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통곡의 협곡
보일과 카일은 아찔한 높이의 절벽이 양쪽으로 자리 잡은 거대한 협곡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오크 랜드와 연결된 협곡의 입구였다. 협곡의 폭은 대략 30여 미터로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어떠냐. 이곳이 네가 오고 싶어 했던, 오크 랜드로 들어가는 통곡의 협곡이다.”
수백 년 전, 수많은 영주들과 왕들이 오크 랜드의 광활하고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도전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하며 질렀던 통곡과 비명이 담겨있다고 전해지면서, 이곳은 지금까지 통곡의 협곡으로 불리고 있었다.
“대단해요. 헌데 아버지는 협곡을 넘어가 본 적이 있나요?”
“넘어가 본 적은 없지만, 위에서 바라본 적은 있단다.”
“절벽 너머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카일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자 보일이 협곡의 좌측 절벽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으로 올라가면 가파르긴 해도 그나마 절벽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곳을 통하면, 절벽 중간까지 올라가 오크 랜드를 볼 수 있다.”
“직접 협곡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한가요?”
“하하, 녀석! 왜? 직접 넘어가 보고 싶은 것이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웃고 있던 보일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에는 저래도, 저 협곡의 반대편에는 붉은 트롤 무리가 몰려 살고 있다.”
“붉은 트롤요? 처음 들어보는 몬스터에요.”
지금까지 샤론 마을을 침공한 몬스터는 대부분이 오크였다. 간혹 트롤이 나타나고는 하지만 대부분 피부가 녹색인 일반적인 트롤이었다. 붉은 트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저 협곡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허나 붉은 트롤은 대단히 강력한 몬스터들이다. 워낙 희귀한 몬스터들로, 화산지대가 있는 저 먼 제국 북부에서나 서식한다고 알려진 놈들이다. 크기는 일반 트롤보다 조금 작지만, 오히려 힘은 세고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만큼 아주 강력한 놈이지.”
“대단한 놈들이군요!”
“그래. 특히 그들의 붉은 가죽은 대단히 질겨서, 제국 황실 기사들의 갑옷으로 쓸 정도로 귀할 뿐만 아니라 고가에 거래가 된단다.”
“이야! 그런 대단한 놈들이라면 한 마리만 잡아도 큰돈이 되잖아요?”
당장이라도 협곡 안으로 들어가 놈들을 잡고 싶은지 카일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집을 쓸어내렸다.
“그래! 네 말마따나 큰돈이 되지만 저 녀석을 잡기는 쉽지 않다. 워낙 난폭하고 힘이 좋아 중급 엑스퍼트들이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사납다. 특히 일반적인 트롤과는 달리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살기 때문에, 저놈들을 잡으려면 기사단을 동원해야 할 거다.”
보일의 말에 나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보일의 말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저놈들은 재생력이 장난이 아니지. 트롤과는 전혀 달리 생겼는데도 괜히 붉은 트롤이라 불리는 게 아니란다. 저런 놈들이 이곳에 대략 2~3백 마리가 있단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의외로 고마운 놈들이지.”
“네? 어째서요? 오히려 저렇게 강력한 놈들이 있으면 마을에 더 위협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다. 저놈들은 우리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다. 붉은 트롤은 특이하게도 일정한 서식지를 이탈하는 일이 거의 없단다.”
“협곡 입구를 벗어나지 않는단 말인가요?”
카일이 어둡고 음침해 보이는 협곡 입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강력한 몬스터가 협곡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녀석들은 원래 화산지대에 서식한단다. 저들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유황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이 협곡 너머 입구 부근에는 땅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온천이 있는데, 아마도 온천에 유황이 많이 포함되어 이곳에서 서식하는 것 같단다. 덕분에 협곡을 넘어오는 오크들 일부가 저들의 먹이가 된단다.”
보일의 말에 카일이 놀란 얼굴로 협곡 사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보일의 말을 듣고 나니 멀리서도 희미하게나마 뿌연 수증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럼 저들이 오크를 사냥한다는 말이군요?”
“그래. 저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인지는 몰라도, 덕택에 마을로 넘어오는 오크들 상당수가 줄어든 것이다.”
보일의 말대로 저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오크가 넘어왔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붉은 트롤 2백~3백 마리가 잡아먹는 오크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한 숫자일 것이다.
“그럼 차라리 이곳 협곡 사이를 방벽을 쌓아서 막는 건 어때요? 그럼 오크들을 확실히 막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거라. 우리가 이곳에 방벽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붉은 트롤의 눈을 피해야 한단 거지. 놈들이 마을 쪽으로 넘어오지 않는 것은 눈앞에 오크라는 수많은 먹이가 있기 때문이지, 인간이라는 먹이를 싫어해서가 아니란다. 아니 오히려 몬스터란 족속들은 선천적으로 인간이란 먹잇감을 상당히 좋아한단다.”
“오크를 막는 것도 버거운데, 그들까지 몰려든다면 확실히 힘들겠네요.”
“더군다나 이곳에 방벽을 설치하려면 상당한 인력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이 영지민이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협곡의 입구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붉은 트롤이 아니더라도 분명 오크들이 대규모 침공을 가해 올 것이다.”
지금도 오크들은 붉은 트롤들에게 무수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마을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협곡 입구에서 방벽을 쌓기 위해 소란을 일으킨다면, 분명 오크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만한 재원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대 귀족이나 왕국에서 그만한 재원을 들여 방벽을 설치하려고 할까? 더군다나 방벽을 설치해서 이곳에 주둔군을 둔다 해도, 과연 이곳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투입 시킬 수가 있겠느냐? 모두 어려운 일이지.”
현실을 직시한 보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한 방안은 모두 왕국 차원이나 대영지 영주의 대규모 지원이 지속적으로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들어가는 막대한 재물에 비해 돌아오는 이익이 적으니, 누구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곳 샤론 마을이 왕국과 오크 랜드를 연결하는 유일한 장소라면 왕국 차원에서 일을 추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왕국에서 오크 랜드와 연결된 협곡은 세 곳이나 있다. 이곳 협곡의 간격이 가장 넓고 완만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곳의 영지에만 지원해서 방벽을 건설할 수는 없다.”
다른 영지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오크들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에서, 한 영지만 지원해 줄 수는 없단 소리였다.
“그런가요.”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일이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말아라. 자경대에도 이제 엑스퍼트만 6명이 있지 않으냐. 초급이긴 해도 말이다. 무엇보다 최근 영주님께서 병사 백 명을 마을에 상주시켜 주셨으니 오크들이 이곳을 넘어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영지군 1백과 신속 자경대 4백으로 유사시에 대응하고 있으니 한시름 놓아도 괜찮을 거란다.”
다독이는 보일의 말에 카일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마을에 있는 소드 엑스퍼트는 아버지를 포함한 5명 아닌가요? 언제 한 명이 늘었나요?”
지그시 카일을 바라보던 보일이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이제는 아비까지 속이려 하느냐? 카일, 이 아비는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얼마 전 엑스퍼트에 오른걸! 하하하!”
화들짝 놀란 카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2달만 지나면 카일은 16살이 되었다. 지금 나이에 엑스퍼트에 오른다는 것은 뛰어난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검을 잡는 사람들은 마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드 유저에서 엑스퍼트로 넘어가는 단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과정이 검술을 익히는 과정 중 두 번째로 어려운 단계인 탓이었다.
물론 첫 번째로 어려운 건 소드마스터로 넘어가는 과정이지만, 소드마스터의 단계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뜬구름과 같다면, 소드 유저에서 소드 엑스퍼트로 넘어가는 단계는 본격적으로 오러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의 단계로, 수많은 용병과 예비 기사들이 이 과정을 넘지 못하거나 너무 늦은 나이에 올라 좌절하기도 했다.
즉 초급 소드 엑스퍼트를 넘어 중급이나 상급으로 넘어가는 단계부터는 얼마나 고급 연무 검술을 익혔는가가 중요하다면, 초급 소드 엑스퍼트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본 연무 검술이라 할 수 있는 10개 전후의 검식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안정적이냐와 함께, 검술을 익히는 자의 자질도 상당히 중요했다.
이 기본이 되는 검식 중 과거 보일의 증조부가 훔쳐 온 초급검술은 무려 12 검식으로 이루어진 고위 검식의 일부라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보일이 완성한 30 검식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고, 마을에서 보일에게 배운 이들 역시 소드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던 것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전 우연히 검술을 수련하던 널 보았다. 아마도 네가 환도라 부르는 것을 가지고 수련할 때였지.”
보일은 카일의 허리에 걸려있는 검집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검집은 상당히 독특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두 개의 검집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검집은 그 길이와 크기는 같지만 형태는 약간 달랐다.
한쪽이 곧은 직선 형태의 검이라면 다른 한쪽의 검은 완만하게 휘어진 형태로, 카일이 직접 만든 독특한 형태의 검(환도)이었다.
“며칠 전이면… 새벽 수련 때군요.”
“외곽 순찰을 도는 날이면 이 아비도 수련을 하지 않는데, 어린 네가 새벽같이 일어나 수련을 하니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아비로서 같이 새벽 수련이라도 할 생각에 나왔다가 네가 환도에 일으킨 오러를 보았다.”
보일은 카일을 대견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외곽 순찰이라는 힘든 과정 속에서도 쉬지 않고 검술을 수련하다가 결국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으니 더욱더 기특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네가 환도를 사용하던 방식이 흥미롭던데.”
“아, 보셨군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카일이 보일을 바라보았다. 당시 가장 기초적인 검식을 수련하고 있었을 때라, 조선세법에 대해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조선세법에 관해 물어본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초적인 베기와 찌르기의 동작들이지만 생각보다 효율적이더구나. 혹 이 아비도 같이할 수 있겠느냐?”
보일이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처음 환도를 보았을 때 보일은 상당히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가끔 펼치는 베기 기술에는 적당할지 몰라도 보일이 완성한 검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카일이 환도를 들고 수련하는 모습을 본 뒤 보일의 생각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장 기초적인 기술만으로도 보일은 환도의 효용성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환도법을 배워보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이 아비도 한번 배워보자.”
“그렇다면… 알겠어요.”
“그래, 고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