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맹세에 대한 책임
카일은 환도와 검을 여러 자루 가지고 다녔다. 모두 카일이 집에서 직접 주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었다. 일반적인 검보다는 조금 더 두텁게 검신을 제작했다. 길이는 보일의 검보다 짧았지만, 무게는 오히려 더 무겁고 예리하게 만들어졌다.
그만큼 베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단 건 아니었다.
오크 2~30마리를 베어버리면 날과 검신에 실금이 가거나 아예 부러져 버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 단점을 상쇄할 만큼 강력한 베기를 사용할 수 있어, 보일은 환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결국 5명이란 말은 저까지 포함한 숫자군요.”
“물론이지. 어찌 되었든 너도 몇 달 후면 자경단에 들어가야 하잖느냐.”
“전 벌써 들어간 줄 알았는데요?! 외곽 순찰을 한 지가 벌써 일 년이 다되어 가고 있거든요.”
“하하. 그거야 이것저것 가르칠 것이 많아 데리고 나온 것이지. 정식으로 자경단에 들어가는 것은 두 달 뒤다.”
“휴~. 예, 알겠어요.”
“설마 검술이 늘었다고 궁술을 등한시하는 건 아니겠지!”
보일이 카일의 허리에 감겨있는 검은색 띠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기에는 그냥 금속으로 만든 허리띠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드워프가 만든 활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걱정 마세요. 요즘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등에 걸려있는 활을 꺼내며 카일이 말했다.
수련할 때 카일이 주로 사용하는 건 등에 걸려있는 장궁이었으나, 가끔 이렇게 외부로 순찰을 나올 때 단궁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경단 안에서도 궁술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가죽이 두꺼운 오크들에게는 큰 효용이 없어 주로 투창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외곽 순찰 시에는 견제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기에 외곽 순찰 조에게는 필수적으로 궁술을 배우게 하고 있었다.
“그래.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 오늘은 이만 숙영지로 가자 곧 날이 어두워지겠구나.”
씩 웃은 보일이 몸을 돌리자 카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카일이 초급 엑스퍼트에 오른 것은 이미 1년 전이었다. 현재 그는 중급 소드 엑스퍼트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는 카일이 익힌 태극권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일단 엑스퍼트 초급에 오르자 지금까지 받아들이던 마나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순수한 마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불필요한 마나는 몸 밖으로 배출된 것이다. 현재 카일의 몸 내부엔 순수한 오러 만이 몸 안에 쌓여 각 혈들을 채우고 있었다.
몸 안에 불순물이 적게 쌓인 어린 나이 때부터 태극권이라는 뛰어난 마나 연공법을 익히다 보니, 보다 정순한 마나를 정제할 수 있고 덕분에 중급에 조금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
* * *
순찰을 마친 카일과 보일이 목책으로 다가오자 망루 위에서 망을 보던 조셉이 달려 나왔다.
“마스터!”
“조셉이구나. 오늘 야간경계조인가?”
“그렇습니다. 카일도 잘 다녀왔니?”
“그럼요.”
카일의 대답에 조셉이 잠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보일을 바라보았다.
“저… 마스터. 영주 성에서 기사 단장님이 왔다 갔습니다.”
“단장님이…. 음… 너희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예상대로 돌아온 긍정에 보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핸 남작령의 기사단 숫자는 10명을 넘지 않았다. 인근 자작가 역시 기사단의 숫자가 20명을 넘지 않았다. 자작가의 소드 엑스퍼트는 10명가량일 뿐이었고 다핸 남작의 기사단엔 소드 엑스퍼트가 5명을 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보일이 직접 키워낸 4명의 초급 엑스퍼트와 5명의 소드 유저의 존재는 이곳 남부 영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이었다. 영지에 있는 기사급 전력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은 영주로서 당연한 욕심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 전에도 말했지만 너희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일전에 말한 대로 내 허락 없이 누구에게도 검식을 전수해서는 안 된단 것이다. 이는 일전에 맹세를 했으니 믿겠다.”
엄중한 말투로 조셉을 향해 말한 보일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언제 그런 맹세를 받아두신 거예요?”
“당연히 처음 검술을 가르칠 때부터 맹세를 받아두었다. 17식의 검술에 불과하나 함부로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가문의 검식이다. 이 중 12개의 검식은 우리 가문의 아픔과 비화가 담긴 검식이니, 쉽게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일의 말에 카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형들이 맹세를 어기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죽이실 생각이군요.”
“그렇다. 비록 내 손으로 그들을 길러냈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만큼 맹세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일은 네가 해야만 한다.”
“제가 말인가요?”
“카일. 이것은 우리 가문의 일임을 명심해라! 이건 너도 지켜나가야 할 가문의 법칙이다. 우리 가문에 남은 사람은 비록 너와 나 둘뿐이지만, 언제나 선조들에게서 내려온 유지는 지켜야 한다.”
보일은 선한 의도로 저들에게 검식을 가르쳐 줬다. 만일 저들이 이를 어긴다면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헌데 맹세를 어긴다고 해도, 남작가에서 보호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난 용병이다. 오래전 이곳에 정착했다곤 해도 용병패는 아직도 유효하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단 말이지. 여차하면 맹세를 어긴 녀석을 제거하고 영지를 떠나면 그뿐이다.”
보일의 목소리에선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남작이 왜 이들을 회유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들 9명은 모두 보일에게 검식을 전수 받아 이 중 4명이 소드 엑스퍼트에 오르자, 영주는 이들을 기사로 들여 보일의 검식 일부를 얻으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사실은 보일의 검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한 것과 같았다.
“음… 그래도 형들이 검술을 영주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하. 영주가 이들을 기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검술을 얻기 위해서다. 지금 당장은 검술을 알려주지 않을지 몰라도, 기사들의 집단 전술 훈련에서는 결국 노출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수련을 하며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검식을 훔칠 수 있지”
상위기사들이나 높은 경지의 기사들이야 개인 연무장이나 수련실에서 수련을 한다지만 초급 엑스퍼트의 기사들이 이런 걸 바랄 수는 없었다.
사실상 보일이 이들에게 시킨 맹세는 기사단에 들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이 또한 맹세의 과정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일이라 마냥 보일을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들이 검술을 익힐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남작님은 좀 너무한 것 같아요. 이렇게 남의 검술을 집요하게 노리다니….”
“그래도 남작의 경우는 좀 점잖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귀족들의 경우 무력을 사용해 검술을 빼앗고, 이를 은폐하기도 한단다. 이 때문에 간혹 영지전이 벌어지기도 하지. 달리 소속된 곳이 없는 용병이라면 용병 길드에서 나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응징을 하기도 하고….”
흐려지는 보일의 말꼬리에서 용병 길드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결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보일과 카일이 집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셉과 쟝이 집으로 찾아왔다.
“마스터!”
그들의 표정은 무척 딱딱히 굳어있었다.
“역시 쟝과 조셉이 왔구나. 매튜는 오지 않은 것이냐.”
보일의 말에 쟝과 조셉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저희가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가르친 것이 벌써 십수 년이다. 어찌 너희를 모른다고 하겠느냐.”
덤덤하게 이어지는 말에 쟝과 조셉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스터. 제발 저희가 기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하. 난 너희에게 기사가 되지 말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다만 너희가 나에게 한 맹세를 지켜 달라는 것이다. 나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가 너희를 가르친 마스터라면 말이다!”
파리하게 질려있던 쟝과 조셉의 얼굴엔 이제 핏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검술을 가르친 것은, 기사가 되어 신분이 상승하고 부유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었다. 몬스터로 고통을 받는 마을을 지켜내라는 뜻이었다. 때문에 특별히 너희 아홉에게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전의 검술을 가르친 것이다.”
보일이 단호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또한! 너희는 그것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다. 지금 너희들은 이 마을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기사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려 하고 있다. 내가 왜 너희에게 검술의 제약을 풀고 다른 이에게 검술을 전해 줘야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쟝과 조셉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마을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어기지 않을 겁니다. 기사가 된다고 해도 마을이 위험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마을을 지킬 겁니다.”
“그렇습니다. 영주님에게 충성하는 것 또한 영지를 지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쟝과 조셉은 자신들의 부와 명예 때문에 기사가 되려고 한다는 보일의 말에 반발하며 소리쳤지만 보일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마을이 위험할 때 언제든 달려온다?”
“당연합니다. 이 마을을 지키는 일 또한 영지를 지키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묻겠다. 영주님이 마을에 처한 위험을 보더라도 마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보일의 말에 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주님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허락하실 겁니다.”
“흥!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다. 그때 가서 영주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아니, 이곳 샤론 마을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라 명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주군의 명을 어기고 마을로 올 테냐?”
이번엔 쟝도 조셉도 입을 다물었다.
기사는 주군의 명에 충성해야 하고 그에 따라 부와 명예가 주어지는 존재였다. 주군의 명을 어긴 기사는 불명예의 기사들로 귀족사회에서 순식간에 매장당했다.
때문에 불명예 낙인이 찍힌 기사들의 생활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기도 힘들고 용병이 되기도 힘든 존재였다. 용병 자체가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 가문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대답을 못 하느냐. 그럼 다른 걸 물어보마. 마을이 위험에 빠지면 달려오겠다. 그야말로 웃기는 말이 아니냐. 여기서 영주 성까지는 말을 달려 하루 반나절 거리다. 마을 사람들은 너희들이 돌아올 동안 하루 반나절을 오크들과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런대도 개인의 부와 명예 때문이 아니라 말하겠느냐!”
보일의 말에 한동안 쟝과 조셉이 서로 기묘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스터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맹세를 어기고 영지의 기사가 된다 하더라도, 영주의 기사인 저희를 마스터께서 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