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철검
카일도 잔에 담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1년 전, 보일에게 처음 술을 배운 뒤로 자연스럽게 보일이 마실 때면 함께하게 됐지만 카일이 먹는 양이야 고작 술잔으로 한두 잔이 전부였다.
카일의 모습을 바라보던 매튜와 필론도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캬아~.”
“아!”
천천히 술잔에서 입을 땐 매튜와 필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곳에서는 어려서 일찍 술을 배웠다. 오크를 비롯한 각종 몬스터와 목숨을 담보로 일상처럼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다보니 그 만큼 술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술을 마실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기억나느냐?”
보일이 매튜와 필론을 보며 물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더라도 절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기습을 받을지 모르니 항상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라 하셨습니다.”
매튜와 필론이 술잔을 내려놓고 말하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검을 쥐고 살아가는 이상, 우린 평상시에도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만 한다. 이는 술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친구나 동료라고 하더라도 몸과 마음은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보일의 말에 매튜와 필론이 머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보일이 언제나 강조했던 말을 다시 꺼낸 것은 바로 폴론의 배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두 사람을 은연중 질책하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스터!”
“이런 좋지 못한 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겨 놓을 필요는 없지만, 단 하나! 동료에게도 배신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꼭 기억에 남겨 놓거라!”
보일은 엄하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이것을 끝으로 보일은 더 이상 매튜와 필론에게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훈연한 래빗 고기에 증류주를 늦은 저녁까지 마셨다.
카일은 물론이고 매튜와 필론은 그날 두세 잔의 술을 조심스럽게 비워냈다. 워낙 높은 도수의 술이라 더는 마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보일과 매튜 그리고 필론은 자경대로 나서야 했다.
외곽순찰 조 8명이 큰 부상을 당하면서 순찰 조에서 빠졌기에 보일로서도 외부순찰을 돌고 온 다음 날이라도 서둘러 자경대로 나가야 하는 상황인 탓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자경단의 숫자가 400명으로 늘어나면서 각각 백인대를 구성해 대장들이 통솔하고 있지만, 주변을 정찰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부상을 당해 마당에 쓰러져 있는 조장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일이라, 결국 보일이 다시 외곽순찰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외곽순찰은 어떻게 합니까?”
원래 이번 외부순찰의 경우 매튜의 조가 순찰을 돌아야 했다. 하지만 사실상 순찰 조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새롭게 정찰조를 만들어야 할 판국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새롭게 10명씩 6개 조를 만들어 정찰을 나가도록 하지.”
“하지만 기존의 자경단만으로 기동성을 살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보일의 말에 매튜나 필론 모두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자경대는 수년 동안 외곽 순찰조를 두고 정찰하는 방식을 유지했기에, 두 사람 모두 예전엔 어떤 식으로 순찰조를 운용했는지 알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아, 너희들이 자경대에 들어오기 전 정찰하던 방식이니 너희들은 모르겠구나. 예전에는 실력이 뛰어난 자경단을 10명씩 선출해 조를 이루어 정찰을 나갔다. 다만 정찰범위가 마을에서 하루거리 정도에 불과했다.”
“하루거리라면 오크의 침공에 대비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필론의 말대로 하루거리에서 오크를 발견한다면 그만큼 마을을 방어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할 터였다. 지금까지 외곽 순찰 조원들은 최소한 소드 유저였다. 신체의 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보일에게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 정찰의 범위가 일반 자경단 보다 두 배 가까이 넓었다.
그 말인즉슨 일반 자경단의 정찰 범위는 외곽 순찰조의 반나절 거리 정도밖에 안 된단 뜻이었다.
“그래. 정찰조만으로는 부족하지. 그러니 우리 세 사람이 하루거리를 더 나가 순찰을 도는 수밖에….”
보일의 말에 동감하듯 매튜와 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대책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같이 보였다. 아무리 매튜와 필론이 소드 엑스퍼트 초급에 올랐다고는 해도 조원도 없이 이틀 이상 혼자 숲에서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그럼 삼일마다 교대를 하는 것입니까?”
“그래. 정찰조가 하루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교대한다면, 우리 순찰조들은 이들보다 하루 더 먼 곳을 정찰하고 돌아오면 된다.”
논의 끝에 내려진 결론은 일반 자경단원 10명으로 이뤄진 6개 조가 하루를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정찰을 돈다면, 매튜와 필론 그리고 보일이 3일 동안 외곽을 순찰하고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 * *
카일의 경우 소드 엑스퍼트지만 아직 16세가 되지 않았기에 순찰조에서 제외되었다. 두 달 동안은 카일도 바쁘게 보내야 하기 때문에 따로 순찰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폴론 일행을 상대하면서 카일은 검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전투 당시 주철로 만든 환도를 사용하다가 부러질 뻔한 일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가 카일과 같은 엑스퍼드 급 실력자이거나 더 높은 경지라면, 오러를 주입했더라도 검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은 강철 검을 만들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 두 달 뒤면 자경단에 입단해야 하기에 제대로 된 검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우선 카일은 커다란 용광로를 만들어, 숯과 생석회 그리고 숲에서 퍼온 흙(적철광)을 함께 넣어 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 방식은 대장장이 타론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철을 얻을 수는 있어도 불순물이 많아 같은 방식으로 수차례 제련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수고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철의 양이 적었다. 이에 대한 차선책으로 타론은 처음 제련한 불순물이 많이 함유된 괴련철을 모아 놓았다가 마법 화로에 넣어 높은 온도에서 불순물을 태워 제거하는 동시에, 미스랄과 특수금속을 넣어 합금을 만들고 있었다.
땅- 따앙- 땅-
카일은 용광로에서 꺼낸 검은 쇠를 화로에 넣어 풀무질을 하다 붉게 달아오른 쇳덩어리를 모루에 놓고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괴련철을 사정없이 내려치자 탄소가 빠져나가며 붉은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치이익-
카일은 달궈진 철괴를 황토물에 넣었다.
“휴! 두 달 동안 쉴 시간도 없겠군.”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을 소매로 대충 닦아낸 카일은, 달궈진 철괴로 인해 뿌연 수중기를 뿜어내는 황토물에서 빼낸 철괴를 다시 붉게 달아오른 화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엔 제법 커다란 용광로를 만들어 쇠를 뽑았어도 얻을 수 있는 철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고작 검 한두 자루를 만들 정도에 불과했다.
일단 용광로에서 철이 나오면 괴련철에 붙은 불순물을 털어낸 후 화로에 넣어 얇게 두들겼다가 접는 방식을 반복하며 강철을 만들었다.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으나 의미 없는 짓은 아니었다. 처음 용광로에서 나오는 철은 불순물이 많고 내포된 탄소량이 제각각이라 얇게 두들기고 접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철 속에 남아 있던 탄소가 타면서 표면에 탄소강이 코팅되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수십 수백 번은 두들기고 접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이렇게 탄생한 강철은 질기고 균일한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철로 만들어진 검의 품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론 뛰어난 무기를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휴~. 일단은 아버지 것부터 만들어야겠지.”
카일은 잠시 망치를 내려놓고 미리 만들어 놓은 철편을 겹겹이 쌓은 후 천으로 감아 황토물을 부은 다음 화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 만드는 보일의 검은 길이가 150센티가 넘는 장검이었다. 그만큼 강철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번에 제련하는 철 대부분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채 겹겹이 쌓인 철편을 다시 수십 번 접고 때려서 정련한 뒤 지난번에 만들어 놓은 철괴를 합쳐 다시 접쇠를 시작했다. 처음 괴련철을 두들겨 얇은 철편으로 만든 것이 탄소를 태워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번에 접쇠를 하는 것은 철편마다 강도와 연성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 다른 용광로에서 뽑은 철편을 접쇠시켜 검의 강도를 고르고 균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일은 한 달하고 보름에 걸쳐서 검과 환도를 만들었다. 처음 보일의 검신을 만들어 담금질하는데 열처리 과정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보일의 검을 다시 만들어야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 만든 검과 환도는 큰 문제 없이 완성됐다.
* * *
이른 아침. 오늘따라 카일은 아침 운동도 나가지 않고 식탁에 나와 기다란 검신을 마른 천으로 천천히 닦아내고 있었다.
긴 노동 끝에 완성된 검을 보일에게 건네기 위해서였다.
카일이 잘 닦은 검을 검집에 넣었을 때 안에서 보일이 나왔다.
“어쩐 일이냐? 요즘 수련도 안 하고 작업장에 틀어박혀 쇠만 두들기던 녀석이.”
보일은 두 달 가까이 검술 수련도 하지 않고 작업장에만 틀어 박혀있던 카일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보일의 투덜거림에 카일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보일에게 건넸다.
“한번 보세요.”
보일은 카일이 내미는 검을 받아 살폈다. 길이는 지금 들고 다니는 검보다 10센티 정도 길지만, 무게는 얼추 절반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 검이었다.
한동안 검의 무게를 가늠하던 보일이 물었다.
“지금까지 이 검을 만든 것이냐?”
“지난번 대결을 생각해 보니 지금 가지고 다니는 검과 환도는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아버지 검도 이번에 같이 만들어 보았어요.”
카일이 웃으며 말하자 보일이 흥미롭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스릉
검의 길이는 보일이 가지고 다니는 검보다 길었으나 두께가 얇고 검 폭이 1센티 정도 더 넓었다. 양쪽 날은 밝고 표면이 매끈한 은회색이었고, 중간 부분은 어둡고 거친 진한 회색으로 되어 있는 처음 접하는 재질의 검이었다.
“봤으니 아시겠지만,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는 검과는 조금 달라요. 길이도 조금 더 길게 만들었고 폭도 좀 키웠어요. 대신 무게는 절반 정도로 가볍고 검날도 날카롭게 만들었고요. 어때요?”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보일을 보며 카일이 말을 이었다.
“이건 합금이 아니라 강철로 만든 검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는 검보다 강도는 더 높을 거예요.”
“이 검이 합금 검보다 강도가 높다는 말이냐?”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구나! 이런 검을 만들어 내다니. 이렇게 얇고 가벼운 검은 예전 용병으로 떠돌 때 고위 귀족이 가지고 다니던 고 합금 검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대단한 명검으로, 오러도 없이 용병이 가지고 다니던 검을 잘라버렸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잠시 옛일을 회상하듯 보일이 검을 바라보고 있자 카일이 소리 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따라 나와 보세요.”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가자 보일이 검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보일이 밖으로 나왔을 때 카일은 자신이 수련용으로 만든 검(무쇠)을 가지고 나왔다.
“이걸 잘라보세요.”
카일이 환도를 앞으로 내밀자 보일이 들고 있던 검과 수련용 검을 번갈아 봤다.
“설마 이걸 잘라보라는 말이냐?”
“네!”
당황을 숨기지 못한 보일이 카일에게 말했다.
“방금 귀족의 합금 검이 검을 잘랐다는 말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건 아무래도 무모한 일이다. 일반적인 하급 합금 검보다 이 철검의 더 강도가 좋다는 말은 믿지만, 이걸 내려친다면 검 두 개가 모두 부러질 뿐이다.”
염려스럽다는 듯이 보일이 머뭇거리자 카일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눈짓했다.
카일이 만든 철검은 무쇠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괴련철 단계에서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단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6~7번 정도 접쇠를 하기 때문에 용병들이 주로 가지고 다니는 최하급의 합금 검보다는 강도가 좋았다.
물론 폴론과의 대결에서 환도가 깨어질 뻔했지만, 이는 폴론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폴론과 처음 검이 부딪히고 나서 검과 부딪히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서 몰랐지만, 나중에 폴론의 검을 확인해보니 검 자체에 미세한 균열이 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 불안하다면 제 검으로 하면 돼요.”
보일이 손에 들고 있던 수련용 환도를 보일에게 넘겨주고는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 새롭게 만든 검과 환도를 가지고 나왔다.
검과 환도는 같은 길이에 검 자루의 길이까지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중 검을 꺼내자 보일과 같은 형태의 검이 나타났다.
다만 길이가 보일의 검보다 작은 120센티였다. 그래도 일반적인 롱 소드 보단 긴 편이었다.
그러나 카일의 키가 크다 보니 직접 검을 들었을 때는 일반적인 롱 소드 크기처럼 보였다.
검을 뽑은 카일은 몇 차례 숨을 고른 후 보일이 들고 있는 무쇠로 만든 수련용 검을 향해 강하게 내려쳤다.
쨍-!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무쇠로 만든 환도가 두 동강이 났지만 검신과 날은 전혀 상하지 않고 멀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