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9화 (9/404)

09.세 가지 물건

‘뭐, 아예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니까.’

단전호흡을 하면 머리가 맑아졌던 건 사실이니 전혀 도움이 안 된 건 아니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언뜻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단전호흡이 아니라 태극권 그 자체라면 어떨까?

소망원에서 최일이 배운 것은 단전호흡만이 아니었다.

단전호흡은 원래 원장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태극권 사범이 태극권과 함께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나 수련법으로 단전호흡만 떠올렸던 그는 태극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극권을 수련하면서 건강을 위한 체조 정도로만 여겼을 뿐 무예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일의 말을 종합해 본다면 단전호흡보다는 태극권이 마나를 연공 하는데 오히려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본래 태극권은 내가수련법으로 유명했고 보일의 설명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소망원에서 사범에게 배웠던 태극권은 진가에서 내려오는 진식태극권 108식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소망원에 들려 아이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쳐주고 원장 아버지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당시 사범은 태극권을 정말 열심히 그리고 자세히 가르쳤다. 덕분에 어린아이 때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최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태극권을 상세히 배울 수 있었다.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남병도를 날려버린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소망원을 나온 뒤엔 따로 수련한 적은 없으나 십수 년을 익힌 동작과 호흡법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 * *

카일의 방은 박공지붕의 바로 아래에 형성된 공간을 막아 만든 다락방이었다.

실상 방이라고 부르기도 무색한 것이, 이곳에는 여러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의 생활이 아래층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동안은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잠만 자고 내려갔으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비밀리에 태극권을 수련할 장소가 필요한 상황이라, 다락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다락방 안에 이리저리 널려 있던 짐들이 하나둘 치워졌다. 정리정돈은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워낙 많은 짐이 널려 있었던 탓이다.

“치우고 보니 제법 넓은걸.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내심 만족한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밤중이었으나 태극권이 과연 마나 수련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어 카일은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휴~. 시작해보자.”

천천히 숨을 쉬며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카일은 예비 식부터 시작해 천천히 동작을 이어나갔다.

기억을 떠올려 동작과 호흡을 일치시키려 했지만, 막상 수련을 시작하자 무언가 어색해 집중할 수 없었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신체라 그런지 금세 집중력이 흩어졌다.

“천천히,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카일이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로 동작을 이어갔다. 기억 속 동작이 점차 익숙해지고 점차 호흡도 안정되었다. 네 번째로 연속해서 동작을 이어가자 카일의 주변으로 희미하게 아지랑이처럼 마나가 몰려들며 몸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나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마나의 양에 깜짝 놀란 카일이 수련을 멈추자, 주변으로 몰려들던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보일의 24식 검술과 비교해보면 적어도 10배 이상의 마나가 체내에 쌓였다. 흡수된 마나는 몸을 돌아다니며 108곳을 잇는 새로운 길을 희미하게 만들어냈다.

이것으로 카일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전호흡을 통해 단전에 기운을 쌓는다고 생각했는데 전제 자체가 틀렸다. 마나의 기운은 각 동작에 의해 자극받은 일종의 혈 자리에 쌓이며, 단전 역시 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혈 자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난 지금까지 단전이라는 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다만 수많은 혈 자리 중, 몸의 중앙에 위치한 10곳이 다른 혈보다 많은 마나를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단전도 그 10곳 중 하나였다.

깨달음에 신이 난 카일은 다섯 번을 연속해서 태극권을 펼쳤다. 그러나 신력이라 할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는 카일로서도 다섯 번 이상은 태극권을 펼칠 수가 없었다.

태극권으로 인해 주변으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몰려든 마나로 인해 강한 압력이 생겨났다. 평범한 중력의 10배 이상은 될법한 압력을 버티며 태극권을 펼지는 건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했다.

한계까지 버티며 태극권을 연속으로 펼친 카일은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버린 뒤, 결국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다.

* * *

“이 녀석, 한동안 열심히 수련하는 것 같더니…. 내려오기만 해봐라, 단단히 혼을 내야지!”

보일은 검술을 수련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새벽 달리기도 빠지고 아침을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 카일을 엄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카일이 혹 다시 검술에 흥미를 잃고 나태해질까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아래로 내려온 카일의 모습을 보니 차마 혼을 낼 엄두가 안 났다.

카일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은 실핏줄이 터졌는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보일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일, 괜찮으냐? 밤새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단호하게 혼을 내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피로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카일이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검술을 생각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뿐이에요.”

카일의 말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처음 검술을 익히고 마나를 느꼈을 때, 흥분한 마음으로 밤새 검술을 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카일은 마나 친화력이 뛰어나기까지 하니, 더더욱 신이나 늦은 저녁까지 무리하게 검술을 수련한 것이라 생각했다.

“허어. 검술을 열심히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의 몸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이란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만큼 언제나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해.”

“명심하겠어요. 아버지.”

“그래.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몸이 나을 때까지 충분히 쉬어라. 수련은 내일부터 다시 하자꾸나.”

보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자고 일어났더니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막 마나를 느꼈는데 쉬고 싶지는 않아요.”

고집스러운 카일의 말에 보일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아침 수련 말고 다른 것을 알려주마. 이건 원래 검술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알려주려 했지만, 오늘 특별히 알려주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보일은 나무함을 하나 들고 나왔다. 거구인 보일이 들고 있어 작아 보이나 결코 조그마한 크기는 아니었다. 보일이 나무함을 열자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나왔다.

“이것들은 아비가 용병 생활을 하면서 쓰던 것들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고 있지.”

보일은 함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았다. 제법 오래된 물건인 것 같았지만, 그동안 꾸준히 관리해 왔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다. 보일이 처음 꺼낸 물건은 둥글게 말려있는 벨트 모양의 물건이었다.

“이것은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이다. 들은 바로는 신화시대에 존재했다는 드워프의 물건이라고 하더구나.”

대지의 일족인 드워프는 키가 작은 난쟁이들로, 땅속에서 광물을 찾아 무언가를 만드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종족이었다.

“드워프라면 신화시대에 살았다고 알려진 장인족 말인가요?”

“그래. 바로 그 드워프가 만든 것이란다.”

보일이 상자에서 꺼낸 둥근 물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은 드워프가 엘프 때문에 만들어 낸 물건이라고 하더구나.”

엘프와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는 카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 카렌이 가지고 있던 몇 권의 두꺼운 책들 대부분이 신화시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었다.

“엘프와 드워프는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엘프 때문에 이걸 만들었다는 말인가요?”

엘프와 드워프는 종족의 특성상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고 알려져 있었다. 숲을 가꾸고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숲의 일족인 엘프에게 있어 광물을 찾아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헤치며 숲을 파괴하는 드워프를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드워프 역시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엘프와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

“하하! 풍문에 따르면 누군가 드워프에게 엘프의 활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다. 원수 같은 엘프의 활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단 말을 성격이 불같은 드워프가 참았을 리가 없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것이란다.”

보일은 벨트처럼 말려있는 둥근 물체의 한쪽에 감겨있는 줄을 풀고 한쪽 끝을 잡고 말려있는 반대쪽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은 근력이 필요한지 보일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팔뚝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활의 모양이 서서히 잡혀가기 시작했다. 마치 조선 시대의 각궁과 유사해 보였다. 그러나 각궁처럼 여러 가지가 복합 재료를 섞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질 자체가 검은 특수금속인 것 같았다. 확실한 건 보일의 힘으로도 시위를 거는 게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강궁이라는 점이었다.

“이건 우연한 기회에 던전을 발굴하면서 얻은 것이다. 뭐 우리끼리는 던전이라고 불렀지만, 그냥 어느 누군가의 무덤이었지. 그 안에 있던 건 몇 가지 보석과 녹슨 무기가 전부였다. 온전히 형태가 남아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나중에 몇몇 마법사에게 찾아갔더니 이것이 드워프가 만든 활이라는 걸 말해주더구나. 그때 얽힌 유래도 듣게 되었단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보일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활이라는 걸 알았지만 동료 중 누구도 이 활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무기상에게 팔려고도 했지만 아무도 이런 활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강궁은 잘만 사용한다면 대단한 위력을 낼 수 있지 않나요?”

“그래. 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생각해 보거라. 쓸 수도 없는 활을 누가 사겠느냐! 기사들은 활을 비겁한 무기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용병들도 간신히 활시위만 걸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화살을 날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더구나. 그래서 결국 내가 가지기로 했단다. 그리고 이 활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

보일은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비록 길이가 1미터 정도의 활이지만 보일이 활을 당기자 활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분명 마나를 이용하지 않고 순수한 힘만으로 활을 당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순수한 힘만으로 쏜다면 연속으로 대략 10발 정도 쏠 수 있다. 여기에 마나의 힘까지 더하면 대략 30발 정도까지 쏠 수가 있고. 넌 아직 이 정도 활을 쏘기에는 무리인 만큼 자경대에서 장궁을 하나 가져다주마. 일단 장궁으로 활을 연습해 보렴. 네가 어느 정도 크면 이 활을 물려주마.”

보일은 활을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는 카일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활의 시위를 풀어 원래의 둥근 모양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무함을 뒤적였다. 이번에 꺼내진 것은 양피지 두 장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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