리로 단축되었잖아요. 저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숲으로 보내, 순찰 범위를 다시 일주일 거리로 늘리자는 말이죠!”
언뜻 타당해 보이는 의견이었으나 보일은 부정했다.
“녀석들을 어떻게 다시 정찰에 투입할 수 있겠느냐? 녀석들이 딴마음을 먹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제 병사들도 정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여기서 4일 거리마다 요새를 만들어보잔 소리죠.”
“요새?”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잖아요.”
“흠… 그렇기는 하다만…. 그런 외지고 위험한 곳에 누가 책임자로 갈 수 있겠느냐. 아무리 자경 대장인 나지만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맞아요. 아무나 갈 수 없죠. 실력이 없다면 더더욱! 그러니 쟝과 조셉을 포함해서 이번 일에 가담한 5명을 그곳으로 보내 버리잔 거예요.”
카일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보일이 말했다.
“그들은 엑스퍼트 급 실력자이다. 두 사람 실력이면 충분히 이곳을 벗어날 거다.”
“그렇겠죠. 단!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실력자는 단 두 사람이죠. 하지만 나머지 다섯은 어떻게 될까요?”
카일의 말에 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단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정착을 하게 된다면 분명 오크들이 지속적인 공격을 해올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쟝과 조셉이 그곳을 떠난다면 남은 5명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쟝과 조셉의 실력이면 산을 우회해서 마을을 거치지 않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지만 손목이 잘려나간 5명을 데리고는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 사람들, 아버지가 오랫동안 데려다 키운 사람이고 형제 같은 사람들이잖아요. 설마 5명을 버리고 떠날까요?”
“이번에 날 배신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널 제압하려는 것뿐이었으니…. 아마 쟝과 조셉이라면 절대 그들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쟝과 조셉이 엑스퍼드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두 사람이 다섯을 보호하며 요새까지 지키는 건 힘든 일이다.”
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이 말을 덧붙였다.
“저도 그들만으로 요새를 지키게 할 생각은 없어요. 지금 병사들이 머물다 돌아오는 곳 역시요새를 건설해 자경단을 상주시키고 중간에 요새를 하나 더 만들어 자경단을 상주시킨다면 그들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더군다나 2~3일에 한 번씩 병사들과 자경단을 밀어내기 식으로 순환시킨다면 요새가 위험해 처해도 다른 요새에 도움을 청하기도 쉬울 겁니다. 만약 위험에 처한다면 기존 요새를 버리고 다음 요새로 후퇴할 수도 있겠지요.”
카일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은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원래 보일도 지리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요새를 만들고 자경단을 상주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이곳에서 4일 거리라 소규모 오크 침입은 막을 순 있어도, 대규모 침입 시에 지원군이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게 분명해 폐기된 계획이었다.
그런데 카일은 이 방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중간에 2개의 요새를 추가로 지어 병사들을 순환시키며 오크 침입에 방비하고, 빠른 지원과 후퇴 시에는 축차적으로 침입을 저지함으로 인해 영주 성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지연시킬 수도 있어, 보일이 보기에도 좋은 방법 같았다.
지금 100명의 병사와 300명의 자경단은 샤론 마을의 후방지역에 머물다가 오크 침입 시에 샤론 마을로 진입해 대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일의 방법은 이들을 마을보다 전방에 위치한 요새에 축차 배치해, 샤론 마을과 요새를 오가게 하여 일대의 오크 침입을 방지할 방지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예전 최일이 부사관에 지원하기 전 전방초소에서 근무할 때 쓰던 방식으로, 길게 이어진 여러 초소를 경계 근무자들이 한 초소씩 밀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걸 생각해 응용한 것이다.
“아주 획기적인 방안으로 들리는구나. 그럼 영주 성에 전갈을 보내고 답변을 받아 오겠다. 일단 내일은 필론과 교대를 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걱정 마세요. 제가 한두 번 숲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하하,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가거라.”
보일은 품에서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냈다.
파워업 마법이 각인된 마법 장갑이었다.
“가지고 다니면 도움이 될 거다. 방금 말한 작전이 통과되면 정찰 일정도 여유를 찾을 거다.”
“일단 요새가 만들어지면 정찰 범위를 조금씩 더 늘려야 되지 않을까요?”
“흠…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일단 계획대로 된다면 지금처럼 정기적인 정찰보다는 여유가 생길 거다. 그럼 마을 외부의 농지도 조금 더 늘려야 할 것 같고 요새도 새롭게 건립해야 하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구나.”
마을이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마을 안쪽에만 농지가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마을 외부에도 제법 넓은 농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단지 마을 외부로 나가는 게 힘들어, 대부분이 씨만 뿌려도 잘 자라는 곡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 오지 마을에서는 이렇게 생산되는 곡물이 주요 식량이라, 마을에서도 농지를 넓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혹 카일의 말이 받아들여져 자경단원들과 병사들이 마을 전방에 지어진 요새에 상주하게 된다면, 병사와 자경단원들이 머물던 후방의 장소는 없애도 좋을 터였다.
“자경단과 병사들이 머물던 곳도 제법 넓고 목책도 만들어져 있으니, 그곳을 새롭게 농지로 만들어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그곳은 병사들과 자경 단원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니 제법 땅이 넓어 농지를 조성해도 좋을 테지.”
보일이 웃으며 말했다.
천인 대장으로 임명된 보일은 샤론 마을의 세금 5할을 봉록으로 받고 있으므로, 마을이 넓어지고 농지가 늘어나면 그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