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아버지
저벅- 저벅-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기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최일은 머뭇거리다가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보인 건 은은한 빛에 휩싸인 금발에 큰 눈, 성인 못지않은 다부진 체격을 지닌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에 선 이 사람이 10살의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최일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소년에게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양 친숙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난 카일이라고 해.”
대뜸 자신의 이름을 말한 소년이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익숙한 따뜻함과 슬픔이 혼재된 기묘한 미소였다.
“난 최일이야.”
홀린 듯이 소년을 올려다보던 최일은 손을 내밀며 카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손을 마주 잡는 그 순간, 비록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서로의 뜻은 물론이고 감정과 생각까지 명확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카일은 최일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를 잘 부탁해!”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에 맞추어 최일의 몸에서도 강한 빛이 방출되더니 카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집어삼키며 점점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빛이 사라졌을 때는 오직 카일의 모습을 한 최일 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최일은 긴 꿈을 꾸었다.
그 속에서 그는 카일이라는 어린 소년이 태어나고 자라오는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조리 알 수 있었다. 마치 카일이란 아이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인가?”
어두운 밤. 힘겹게 눈을 뜬 최일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카일의 기억에서 보았던 것들이었다. 통나무를 켜켜이 쌓은 투박한 벽면과 돌과 흙으로 쌓은 벽난로, 그리고 그 속에서 맹렬한 불길을 뿜어내며 피어오르는 모닥불까지.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최일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꾸었던 꿈이 그저 몽환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 속, 자신이 카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최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이런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징표처럼 느껴져, 되려 달갑기까지 했다.
“내가 정말 카일이 된 건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최일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보고, 고개를 숙여 발가락까지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소년의 몸이 확실해 보였다. 움직임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최일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감탄했다. 느껴지는 힘이 고작 10살 소년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최일은 카일의 아버지인 보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보일은 대략 2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키에 100킬로그램은 나갈 정도의 거구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성인 여자 허리 정도 굵기의 나무를 순수한 힘만으로 뽑을 정도로 대단한 역사였다.
그런 보일의 아들이 바로 카일이었다. 그의 핏줄을 물려받았으니, 나이에 맞지 않는 이 엄청난 힘과 체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만했다.
“아버지….”
최일은 가만히 아버지라는 단어를 발음해보았다. 그러자 살짝 가슴에 떨려 왔다.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없지만, 이제 자신에게도 정말 친부모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최일은 너무 많은 생각이 이어지자 다시 찾아온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기절해버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뜬 때는 날이 밝아진 이른 아침이었다.
* * *
“카일!”
크고 거친 목소리가 카일의 귓가를 울렸다. 잠시 얼굴을 찡그린 카일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치 신화시대에 살았다고 들었던 거대한 덩치의 거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카일의 기억 속 항상 카일을 지켜보던 얼굴, 거인의 정체는 바로 카일의 아버지인 보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최일은 보일의 위압감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길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한 최일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입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란 단어가 흘러나오자 최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리라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 여기 있다. 네 아버지 여기 있어!”
보일은 급히 달려와 카일의 손을 힘껏 잡았다.
“크윽~! 아버…지. 소…, 손이….”
급한 마음에 힘 조절을 못 한 것인지 손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져 왔다.
“헉!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 보일이 카일의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겨우 깨어난 아들이 자신 때문에 다칠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부러질 뻔한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카일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보일이 다시 다가와 카일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방금과 같은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만약 널 잃었다면 내 어찌 살아갈 수 있었겠느냐.”
어느새 보일의 눈엔 물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더는 최일이 아닌 카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정말 가족, 아버지가 생겼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걱정 마세요! 전 아버지를 닮아서 이렇게 튼튼한걸요.”
카일이 과장된 포즈를 취하며 씩씩하게 말했다.
“하하! 그래, 그래. 암! 넌 누가 뭐래도 날 닮은 내 아들이지.”
보일의 얼굴 위로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 * *
카일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제야 샤론 마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심한 것은 단순히 카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오지 마을에서 어린 소년이나 소녀가 죽어가는 일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한 드문 일도 아니었다.
다만 카일이 잘못됐다면 보일이 마을을 떠나 남작 성으로 들어가 기사가 되거나, 아예 영지를 떠나버렸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10여 년간 보일 덕분에 자경대의 실력이 몰라보게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반 자경단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 뿐이지, 그를 대신하여 마을을 지킬 수 있단 의미는 아니었다.
보일은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탁월한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한 지휘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진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자경단원들은 허둥지둥할 게 분명했다.
“정말 다행이다! 카일이 깨어난 건 분명 대지의 여신 레아의 보살핌이 있었음이야.”
마을의 촌장인 보메스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카일은 온전히 나은 것입니까? 머리를 심하게 다쳤던 것 같은데.”
“허허. 분명 보일을 알아보았다고 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다행입니다. 카일이 잘못되었다면 보일 형님은 마을을 떠났을 테니까요.”
대장장이 타론의 말에 촌장인 보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인 카렌에 이어 카일까지 잘못되었다면 보일이 마을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아마 괴로워서라도 떠났을 것이다.
“이제 카일이 깨어났으니 지난번 거둬들인 은화는 모두 돌려주도록 하겠네.”
쩔그렁-
보메스가 탁자 위에 은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카일이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자, 이대로 보일이 떠날까 두려웠던 마을 사람들은 은자를 모았었다. 대지의 여신 레아의 신전에서 상급 포션을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상급 포션의 가격은 무려 금화 10개!
일반적인 중급마을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러나 이곳 샤론 마을은 달랐다.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상당한 지출을 감수해야 할 금액이긴 했다. 바꿔 말하자면 부담스럽긴 해도 감수할 수 있는 금액이란 소리였다. 그만큼 샤론 마을 자체에서 벌어들이는 은화는 상당했다.
“아직은 촌장님께서 가지고 계시지요. 언제 카일의 상태가 나빠질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대장장이 타론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일 대장 덕분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은화를 아까워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마을을 습격한 오크 상당수를 잡았으니, 마을 사람들도 걷어간 은자에 대한 부담은 줄었을 겁니다.”
가죽장인 베아트가 맞장구쳤다. 촌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샤론 마을의 주 수입원은 바로 몬스터의 사냥으로 생겨난 가죽과 부산물들이었다. 오크 랜드와 인접한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잦은 침략을 받지만 이러한 침략이 마을로서는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을을 공격한 오크나 몬스터를 잘만 막아내면 상당한 몬스터 부산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가공하여 상단에 판돈으로 마을은 제법 풍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겠네. 그대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일단 은자는 내가 보관하고 있겠네. 만약 카일이 다시 쓰러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 돈으로 상급 포션을 구매하도록 하지.”
“이럴 것이 아니라 하급 포션이라도 마을에서 미리 구해 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야 자경대나 마을 사람 개개인이 구해 쓰고 있지만, 이번 일을 겪어보니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크게 다쳤을 때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자경 대장인 보일이 자비로 많은 부분을 보충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보일 대장에게만 맡겨 둘 순 없는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동안 보일 대장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선 보일 대장이 마을을 떠난다고 해도 말릴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을 겪어보니, 새삼 보일 대장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일 대장 같은 실력자가 이런 오지 마을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지요. 중급 엑스퍼트 실력자인데 누가 이런 오지 마을에 남으려 하겠습니까?”
이번 대규모의 오크 침공과 이로 인한 카일이 부상을 겪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보일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을이 이만큼 커지고 부유해질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보일이 앞장서서 마을을 지켜 준 덕분이란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그가 떠난다면 오크나 몬스터가 수시로 달려드는 마을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자경단원들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자경단원들로서는 위험한 이곳 샤론 마을에 남기보다는 조금 더 안전한 후방마을로 이전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그들은 보일의 훈련을 받기까지 했으니, 다른 마을에서도 환영을 받을 만큼 정예병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작가의 병사가 되려는 자도 있을 터였다. 많은 은화를 벌어들일 수는 없어도 안전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