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마스터를 배신한 기사
커다란 카일의 외침에 폴론 뿐만이 아니라 멀리서 지켜보던 기사단장과 수행기사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영주와 기사단장은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 정작 마스터를 배신한 이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기사들을 추가로 영입하는 동시에 카일을 인질로 잡아 검술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 정작 기사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충성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작은 일에도 항상 신중한 결정을 내리던 다핸 남작이 이런 중요한 상황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할 정도로 상급 검술에 목말라 있다는 방증과도 같았다.
목적을 위해 마스터를 배신한 기사들!
목적을 위해 영주를 배신하지는 않을까?
욕망에 눈이 먼 영주와 기사단장은, 그들의 손으로 이들을 기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또한 만들어 버렸다.
십 수년에 걸쳐 하층민으로 떠돌던 고아들을 데려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지금껏 검술을 가르치고 길러준 마스터를 배신했다는 건 언제든 더 큰 이익이 찾아온다면 영주 또한 배신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안일했군.”
기사단장의 말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깨닫지 못했다면 몰라도, 이미 알아버린 사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들을 기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기사단장은 수행기사 볼란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가 말인가?”
“저 아이 말입니다. 이제 15살이고 두 달 뒤면 16살이 된다는데, 어찌 저렇게 과감하게 손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검을 썼는지 모르게 한 명을 처치하지 않았습니까?”
수행기사의 말에 기사단장이 다시 카일 쪽을 바라보았다.
* * *
카일의 냉정한 손속과 말에 그를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카일은 주눅 들긴커녕 과감하게 사내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 녀석이! 이제는 다쳐도 어쩔 수 없다. 무조건 제압해!”
포위망 안으로 뛰어드는 카일의 모습을 본 폴란이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폴란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카일은 이미 이들이 배운 검술을 모두 알고 있어, 검식을 펼치기 전 작은 행동 하나만 살펴보아도 다음 동작을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일은 가슴팍을 찌르려 드는 검을 피하는 대신 왼손을 뻗었다. 마치 다가오는 검에 스스로 손을 가져다 대는 것처럼 보였다.
“허억.”
돌발적인 카일의 행동에 놀란 사내의 검이 급격히 흔들렸다. 이들은 카일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칼끝이 가슴에 닿기 전 몸을 살짝 비틀어 피했다. 그리고 검을 뻗은 사내의 팔목을 틀어잡고는 또다시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을 찌르는 힘에 자신의 힘을 더해 사내를 잡아당겨 마치 품 안으로 파고든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카일이 상대의 품에서 벗어났을 땐 사내의 배와 가슴 그리고 어깨가 갈라져 피를 뿌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직 누구도 카일이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했단 점이었다.
“음…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도저히 어떤 검식으로 죽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저 아이, 일부러 초 근접전을 벌이고 있어.”
“예?”
“이들 대부분은 소드 유저들이지. 아직 어린 카일이 검술만으로 이들 모두를 상대하기는 힘들 터. 더군다나 이들은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고 같은 검술을 익혀, 비록 합격술을 훈련하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거야. 헌데 카일이란 저 아이를 상대하는 동안 오직 1대 1로만 싸웠네. 왜일 것 같은가?”
“그게 초 근접전 때문이란 말인가요?”
“그래. 저 아이는 대결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다른 자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어. 전투 감각이 탁월한 아이야! 한데 보일 대장이 저런 수준급의 체술도 익히고 있었나?”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조사에도 없었습니다.”
“그럼 단순히 선천적으로 뛰어난 전투 감각만으로 저런 동작이 나온단 말인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건가.”
기사단장이 감탄하는 사이 카일은 또 다른 사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폴론이 크게 소리쳤다.
“녀석은 근접전에 강하다. 녀석과 거리를 벌려!”
폴론의 말에 사내가 횡으로 검을 휘두르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이런!”
강하게 그어지는 검에 깜짝 놀란 카일은 급히 몸을 회전시켜 옆으로 빠져나갔지만, 이미 예상했다는 듯 폴론이 카일이 피할 방향을 향해 이미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카앙-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폴론이 화급히 뒤로 물러났다.
검을 쥐고 있는 폴론의 손이 급격하게 떨려왔다. 카일의 빠른 검속과 함께 무겁게 짓눌러오는 강한 힘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으윽~.”
카일의 강력한 검격을 견디지 못한 검을 든 손이 공포에 질린 듯 떨려왔다. 이를 감추려는 듯 급히 다른 한 손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은 폴론이 카일을 노려보았다.
“젠장….”
전투를 이어오는 동안 카일은 오직 단도 하나만을 이용한 초 근접전으로 저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단도로 큰 상처를 남겨 상대가 검술에 당했다는 오해와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각을 알아챈 사내들의 합격술과 함께, 폴론의 갑작스럽고 신속한 찌르기에 급히 환도를 뽑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 검은 뭐지?”
마을자경단 안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인 폴론은, 마을 사람들을 호위하며 영주 성이나 인근 영지로 나가 여러 용병과 기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카일과 같은 특이한 검을 사용하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낯선 무기에 폴론이 당황하고 있을 때 카일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손에 들려있는 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로서도 급작스런 공격에 놀라 급히 환도를 뽑아 막았지만 그리 기분이 좋지 못했다.
방금과 같은 충격이 계속된다면 주철로 만든 환도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깨어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이거 오늘 새로 바꾼 건데…!”
카일은 방금 충격으로 검등의 일부가 깨져나간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보통 주철검은 한 번에 10여 자루를 만들어 놓고 사용하긴 하지만 한 자루 한 자루 제법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기에 이렇게 부서져 나가는 파편들도 아까울 수밖에는 없었다.
“적당히 상대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네요.”
카일이 인상을 쓰며 환도에 약간의 오러를 주입했다.
소드 엑스퍼트처럼 검신에 오러를 감싼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오러 만으로도 충분했다. 약간의 오러만 주입해도 환도의 강도가 몰라보게 강력해지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이 싸움이 길어진다 해도 여기서 굳이 자신의 경지를 밝힐 필요도, 그렇다고 보일의 30식 검술을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
주변 어디선가 기사단장이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가문의 검술을 파악하기 위해서일 테니, 굳이 가문의 검식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보일 역시 이 때문에 쟝과 조셉을 이미 제압하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적당히 시간을 끌고 있었다.
카일은 환도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카일의 동작에 폴론과 남은 두 명의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눈짓했다. 카일처럼 정적인 동작은 지금까지 보일에게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카일과 보일의 검술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보일의 검식이 죄다 한 손 검식이라면 카일은 중간중간 양손 검술을 사용했다.
때문에 카일의 검과 환도는 30센티가 넘는 검자루에서부터 보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카일이 검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가만히 서 있자 폴론 일행은 주변을 맴돌 뿐 쉽게 다가서지 않았다.
“카일! 장난치지 말거라. 맹수도 토끼를 사냥할 때는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여유롭게 쟝과 조셉을 막아내며 간간이 카일을 돌아보던 보일이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카일이 최선을 다했다면 엑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캐프가 상처를 입은 건 안타까움과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보일은 카일과 달리 두 사람의 공격을 적당히 받아주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 정확했다.
기사단장의 짐작처럼 십수 년 동안 직접 키운 제자들을 향해 과감하게 손속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곧 정리될 거예요. 아버지는 지켜만 보시면 돼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보일은 카일이 두 사람을 어떻게 쓰러트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일은 근접전에 상당히 능했다. 숲에서 벌이는 오크와의 전투에서도 직접적인 검술보다 단도를 이용한 근접전을 능숙하게 사용했었다.
현재 사용하는 단도 역시 카일이 직접 만든 것으로 길이가 30센티를 넘지 않았다. 비록 합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단단하고 날카로워 한번 공격을 당하면 제법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일에 대한 걱정을 지운 보일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쟝, 찌르기를 이렇게밖에 못 하느냐!”
쟝의 검을 걷어 내는 동시에 훤히 열려있는 가슴을 향해 보일의 발이 날아들었다.
퍼억-
가슴을 얻어맞은 쟝이 1미터 이상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바로 일어나려던 그는 몸을 급히 숙이며 격하게 피를 토해냈다.
“커억~.”
한참 피를 토하던 쟝은 힘겹게 일어나 카일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들의 계획은 카일을 인질로 잡고 그대로 영주 성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쟝과 조셉은 카일이 인질로 잡힐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면 되는 일로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일에 방해가 될 매튜와 필론을 함정으로 유인해 가두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이라 생각했었다.
기사단장이 이 일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이 되어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일이 인질로 잡혔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5명의 소드 유저 중 두 명을 쓰러트리고 3명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도움을 바라기 어렵다는 것은 쟝과 조셉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핏물이 묻은 입가를 훔친 쟝이 폴론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폴론!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여기서 모두 죽는 거야!”
쟝은 폴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보일에게 달려들었다.
보일을 상대하던 조셉의 몸은 피로 범벅이었다. 쟝이 쓰러진 잠깐 사이에 보일의 검이 조셉의 몸을 스친 탓이었다.
폴론은 쟝의 말에 순간 카일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보일을 닮아 덩치와 키는 크지만, 그래도 카일은 고작 15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이상한 동작 하나에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은 공격도 못 하고 가만히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폴론은 바로 이게 카일이 원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보일이 쟝과 조셉을 처리하고 오기만 하면 싸움이 금방 끝날 테니,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하는 셈일 터였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지켜보는 기사단장 역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장님. 보일 천인장의 검술 중에 저런 동작이 있나요?”
수행기사인 볼란의 말에 기사단장인 켈토는 고개를 저었다.
“없다. 아무리 보아도 저 자세와 동작은 검술이라기보단,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긋는 단순한 동작인 것 같은데…. 저런 큰 동작은 이후 분명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야. 아무래도 저런 단순한 동작을 이용해 심리전을 벌이는 것 같구나. 단순한 만큼 어떤 검식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를 줌으로써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 같군. 저 아이의 입장에서는 시간만 끌어도 자신에게는 유리하니까 말이야.”
켈토의 설명에 수행기사인 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기사들의 검술은 찌르기 위주의 검술에, 짧게 끊어가는 베기 기술이 주를 이뤘다. 카일 처럼 큰 동작은 상대가 피하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동작 이후 허점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폴론 일행도 쉽게 덤비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벌써 두 명이나 당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알고 있는 보일 천인장의 검술과는 전혀 다른 검술을 드러냈으니….”
“하지만 폴론도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하겠지… 여기서 더 망설이다 조셉과 쟝이 쓰러지는 순간 폴론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테니까”
기사단장을 바라보던 볼란이 카일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마침 폴론과 사내들이 빠르게 카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