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망치의 깨달음
“순수 미스랄로 만든 무기라…. 하하하! 네 말대로 미스랄만 이용해 무기를 만든다면, 더없이 강력한 무구가 탄생하긴 하겠구나. 하지만 엄청나게 비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일, 문제 하나 내보마. 이 합금에 과연 미스랄이 얼마나 들어갔을 것 같으냐?”
타론이 손에 들려 있는 붉은 철괴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래도 절반은 넘지 않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이 합금괴에 들어간 미스랄의 양은, 고작해야 전체 무게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적은 양이 들어간단 말인가요?”
“그렇다. 그만큼 미스랄은 귀한 금속이다. 더불어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두 배는 비싼 금속이다. 적은 양만으로도 높은 강도를 낼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물론 미스랄과 철만을 합금시켜 강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철괴 만큼의 강도를 만들려면, 백 분의 십에 달하는 미스랄이 필요하다.”
타론의 목소리에선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만큼 그가 가진 합금법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곳의 영주인 다핸 남작 역시 타론이 다른 영지로 떠날 것을 우려해,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처음엔 아예 영주 성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타론이 거절했다. 신분 사회인 이 세계에서, 평민에 불과한 타론이 영주의 명을 거역했는데 무사할 수 있던 이유도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합금의 비전 덕분이었다.
작은 영지에 불과한 다핸 남작으로서는 만약 타론이 힘 있는 타 영지로 이전을 할 경우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타론이 가지고 있는 비전만으로도 그들은 기사 급의 전력을 파견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대장간에서 만든 철괴들은….”
“대부분 합금할 때, 혹은 농기구를 만들 때 사용된다. 순수한 철제 농기구는 강도가 강한 대신 잘 부러지기 때문에, 수리 의뢰가 잦고 종종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니 미리미리 철괴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순수 철제품은 병장기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영지민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곳에서 철재 갑옷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제련 기술이 뒤떨어진 주철로 만든 철재 갑옷은 너무 무거웠다. 그걸 입느니 차라리 질기고 가벼운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레더 아머를 걸치는 게 나았다.
물론 신체의 중요한 급소 부위는 미스랄을 섞은 합금강으로 만들어낸 호심경으로 보호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강철 검을 만들어낸다면?’
타론의 말을 듣던 카일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타론이 합금강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긴 했지만, 강철의 강도가 합금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일은 강철을 만드는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해!’
카일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되기 전 최일로 살 때, 그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며 철에 대해 제법 많은 걸 배웠다. 처음부터 타론에게 배우려던 것은 철광석이나 사철에서 철을 뽑아 철로 제련하는 방법과 기초적인 대장간 기술이 필요할 뿐이었다.
처음 강철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강철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카일은 대장간의 일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배워나갔다.
땅- 땅- 땅-
처음 서툴던 망치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확해지고 균일해져 나갔다. 강철을 스스로 만들어보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생기자 대장간의 일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찌나 열심이었는지 가끔 타론이 다가와 걱정스레 당부하곤 했다.
“쉬엄쉬엄하거라. 열심히도 좋지만, 너무 무리해선 안 된다.”
대단한 열의에 감명이라도 했는지, 타론은 자신의 합금기술을 제외한 대장장이 기술을 카일에게 최대한 많이 알려주려 했다.
* * *
카일이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농기구를 만들면서 카일은 어느 정도 망치질에 익숙해졌다. 능숙해진 모양새를 눈여겨보던 타론은 카일에게 본격적으로 검 제작법을 전수하겠다 마음먹었다.
합금법을 제외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자, 오늘부터 검 제작법을 알려주마. 합금법을 빼면 무구 제작은 대장장이 기술 중 가장 고급기술이지. 무기, 그중에서도 검을 만드는 방법은 일반 대장장이들도 배우기 어려운 기술이다.”
타론이 대장간 안쪽에서 붉은빛의 금속을 가지고 나왔다. 바로 2년 전에 보았던 합금강이었다.
타론은 이 합금을 주괴나 무구로 만들어 상인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싸고 질이 좋아 제법 잘 팔려나갔다.
“합금법을 모르더라도 무기, 특히 검을 만드는 기술만 온전히 가지고 있어도 유능한 대장장이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집중해 배우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타론은 붉은 합금괴를 화로 위에 올린 뒤, 잘라놓은 숯을 화로에 한가득 집어넣었다. 그리고 힘차게 풀무질하기 시작했다.
타론이 풀무질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대장간과 달랐다. 커다란 가죽 부대 위에 놓인 두 개의 나무판을 번갈아 밟아, 많은 공기가 화로로 들어가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화로의 온도를 빠르게 높이기 위한 방식이었다.
“카일 준비해라. 정확하게 안쪽에서 끝으로 가면서 모형을 잡을 거야.”
타론이 붉게 달아오른 합금 주괴를 모루에 올려놓자, 카일이 망치를 들어 힘차게 내려쳤다.
따앙-! 따앙-!
망치가 한 번씩 내리쳐질 때마다 합금 주괴가 점점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휘둘러지는 망치를 보며 타론은 속으로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망치질을 할 때 달궈진 합금 주괴를 정확하게 때리며, 강약을 조절하는 기술은 상당히 어려운 축에 속했다.
무작정 힘만 주고 망치질을 한다면 주괴를 제대로 때릴 수 없어 모양을 망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힘을 빼고 망치질을 하면 주괴가 금방 식어버려 모양을 제대로 만들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카일의 망치질은 집게 바로 앞을 정확하게 때릴 정도로 정확하고, 한 번의 망치질로 주괴를 원하는 두께로 만들 정도로 강약의 조절도 확실했다.
2년 전 어리숙한 망치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숙련된 대장장이의 망치질에 가까웠다.
‘대단하구나. 이제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이거늘….’
숙련된 대장장이라도 카일과 같은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놀란 얼굴의 타론이 카일을 바라봤지만, 카일은 전혀 타론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망치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부적인 힘을 가진 카일은 망치질을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대장장이 기술을 배워야 하니 망치를 잡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망치질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망치질은 단순히 힘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점을 향해 힘을 집중해서 정확히 때릴 수 있어야 했고, 강력한 힘으로 합금을 때렸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탄력도 극복해야만 했다.
대장간 일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엔 아무 생각 없이 힘껏 망치를 내려쳤다가 한순간 망치를 놓칠 뻔한 적도 있었다.
‘설마 망치질을 하면서 태극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줄이야!’
2년 동안 망치질을 하면서 카일은 그저 마나 연공법으로만 단순하게 생각했던, 태극권의 유능제강(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을 일부나마 터득할 수 있었다.
주괴를 두드릴 때마다 생기는 강력한 반탄력을 부드러움으로 해소하는 것을 넘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땅- 땅- 땅-
망치를 내려치며 생기는 반탄력을 이용해 망치를 들어 올리고 내려치는 동작이 마치 물결치듯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훌륭하구나!”
땀으로 흠뻑 젖은 카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타론이 말했다. 난생처음 보는 이상적인 망치질에 진심이 담긴 감탄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던 것이다.
* * *
캉-
격렬한 검격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어둑한 땅거미가 점차 바닥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캉- 캉- 카앙-
“하하하, 조금 더 힘을 내어 보거라!”
큰소리로 웃으며 보일은 카일이 내려친 검격을 걷어냈다.
‘으으 젠장. 완전 괴물 같은 힘이잖아!’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힘만을 이용한 대련이지만 보일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카일이 온 힘을 다해 내려친 검격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걷어내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대장간에서 망치를 내려치며 힘을 분산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보일의 강검에서 오는 반탄력을 해소하기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꼭 힘을 낼 필요는 없죠.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카일은 빠르게 검술을 바꾸었다. 힘을 이용한 중검을 포기하고 스피드를 앞세운 속검으로 검법을 바꾼 것이다.
창- 창- 창-
순식간에 보일을 향해 십여 번의 검격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녀석, 대단하구나! 나의 강격을 열 번이나 받았으면서 물러나긴커녕 속검으로 검술을 바꾸다니….’
많이 성장한 카일의 검술에 보일은 크게 감탄했다. 아무리 뛰어난 용병이라도 평생 한 가지 속성의 검술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검술의 속성을 바꿔 펼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중검의 성격이 강한 24 검식을 빠른 속검으로 바꿔 능숙하게 펼치고 있었다.
창- 차앙-
“하하. 이 아비가 고작 그 정도 속도에 당황할 것 같으냐!”
빠르게 검격을 날리고 뒤로 물러나는 카일의 뒤를 바짝 쫓으며 보일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빠른 검술이라도 피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검을 날리면, 결국 맞받아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카강-
그의 예상이 맞았다. 카일은 보일이 절묘하게 날린 검격을 피하지 못하고 맞받아쳤다.
“헉~.”
그때 카일이 보일의 검격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러더니 오히려 검을 놓아 버리곤 보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보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습적인 행동이었다.
“이 녀석!”
그러나 보일은 중급 엑스퍼트에 오른 검사였다. 처음에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왼손으로 품 안으로 달려들며 나무 단검을 찌르려 드는 카일의 팔목을 쳐냈다. 카일은 이미 이럴 것이라 짐작했다는 듯 침착하게 역으로 보일의 왼팔을 베어갔다.
그러나 이 행동으로 인해 기습의 묘미가 사라지고 오히려 검을 든 보일의 오른손등이 카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젠장~.”
카일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접근전에서 먼저 물러났다는 것은 사실상 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졌습니다.”
카일이 나무 단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녀석, 단 검술을 익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아니구나! 훌륭했다. 카일.”
“훌륭하긴요. 아버지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는데요.”
“녀석. 이 아비가 쉽게 보여도 엑스퍼트 중급의 검사다. 쉽게 당할 리가 없잖느냐.”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오늘 보일은 카일의 단검술에 꽤나 놀란 상태였다. 사각지대를 정확하게 파고드는 단검의 위력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보일처럼 경험이 많은 중급 엑스퍼트 검사가 아닌 초급 엑스퍼트 검사였다면, 아마 지금처럼 쉽게 막지 못했을 것이다.
“자, 이만 들어가자. 내일도 일찍 대장간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
허락은 내리긴 했지만, 대장간을 드나들던 카일을 은연중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보일은 생각을 고쳤다. 대장간을 다니면서도 검술을 등한시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