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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16화 (16/404)

16.천인대장 보일 2

켈토의 말에 남작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상급의 검술이란 단어만 들어도 남작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상급 검술이라. 정말 욕심이 나는군!”

원래 이 일대는 모두 지금은 사라진 백작령에 속해 있었다. 본래 영지를 지니고 있던 백작령은 오크 랜드에서 쏟아져 나온 막대한 오크들로 인해 사라졌다. 당시 수천에 이르는 백작가의 병사들과 두 개의 기사단이 순식간에 휩쓸려 버렸다.

인근의 영지와 왕실에서 서둘러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백작령만 피해를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침공한 오크의 숫자는 1만 명에 달했다. 그 엄청난 숫자를 이기지 못한 백작령의 영주와 기사들은 대부분 전멸했고 백작가는 대가 끊겨 버렸다.

결국 왕실에서는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백작령을 백작의 가신 중 살아남은 자들에게 내렸다. 당시 적당하게 공을 인정받은 기사단장에겐 자작의 작위를, 남은 두 기사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려준 것이다.

그중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가 바로 현 다핸 남작의 5대 조부였다.

그렇다 보니 다핸 남작가의 검술 자체는 하급검술일 수밖에 없었다. 다핸 남작 역시 검술에 대한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 고작 소드 유저의 경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질이 떨어진다고 하여 기사 가문의 가주인 그가 검술에 대한 욕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현 다핸 남작의 부친이 캘토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을 시집보낸 것도 이런 욕심 때문이었다. 혼인이 성사된 후 하급에서 중급 검술을 넘나드는 몰티엔 가의 검술이 남작 가문에 전해졌지만 그다지 큰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귀족들조차 중급 검술을 얻기 위해 혼인이란 정략혼을 선택하고 있지만 이조차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검술이 아니었다.

“생각 같아서는 딸이라도 주고 가문으로 들이고 싶군.”

눈을 휘둥그레 뜬 켈토 기사단장이 남작을 바라보았다.

“영주님! 영애는 이제 고작 10살입니다. 소영주께서 들었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하하! 말이 그렇다는 것이네.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에일러를 보내겠나.”

남작은 웃으며 말했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 말투였다.

* * *

그 뒤로도 보일은 한 달은 더 검술수련에 매진했다.

검술을 완벽하게 익히고 새롭게 늘어난 마나 로드를 확실하게 닦아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는 어떻게 자경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음…. 천인장이 된 이상 이대로 자경단을 놓아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을 함부로 간섭할 수도 없고. 난감하군!”

현재 오크 랜드와 접한 10개 마을의 총 자경단 숫자는 대략 600명 규모였다. 게 중 가장 돌출된 위치인 샤론 마을이 대략 250명, 그 뒤로 3개의 마을이 각각 60~70명이었다. 나머지 후방지역의 마을은 적게는 10명 많게는 50명 정도의 자경대를 운영하며, 영지로 들어오는 몬스터를 방어하고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뒤쪽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 더 부유하고 안전할 것 같지만, 실제로 안전하면서도 부유한 마을은 바로 샤론 마을이었다. 이는 후방의 마을과 샤론 마을이 오크 침공에 대비하는 방어책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론 마을이 단단한 목책과 강력한 자경단으로 몬스터와 적극적인 전투를 벌인다면, 후위의 마을들은 몬스터의 침입이 있을 경우 대부분 마을을 비우고 은신처에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경단을 한 곳으로 모을 수만 있다면, 더 효율적으로 몬스터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주변의 지형을 제법 자세하게 그려놓은 양피지를 펼친 채 보일은 고민을 거듭해 보았지만,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지도를 보면 마을은 대부분 산과 산 사이 거대한 협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북쪽을 향할수록 협곡은 점차 넓어지며 평원으로 변모했다. 샤론 마을이 위치한 남쪽이 가장 좁은 곳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대부분의 오크들이 거쳐 가야 할 위치에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자경단을 통합해서 관리해야 할 상황이라면, 협곡 전체를 한 번에 막아 병력을 집중시켜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샤론 마을이 모든 몬스터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샤론 마을의 주민이라면 당연히 반대할 터였다.

-탁

식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하는 보일의 앞에 카일이 안고 있던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아직 안 잤구나.”

“예. 잠이 안 와서요. 자경단 통합문제로 걱정이 많으시죠?”

“휴, 그렇단다. 지금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 방법도 있지만, 기사단장은 자경단의 규모를 1천 명까지 늘리길 원하고 있다.”

영주가 보일에게 천인장의 지위를 내린 건 단지 허울이 아니었다. 실제로 보일이 자경단의 숫자를 천으로 늘려 주길 바랐다.

4년 전 벌어진 대규모 오크 침공 탓이었다. 제대로 침입을 막아내지 못해, 그때 마을 3개가 붕괴했고 자경단도 수백이 죽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피해였다.

이 침공 때 영지를 공격한 오크는 천 마리 정도였다. 당시 자경단은 마을마다 분산되어 있었다. 오크들은 이들을 각개격파하며 큰 피해를 남겼다. 그렇다고 모든 자경단을 한곳에 모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영주나 기사단장으로서는 자경단의 숫자를 늘리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 판단을 내린 것이다.

“휴. 자경단의 숫자를 천 명으로 늘린다면 대규모 오크 침입을 방어하기 더 용이해지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그것보단 지금 있는 자경단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는가가 더 중요하지.”

“그럼 영주님께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것은 어떨까요?”

다핸 남작령의 병사는 대략 800명 수준의 병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 소형 남작가가 보통 500명 수준인 걸 감안한다면 제법 많은 병사를 유지하는 셈이었다.

다핸 남작령이 오크 랜드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뚫리면 주변 영지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당연하기에, 왕실에서 특별히 세금을 감면하고 키울 수 있는 병력의 수도 늘려 준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4년 전과 같이 수백의 오크들이 갑자기 올라와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어 전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도를 보며 고민에 싸인 보일을 잠시 보던 카일은 가져온 항아리를 덮고 있던 천을 벗겨 냈다.

그러자 은은한 과일 향이 온 집안으로 퍼져 나갔다.

“응?”

갑자기 퍼지는 향기로운 과일 내음에 보일이 고개를 들어 항아리를 쳐다보았다.

카일은 살며시 웃으며 가지고 온 작은 그릇을 항아리에 넣었다. 이윽고 항아리에서 그릇이 꺼내졌다. 그 안엔 탁하면서도 깨끗한 붉은빛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카일이 보일에게 잔을 건넸다.

“응? 과일 향과 함께 은은한 알콜 향이 풍기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술인 것 같은데?”

“네! 곡물을 넣어둔 창고바닥에 오래된 수수가 쌓여 있더군요. 버리기는 아까워서 술을 만들어 봤어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은 집에서 만들기 어려웠다. 간혹 집에서 술을 담는 사람들도 있지만, 맛과 질이 대형 주조장에서 만드는 술 보다 떨어졌다. 술을 발효시킬 때 필수적으로 쓰이는 오크통이 비싸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샤론 마을에서도 술을 담그는 집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곡물로 만든 술이 아닌 산에서 따온 과실과 약초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었다.

때문에 특별한 날이나 추수가 끝난 축제가 있는 날이면 상단을 통해 구입한 독한 브랜디에 물을 희석해 마시거나 집안에서 담근 과실이나 약초 술을 섞어 먹었다.

“음… 이게 수수로 만든 술이란 말이냐?”

보일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술에서 나는 은은한 과일 향기는 분명 제대로 발효된 술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댄 보일은 한 모금 술을 머금었다. 입안으로 흘러 들어간 술은 아주 조금이었다.

비록 과일 향이 은은하게 풍기긴 해도 향만 좋을 뿐, 맛이 엉망인 술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들이 직접 만든 술을 직접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안에 조심스럽게 머금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혀에 닿자마자 퍼지는 향긋한 과일 향과 더불어 달면서도 싸한 맛이 난생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급술이란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캬~. …이건!”

보일은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과일 향이 코끝과 목 안쪽을 휘돌다 온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청난 풍미였다.

“이걸 정말 직접 만들었단 말이냐?”

“그럼요. 제가 아니면 누가 만들겠어요. 오늘은 고민을 접어두고 술이나 한잔하시라고 가지고 나왔어요.”

“하하. 너에게 이런 재주까지 있는 줄 몰랐구나. 그래 좋다! 오늘은 근심을 잊고 술이나 한번 마셔 보자. 이리 와서 너도 한 잔 하거라.”

이 술은 소망 도예의 단골이었던 전통 가양주를 만드는 장인 덕분에 알게 된 비법으로, 소망원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매년 전통주를 담그다 보니 카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원래 수수술은 빚은 다음 증류해서 마시는 술이지만, 만든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두 번의 덧술 후 청주만 걸러 음식을 보관하는 바위틈 동굴 안에 보관해둔 것이었다.

특별한 점은 만들 때부터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물의 양을 적게 잡아 도수를 높였다는 부분이었다.

“아버지, 저 이제 고작 14살인데요?”

“녀석! 아비가 주는 술은 괜찮다. 너도 2년만 더 있으면 자경단에 들어갈 나이다. 술 정도는 배워 둬야지. 다른 아이들은 훈련하면서 한두 잔씩 몰래 마시고 있다.”

“알겠어요. 그럼 한 잔만….”

카일이 두 손으로 잔을 내밀자 보일이 웃으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다.

카일과 보일은 그날 저녁 늦게까지 항아리 안의 술을 비웠다.

정확히 하자면 비운 건 보일이었다. 카일이 고작 두 잔을 마시는 동안 보일이 나머지 술을 죄 마셔버리고 말았으니까.

작은 단지에 들어있었지만 사실 양으로 따지면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래 보관하기 위해 물도 적게 부어 도수도 높을 텐데, 전부 마시고 멀쩡하게 제 발로 방에 들어가는 보일을 보면서 카일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원장 아버지는 세잔이면 그 자리에서 뻗었을 정도로 술이 약했는데….”

씁쓸한 얼굴의 카일이 다 먹은 술잔과 항아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오래전 원장 아버지와 술을 빚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록 술은 약했지만, 술을 좋아해서 수수술만이 아니라 찹쌀로 만든 황주까지 직접 빚어 먹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러고 보니 소망원에서 배운 것들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되는 구나….”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도, 만날 수도 없지만 소망원에서의 생활은 카일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소망원의 원장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주도 좋고 성격이 좋아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제법 이름이 있는 도예가, 건축가, 화가, 요리사, 한의사 등이었다. 이들은 마치 재능을 기부하듯 집을 고쳐주거나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주곤 했다. 어떤 때에는 소망원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고 도자기에 사용할 그림이나 도안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들에게 배웠던 지식은 여전히 카일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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