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수련
카일이 제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십여 일 뒤였다.
원래는 깨어나고 3~4일이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보일이 누워있기를 강요했기에 외부 출입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
밖으로 나온 카일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카일은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직은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몸이 유연했다. 덕분에 뻣뻣한 성인이라면 해내기 어려운 동작들이 손쉽게 이어졌다.
“그럼 가볼까?”
몸을 이리저리 풀던 카일은 천천히 목책 안쪽을 따라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는 검도를 배우면서 체력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었다. 특전부사관이 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습관처럼 아침나절마다 2킬로미터씩 구보를 했다. 이제 달리기는 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지금 자신은 최일이 아닌 카일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카일이 달리고 있는 목책 안쪽의 거리는 대략 10킬로미터였다. 이전 최일의 몸으로는 감히 뛸 엄두도 내지 못할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카일의 몸으로는 가뿐하게 10킬로미터를 달리고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작 10살짜리 아이의 체력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날 카일은 두 바퀴를 더 돌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 * *
카일이 집에 들어선 건 보일이 식사 준비를 완전히 마쳤을 무렵이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척 봐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어림잡아 4~5인분으로 보였으나 카일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카일과 보일은 항상 이 정도의 양을 먹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됐다. 한동안 포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묵묵히 음식을 씹어 삼키던 보일이 카일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냐? 아침부터 달리기라니?”
원래 카일은 몸을 단련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보일을 닮아 신력이라 할 만큼 대단한 신체를 가진 카일은 몸을 단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어찌어찌 기초검술을 배우고 있긴 하나, 보일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지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던 아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아침 달리기에 나섰으니, 보일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검술은 자신을 중급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아직 많이 부족했다. 발전을 위해서는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강화해야 했다. 때문에 보일은 카일이 가문의 검술을 온전히 물려받아 더욱더 발전시켜 주길 바라고 있었다.
신력에 가까운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지만 오러 엑스퍼트의 용병이나 기사들에게는 그저 힘센 오우거나 마찬가지였다.
보일 역시 젊은 시절 힘만 믿고 우연히 만난 왜소한 용병에게 시비를 걸다 죽을 만큼 맞고서야 검술과 마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검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저도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았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검술 배워 보려고 해요. 가르쳐 주실 거죠?”
카일의 말에 보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언제나 타고난 힘만 믿고 검술을 등한시하던 아들이 스스로 검술을 배우겠다고 말한 것이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하하하! 물론 가르쳐 주고말고. 당연히 가문의 검술은 너에게 이어져야지! 기초적인 부분은 예전에 배웠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검술을 전수해주마.”
정말 기분이 좋았는지 보일은 식사를 마치고 문밖을 나설 때까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가?”
환한 보일의 미소에 카일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카일이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고작 10살 아이의 기억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만 살펴보아도 이곳이 철저한 신분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분이 낮으면 철저하게 짓밟히는 곳이 바로 이 세계였다.
“더 이상 나약하게 살지 않겠어.”
카일은 더 이상 무시 받으며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분을 뛰어넘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곳 샤론 마을만 해도 보일이라는 B급 용병으로 인해, 가장 낙후된 마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살고 싶어 하는 마을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작 가문에서도 보일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 사실들을 보면 이 세계에서 무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카일은 우선 무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체력이나 힘은 이미 충분했다. 더군다나 카일에게는 이전 세상에서 배운 검술과 각종 무술에 관한 지식이 있었다. 다만 아직 머릿속에만 있을 뿐 새롭게 적응한 몸으로 구현하기는 힘들었다. 일단은 보일의 검술을 차근차근 익히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은 기초부터….”
뒷마당에서 낡은 목검을 들고나온 카일은 기본적인 기초검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보일이 카일을 가르치면서 사용했던 목검이라 그런지 익숙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합!”
딱- 딱-
목검을 들자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알아서 익숙한 검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보일에게 억지로나마 검술을 배운 것이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헉, 헉.”
무아지경에 빠져 목검을 내리치던 카일은 숨을 몰아쉬며 마당에 주저앉았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탓에 카일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몸이구나.”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카일이 말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지치다니. 카일의 신체가 무예를 익히기에 더없이 훌륭하단 게 새삼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단순히 힘이 강하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마법!”
이곳은 마법이 현실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신체가 뛰어나고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마법에는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러.”
또한 이곳은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오러, 즉 검기 또한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법과 오러의 차이점은 대기 중의 마나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나뉘었다. 카일도 이 점은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차이가 있는지는 몰랐다. 막연한 지식이었다.
다만, 카일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바로 보일이 이미 소드 엑스퍼트 중급으로 오러를 검에 형성할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보일에게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카일 역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흠… 헌데 정말 가능할까?”
어느 정도 땀이 식자 카일은 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반개하고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도록 편안하게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단전호흡!’
카일이 되었을 무렵부터 그는 단전호흡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혹 이곳에서 말하는 마나가 전생에서 말하던 기와 같다면 단전에 내공, 즉 마나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래전 건강을 위해 태극권을 배우면서 같이 배운 것이 바로 단전호흡이었고 건강을 위해 오랫동안 해오던 것이라 익숙했다.
아직 아무런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단전호흡 몇 번 했다고 바로 마나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푸후~.”
카일이 길게 숨을 내뿜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단전호흡을 해서인지 아니면 이곳의 공기가 맑아서인지, 머리가 개운하고 맑아진 것만 같았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호흡을 마친 카일은 목검 대신 짧은 단검을 들었다. 군에서 배운 동작들을 하나하나 연습해 보기 위함이었다. 보일이 자경대에 나가 있는 동안에는 전생에 배운 검술과 군에서 배운 무술로 신체를 단련해 나갈 심산이었다.
특전부사관 훈련을 받을 당시에도 왜소한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크라브 마가 같은 무술을 누구보다 열심히 익혔던 터라, 훈련방식이나 동작들이 명확하게 기억났다. 그러나 신체가 바뀐 만큼 새로운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힐 필요가 있었다.
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 최일 이던 시절 그가 배운 건 예도 즉, 조선세법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조선세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최일을 가르친 사범은 원래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그는 백제 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류 검술인 거합도의 유파 중 하나인 북진 영신류 전승자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사범은 예도를 배운 뒤, 40대에 이르러 도장을 열고 조선 세법을 가르쳤다.
오직 남명도를 꺾고 싶어 죽도를 휘둘렀던 처음과 달리, 남혜원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사범으로부터 군에 입대하기 전 6개월 동안 예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군 입대 전 그저 형식을 배우고 몸에 익혔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예도를 익혀볼 생각이었다.
“휴~. 빠르게 칼을 뽑아 적을 베어낸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 카일은 검을 뽑아 공간을 빠르게 베어냈다.
쉬익-
거친 바람 소리를 내며 공간이 갈라졌다. 허공을 베어낸 칼은 언제 그랬냐는 양 제자리로 돌아왔다.
예도와 거합도는 같은 뜻으로 둘 다 빠르게 적을 베는 것에 중점을 둔 검술이었다. 때문에 검술 자체에서도 발 도술이 무척 중요했다.
* * *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전호흡을 하고 마을 두 바퀴를 달리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보일이 카일을 마당으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몸을 만든 것 같으니 오늘부터 검술을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마.”
보일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심 한 달이 다 되도록 검술에 대한 말이 없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가 익힌 검술은 총 24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형적인 실전형 검술이지.”
“24개의 검식이 이어진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일단 한번 보여 줄 테니 잘 보거라.”
보일이 마당 한가운데로 나와 천천히 검을 뽑아 하단 세를 취했다.
징-
보일이 검을 뽑자 스산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당에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는 듯했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보일은 본격적인 검술을 펼쳤다. 천천히 펼쳐지던 검식은 점차 속도를 더해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탄생한 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중간 중간 검식과 검식이 끊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식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몇 가지 검식에 여러 다른 검식을 억지로 첨가해 만든 느낌이 강했다.
“검술을 익힐 땐 정확한 동작과 함께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나가 몸속에 쌓이게 되지. 보기에는 어설픈 것 같아도 이 검식을 만들기 위해 나의 조부, 그러니까 너에게는 증조부님이 되시는 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단다.”
증조부부터 시작했다면 어림잡아도 백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소리였다. 24가지의 검식을 만들기까지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에 카일은 무척 놀랐다. 그리고 보일이 전수하려는 검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카일의 표정이 절로 엄숙해졌다. 보일 역시 카일이 진지한 낯빛을 하고 자신의 말을 경청하자 보일이 기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