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7화 (17/404)

17.외곽 순찰

이른 새벽. 여느 때처럼 달리기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버섯차 향과 함께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가 집안 가득 퍼져 있었다. 어쩐 일인지 아직 잠에 취해 있어야 할 보일이 이른 아침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보일의 모습에 카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음식을 만드는 일은 모두 카일이 전담하고 있었다. 보일의 음식 솜씨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탓이다.

보일이 만드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고기를 굽거나 마을의 빵 굽는 집에서 사온 보리나 곡물로 만든 거친 빵과 산양에게서 짠 우유 혹은 직접 만든 버섯 차가 전부였다.

때문에 1년 전부터 카일은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음식은 보일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곡물과 고기를 적당히 섞은 스튜는 물론이요, 직접 밀과 보리를 일정한 비율로 섞어 반죽해 화덕에서 구운 부드러운 빵, 그리고 산 열매로 만든 잼과 허브로 만든 샐러드 등 제법 풍성하고 다양한 음식이 차려졌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보일이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물론 운동을 가기 전 이미 빵 반죽을 만들어 놓고 나가긴 했지만, 보일이 빵과 고기를 구워놓고 차를 끓여 놓은 것은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뭐하느냐! 어서 와서 자리에 앉지 않고. 오늘은 아비가 솜씨 한번 부려 보았다.”

잠시 카일의 눈치를 살피던 보일이 민망한 듯 커다란 그릇에 놓인 큼지막한 고기를 들어 뜯어 먹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카일은 아무 말 없이 보일과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사슴고기를 들고 한동안 묵묵히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탁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던 카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갈빗대를 내려놓았다.

연신 카일의 눈치를 살피는 보일 때문에 더는 식사를 이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말해 보세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다! 할 말은 무슨….”

“지금 계속 눈치를 보셨잖아요.”

“저기…그러니까… 어제… 그 술 말이다.”

보일이 어제 마신 술 이야기를 꺼내자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술이라면 이제 없어요. 조금 만들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아껴 먹는다면 적어도 한 달은 마실 수 있는 양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한 번에 다 해치울 수가 있어요.”

단호한 어조였다. 보일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나도 모르게 말이다. 내가 그런 고급술을 언제 먹어보겠느냐. 그렇게 좋은 술은 예전에 다핸 남작께서 주신 위스키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니 더 만들면 안 되겠니?”

보일이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물론 그도 술 빚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 보일은 양조장에서 술을 받아 운송하고 호위하는 의뢰를 맡았었다. 그러면서 공짜 술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지만, 그런 술들은 대부분 하급 위스키나 맥주 정도에 불과했다. 듣기론 이런 술들도 만드는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어렵다고 들었다.

“휴~.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술 먹고 주정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어제 마시는 양을 보니 조금 만들어선 안 될 것 같던데요?”

“하하. 아비가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아도 좋아는 한단다. 이왕 만들려면 많이 만들어 놓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보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카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많은 양의 술을 빚을 수 없어요.”

“응? 혹 재료가 부족한 것이냐? 그렇다면 당장 수수를 더 구해 주마.”

“그게 아니라 술을 빚으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아요. 어제 먹은 술도 빚는 데 두 달이 걸렸어요. 특히 좋은 술을 만들려면 그만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술은 사람이 빚는 게 아니라 시간이 빚는 거니까요.”

“헉… 두 달이나 말이냐?”

“그래요. 게다가 양을 늘리면 늘어난 양만큼 큰 항아리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항아리까지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것까지 생각하면 삼 개월은 족히 걸릴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린단 말이냐?”

“일단 그 정도란 이야기예요. 더 걸릴 수도 있어요.”

고집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카일의 목소리에 보일이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삼 개월이나 걸린다는 말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었다.

“아… 알겠다. 일단 만들어다오….”

“그럼 일단 수수를 좀 더 구해 주세요. 그동안 저는 큰 항아리를 새로 만들어야겠어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마을에서는 때아닌 수수를 구하러 다니는 보일을 볼 수 있었다. 카일 역시 처음으로 대장간을 쉬었다. 평소라면 망치질을 할 시간이었으나 카일은 밀가루를 꺼내어 둥글게 반죽해 누룩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밀 누룩을 만드는 기본 과정은 거친 통밀을 빻아서 틀에 넣은 후,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발로 밟아 밀 누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일이 만드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고급 막걸리인 이화주를 만들 때 쌀가루를 뭉치던 게 떠올라 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반죽해 둥글게 모양을 잡아 누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밀짚에 감싸 따뜻한 곳에 놓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될 것 같은데?”

보름 정도가 지나자 만들어 놓은 밀가루 반죽 위로 노르스름한 곰팡이들이 예쁘게 피어 올라있었다. 잘 만들어진 누룩을 보며 카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마당으로 향했다. 보일이 얼마나 수수를 많이 구해 왔는지, 사람 키만 하게 만든 술독 3개는 족히 담그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수수가 자루에 담겨 넓은 마당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보글보글-

3개의 커다란 장독 안에서 술이 익어가는 소리가 깊어질수록 집안 가득 과일향이 은은하게 번져갔다. 이번에는 수수도 넉넉하고 양도 많이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할 생각으로 덧술을 세 번 넣은 삼양주를 만들었다.

3개월이 지나고 술독 위로 가라앉아 있던 수수가 떠오르자 찌꺼기들은 걸러 미리 만들어 놓은 증류기에 넣었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큰 술독 한 개 분량의 술이었다.

3개월하고도 보름이 지나서야 술이 완성됐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보일은, 술을 먹어보고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캬! 지난번보다 향과 맛이 더 깊어졌구나! 좋아, 아주 좋아!”

보일이 연신 칭찬을 했다.

이번에 맛이 깊어진 까닭은 삼양주인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술이 잘 빚어진 것은 분명했다. 이곳 동굴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은 술을 빚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동굴 주변으로 흐르는 차가운 물이 땅속에 묻어둘 술이 잘 숙성되도록 도와준 것이다.

“말씀드리지만 일주일에 작은 단지 하나만 마시는 거예요. 약속하셨죠!”

지난번 마신 술 항아리의 절반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항아리를 들어 보이며 카일이 엄포를 놓았다. 아쉬운 듯 입술을 핥던 보일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 * *

보일은 카일이 15세가 되자 타론의 대장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카일 역시 강철 제련법을 알지 못하는 타론에게 배울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별다른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어 쉬이 수긍했다.

“이건?”

카일 앞에 보일이 잘 무두질 된 가죽으로 만들어진 레더 아머를 내려놓았다.

“네 것이다.”

자신의 것이란 말에 카일이 눈을 반짝이며 검은색으로 물들인 레더 아머를 펼쳤다. 보일의 레더 아머처럼 반코트 형상의 갑옷 위로 검 붉은색의 합금판이 가슴 쪽 심장을 보호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타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기 시작한 합금판(엄신갑)으로, 원래의 붉은색 합금강에 기름을 먹인 뒤 태워 눈에 띄는 붉은색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이 정도의 합금이면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 같았다.

“이제 15살이 되었으니, 1년만 더 지나면 자경단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전에 날 따라 다니며 미리 경험을 쌓도록 해라.”

10세 이후부터 자경대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15세가 되면 본격적으로 외곽 순찰을 나갔다. 대부분 목책과 가까운 곳을 위주로 순찰을 도는 게 주 임무였다. 목책 외곽을 돌며 숲에 대한 아이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숲에서 살아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를 따라 외곽 순찰을 나가는 건가요?”

“그래. 앞으로 외곽 순찰을 할 때면 너도 나와 같이 가도록 하자.”

보일이 말한 건 아이들이 경험을 쌓기 위해 나가는 가벼운 순찰이 아니었다. 외곽 순찰을 나간 보일과 지원조들은 숲 깊숙한 곳까지 확인했다. 꼼꼼히 수색하는 터라,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십여 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단순한 순찰이 아니라 오크들의 침공을 확인해야 하기에 오크 랜드 입구까지 넓은 범위를 돌았다. 그만큼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보일을 비롯한 지원 조원들은 상당한 무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예전부터 보일은 마을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별해, 12 검식을 가르치고 수련시켰다. 그 훈련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바로 지원 조였다. 지난번 보일을 데리러 온 매튜가 이들 중 하나였다.

1년 전 보일은 이들에게 5개의 검식을 추가로 가르쳤는데, 그 덕분인지 얼마 전 4명이 소드 엑스퍼트에 올랐다. 지원조의 무력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보일은 직접 카일을 데리고 외곽 순찰을 나가도 괜찮겠다 결정 내린 것이다.

“언젠가 오크 랜드 입구인 통곡의 협곡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음…. 목책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나와 같이 외곽으로 순찰을 돌면 오크들을 직접 만나게 될 텐데…. 무섭지 않으냐?”

“아버지와 함께 가는 거잖아요! 전 무섭지 않아요.”

“그래….”

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검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외곽 순찰에 함께 한다는 건, 사실상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을 경험하게 해주겠단 소리였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 부모로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고 강하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검을 잡고 검술을 익힌 이상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의례이기도 했다.

* * *

“어떻게 되었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두 명이라, 아쉽군!”

“어차피 보일만 확실하게 잡는다면 남은 두 명도 모두 영주님의 밑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다핸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자경대의 지원조 중 네 명의 대원들이 소드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영주와 기사단장은 재빨리 사전 조치를 취했다. 엑스퍼트에 오른 자경 대원들을 영지에 기사로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보일이 아들인 카일을 데리고 외곽 순찰을 나가, 기사단장이 조금 더 쉽게 대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기에 조금 더 쉽게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영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허나 과연 그들이 잘해 낼 수 있겠나? 상대는 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자일 수도 있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수 있네!”

“그들은 그동안 직접 검을 쥐여 주고 가르친 아이들입니다. 아무리 보일이라도 손속에 사정을 둘 겁니다. 그때….”

“흠…. 혹 보일이 반발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군.”

“처음이야… 다소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도 이 결정이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다핸 남작이 긍정했다. 이번 일은 결코 보일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 확신을 했기에 다핸 남작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지금 다핸 남작령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힘없는 작은 소영지에서 벗어나 중급영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인근 영지보다 강력한 무력을 가지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지 안에 중급을 넘어 상급경지를 바라보는 실력자를 더 이상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익히고 있는 검술이 다핸 남작은 무척 탐이 났다. 그렇다고 상급실력자를 무작정 힘으로 겁박해 검술을 받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칫 반감을 사 적대적인 영지로 넘어가는 날에는 오히려 다핸 남작령이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에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네. 만약 실패하더라도 기사단이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될 것이야. 자칫 기사들까지 손실을 입으면 큰일이니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부단장만을 데리고 샤론 마을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와 보일이 부딪히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군.”

얼굴 가득 걱정을 머금은 다핸 남작이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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