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철이 없는 세상
“타론 아저씨! 혹시 저도 대장장이 기술을 배울 수 있나요?”
“응? 대장간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네. 한번 배워보고 싶어요.”
“가르쳐 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 검술도 각자 비전이 있듯이 대장간도 합금기술이란 비전이 있단다. 이런 기술은 아저씨 아들에게만 전해 줄 수 있어.”
“전 그냥 철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싶은 거니까, 그냥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면 돼요.”
“그 정도라면…. 좋다! 보일 형님에게 허락을 받으면 가르쳐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아버지에게 허락을 맡을게요.”
“그래.”
그날 저녁, 카일은 보일에게 대장간 일을 배우고 싶단 운을 띄웠다. 보일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카일 다시 생각해 보거라. 대장간 기술의 핵심은 합금기술이다. 합금기술을 알지 못하면 무기를 만들 수 없단다. 기초적인 대장장이 기술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어.”
여타 용병 중에도 기초적인 대장장이 기술을 배워, 직접 자신의 무기를 만드는 자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리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기초적인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같은 재료로 평생 망치만 두들겨온 대장장이들보다 더 좋은 무기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녜요. 전 기초적인 대장장이 기술만 배우면 돼요. 그리고 무거운 망치를 사용하는 것이니 검술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카일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었다.
한 점을 향해 무거운 망치를 정확하게 내리치는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허리와 팔을 단련할 수 있고 더불어 힘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긴 할 터였다.
잠시 숙고하던 보일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나 힘들어지면 꼭 말해야 한다.”
“예! 아버지.”
다음 날 아침 부자는 사이좋게 타론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타론 안에 있나!”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자 뒷마당 쪽에서 타론이 나왔다.
“형님, 오셨어요?”
“그래. 카일이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겠다고 해서 왔다네.”
타론도 카일과 같이 온 보일을 보고 이미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카일에게도 이야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기술은 가르쳐줄 순 있어도 합금기술은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그건 걱정 말고 기본적인 기술만 가르쳐주게. 철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면 좋겠지만 망치를 사용해 일점을 향해 내려치는 기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니.”
“아,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쳐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마지막으로 보일은 카일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지켜보고 있던 타론이 카일에게 다가왔다.
“마침 잘 됐다. 대장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인 숯을 자르고 있었다. 같이 하겠느냐?”
“당연하죠! 많이 가르쳐 주세요.”
“하하. 그래 일단 마당으로 가자꾸나.”
카일과 타론이 뒷마당을 지나 작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숯이 가득 쌓여 있었다. 타론이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가져다주었다.
“자, 우선 이 가죽 앞치마를 입어라.”
품이 넉넉한 가죽앞치마는 카일의 몸을 가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카일이 앞치마를 두르자 타론이 작은 의자를 가져다가 자신의 옆에 놓았다.
“일단 앉아 보거라.”
카일이 자리에 앉자 타론이 대장간 안에서 가져온 30센티 길이의 투박한 칼을 내밀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면 된다.”
-타악 -타악
타론은 카일에게 건넨 것과 비슷한 칼을 들고는 숯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칼이 내리쳐질 때마다 균일한 크기로 잘린 숯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그런지 그의 손길은 상당히 능숙하고 빨랐다.
“잘 보거라. 그냥 아무렇게나 잘라내는 것같이 보일지 몰라도, 다 요령이 있단다.”
타론은 몇 번 시범을 보이며 숯을 잘라냈다. 카일 역시 그를 따라 손을 움직여 봤으나 숯은 쉽사리 잘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타론이 슬쩍 웃었다. 숯을 자르는 건 쉬워 보이지만, 잘 구운 숯은 금속음이 날 정도로 단단해서 요령이 없으면 잘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하!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단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일이지.”
어쩐지 무시하는 듯한 어조였다. 잠시 숯을 노려보던 카일이 힘껏 칼을 휘둘렀다.
타악-
칼이 내리쳐질 때마다 숯이 토막 나기 시작했다. 요령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힘으로 숯을 잘라낸 것이다.
어이가 없는지 옆에서 한동안 지켜보던 타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 그 무시무시한 힘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니. 역시 형님의 아들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면 쓰나. 자! 다시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거라. 이번에는 천천히 할 테니까.”
타론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숯 자르는 방법을 천천히 보여줬다. 무시하는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카일은 칼을 멈추고 타론이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살폈다. 원리는 칼과 손목, 그리고 팔목으로 이어지는 관절을 마치 지렛대처럼 이용하는 것에 있었다. 숯을 내려쳐 잘라내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사실 타론은 카일에게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은연중에 무시하는 듯한 어조가 튀어나왔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일이 무작정 힘을 이용해 숯을 자르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제대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요령 없이 숯을 힘으로만 자르면 숯이 깨어지듯이 부서지며 제대로 된 화력을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숯을 자를 때에는 손목과 팔목 그리고 팔의 반동을 이용해라. 그리고 숯을 이렇게 사선으로 잘라, 숯에 불이 닿는 면적을 넓게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야 화로의 온도를 제대로 높일 수 있단다. 이것이 대장장이 기술의 가장 기초적인 일이자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오늘은 일단 이것부터 익숙해 지 거라.”
“네. 타론 아저씨.”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카일은 이미 타론의 말투와 행동을 보며 그의 내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힘을 써 숯을 부수듯 잘라냈다. 과격한 방식이긴 했지만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대략 두 달이 흐르고 나서야, 타론은 본격적으로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카일은 대장간의 잡일을 도맡았다. 어른이 하기에도 힘든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일이 결코 단순한 마음에 장난 식으로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대장간 기술을 알려 주겠다 마음먹은 것이다.
* * *
땅-
붉게 달아오른 철괴를 내려치는 소리가 대장간 안을 울렸다.
“두들기는 타격점이 일정해야만 균일한 두께의 철을 만들 수가 있다. 집중해라!”
타론이 긴 자루가 달린 망치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는 카일을 보며 말했다. 카일이 내려치는 철괴는 순식간에 처음의 모양을 잃어 갔다.
“무조건 힘으로만 내리쳐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집중해 일점을 향해 정확하게 때려야 한다. 다시!”
땅-
또 한 번 강력한 소리가 대장간을 울렸다.
‘이 녀석…. 아직 서툴러 망치의 타점이 정확하지 않은데도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니. 대단하군!’
타론은 내심으로는 놀랐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조금 더 카일을 재촉했다. 힘으로 서투른 망치질의 단점을 보완했다곤 해도 아직 초보적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대장장이의 기술은 단순히 힘이 세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무조건 힘으로만 망치질을 하면 안 된다! 망치질은 무엇보다 정확도가 중요하다. 힘을 빼라. 지금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원하는 힘만큼 망치를 타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땅-
카일이 배우기 시작한 대장장이 기술은 정말 단순했다. 철괴를 두드리고 모형을 잡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단순한 작업일수록 숙련도와 정확도가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아직 카일에게 그만한 숙련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한껏 집중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카일을 바라보던 타론이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타론은 달구어진 철괴를 작은 손망치로 내려쳐 이리저리 모양을 잡다가, 다시 화로 안으로 철괴를 밀어 넣었다.
“대장장이의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건 바로 화로의 불꽃을 보고 불의 온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푸 쉬익 -푸 쉬익
타론의 빠르고 힘찬 풀무질에 붉은빛의 불꽃이 점차 푸른빛으로 변해 갔다.
“대장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해야만 한다. 그래야 불꽃의 색을 보고 정확한 온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이곳에서 화로의 불꽃을 살펴보거라.”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으나 사실 카일은 불꽃색만으로 온도를 파악하는 것에 익숙했다. 전생의 어린 시절, 전통방식 도자기 가마 앞에 앉아 밤늦도록 뜨거운 불길 속으로 소나무 장작을 집어넣으며 원장 아버지의 옆에서 불꽃의 색과 온도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차츰 대장간의 기술을 하나둘 배우면서 카일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강철이 없다는 말인가요?”
“강철이라니? 그런 철도 있었단 말이냐?”
타론이 망치를 두들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검과 같은 무기를 만들 때 철을 사용하지 않는 건가요?”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타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합금강을 말하는 것 같구나. 합금강은 너에게는 알려 줄 수가 없다. 각 대장간이나 공방에서 보유한 합금 법은 친족이라도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오직 대를 이어 대장간을 물려받을 후계자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다.”
타론이 단호히 말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거짓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강철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충격적인 사실에 카일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던 타론이 망치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붉은빛의 철괴를 들고 나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만든 합금강이다. 미스랄과 함께 특수한 금속을 섞어 만든 것이다. 평소에 이렇게 괴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가 상단에 팔거나 무구나 검을 만들 때 사용하고 있단다.”
“…그럼 제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은 모두 주철이라는 말씀이군요.”
“주철? 계속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철이면 철이지, 강철이니 주철이니. 철에도 무슨 종류가 있다는 말이냐?”
그 말에 카일은 어렵사리 인정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엔 강철이 존재하지 않으며, 철기의 수준은 아주 기초적인, 주철을 다루는 수준에 불과하단 소리였다.
강철을 제련하거나 열처리하는 기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이곳엔 합금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있었다.
“합금법은 땅의 일족인 드워프로부터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마법의 금속인 미스랄은 철과 합금을 하면 부러지지 않는 강력한 금속으로 변화하지. 만일 미스랄을 섞지 않고, 철로만 검을 만들면 쉽게 부러질 것이다.”
“아!”
그제야 카일은 이곳에 강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이 세계에 미스랄이라는 특수마법 금속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합금만으로도 쉽게 강철에 버금가는 강도의 합금강을 얻을 수 있기 있으니 철을 제련할 필요도, 기술이 발달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강철만큼 강도가 높은 합금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렵고 힘들게 강철을 제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철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스랄을 합금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부러지지 않고 질긴 검을 만들 수가 있지. 물론 철과 미스랄 이 두 가지 금속만 합금해서도 안 된다.”
“그럼 다른 금속도 섞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래. 물론 단순히 철과 미스랄 두 가지 금속만으로도 합금을 이룰 수 있긴 하다만 효율이 떨어지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특수 금속을 섞어야, 미스랄의 비율을 조금이라도 줄이면서도 강도가 높은 검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율이 바로 각 공방이나 대장간마다 가지고 있는 비전이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미스랄 만으로도 무기를 만들 수 있나요?”
가만히 카일을 바라보던 타론이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