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세 가닥 연기
“으으윽~.”
커다란 통나무를 단단하게 엮어 만든 망루 위에 서 있던 사내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여전히 졸음이 가시질 않는지 몸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좁은 망루에서 반나절 이상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보니 몸 이곳저곳이 쑤셔 올 만도 했다.
“으…. 조금만 참으면 교대시간이다.”
사내는 다시 눈을 비비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의 역할은 마을로 다가오는 몬스터, 특히 오크들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목책 위에서 파수를 서는 것이었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우리 마을 정말 많이 커진 것 같구나!”
사내가 흐뭇한 얼굴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사는 마을은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30여 가구 100여 명이 사는 작달막한 곳이었다. 게다가 다핸 남작령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마을 중 한 곳이라 이주해 오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150가구 500여 명이 살아가는 중급마을로 성장했다. 어디 그뿐이랴. 남작령에서도 부유한 마을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자경 대장 보일 덕분이었다.
십여 년 전 이 마을에 정착한 보일은 전직 B급 용병이자 중급 엑스퍼트 실력자였다. 이 정도라면 작은 남작령의 기사단장 급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남작령에서도 가장 위험한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은, 몬스터 사냥을 위해 마을에 들렸던 보일이 카렌이란 아가씨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휴~. 카렌 누나가 그렇게 죽지만 않았어도….”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카렌은 십 년 전, 보일과 결혼 후 아들 하나만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응?”
사내가 상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눈을 비비며 숲을 바라보다 눈을 부릅떴다.
빽빽하게 들어선 숲 위로 세 가닥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세 가닥이라니!”
깜짝 놀란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금 피어오르는 연기는 외곽을 순찰하는 자경단에서 마을로 다가오는 몬스터를 알릴 때 쓰는 신호 중 하나였다. 연기 하나당 백 마리의 오크를 의미하는 것이니, 세 줄기의 연기는 적어도 삼백 마리 이상의 오크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지금까지 외곽순찰대가 두 가닥 이상의 연기를 피워 올린 적은 자경단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땡땡땡-!
사내가 망루 한쪽에 달려 있는 비상종을 울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크가 다가오고 있다!”
비상종이 마을로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 흩어져 생업을 이어가던 자경단원들이 각종 무기를 챙겨 목책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크가 오고 있다고?”
보일이 장대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망루 위로 올라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굳은 표정의 사내가 대답했다.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멀리서 피어오르는 세 가닥의 연기를 응시했다.
세 가닥의 연기.
적어도 3백 이상의 몬스터가 다가온다는 말이었다. 오크의 대규모 침공이 분명했다.
“음…. 생각보다 숫자가 많군!”
보일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만일 이 정도의 대규모 침공이 수년 전 벌어졌다면, 마을 안쪽에 만들어 놓은 토굴로 대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이 커지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제는 마을을 비우기보다는 단단한 목책을 중심으로 방어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온다!”
숲에서 빠져나오는 오크들을 보며 보일이 망루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자경단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각자의 손에 들린 무기를 고쳐 쥐었다.
“크아악~.”
“취익~.”
돼지머리를 한 오크들 수백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녹이 잔뜩 슨 장검이나 도끼를 들고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창을 들고 있었다.
비록 조잡한 무기들이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수백 마리라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평상시 훈련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보일이 망루 위에서 자경단원들을 내려다보며 격려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2백의 자경단은 오랫동안 보일이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킨 정예병이었다. 자경단원들 모두 마을로 침입해오는 오크를 상대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충분히 오크들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보일은 생각했다.
“발사!”
보일의 명령에 따라 백여 명의 사내들이 화살을 날렸다.
쉬익- 쉭-
하늘 위로 떠올랐던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오크들에게 박혀 들었다.
“크어억~.”
고통스러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사실 오크들이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화살 대부분이 오크의 가죽을 뚫지 못하거나 겉가죽에 박혀 큰 상처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완전히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화살로 인해 오크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으니까.
“최대한 화살을 날려 놈들의 돌파력을 저지시켜라!”
인간들과의 전쟁이라면 목책에 다가서기 전에 먼저 화살을 날려 숫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겉가죽이 두꺼운 오크들의 경우 강궁이 아니라면 화살만으로 피해를 주는 게 쉽지 않았다. 때문에 몬스터를 직접 죽여야 할 때는 화살보다는 창이나 검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일 역시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오크들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화살을 날린 것이지, 화살로 오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물론 강력한 기계식 석궁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한번 발사하고 장전하는 데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제작도 어렵고 값도 비싸 애당초 보유하고 있는 수가 적었다.
꽝-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오크들이 그대로 목책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 열의 오크들이 목책에 달라붙자 뒤를 이어 달려온 오크들이 앞 열 오크들의 등을 타고 목책에 달라붙었다.
목책의 높이는 대략 3m 정도였다. 통나무를 잘라 땅을 깊게 파고 세워놓은 터라 쉽게 목책을 뚫고 들어올 순 없지만, 지금처럼 등을 밟고 올라선다면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는 높이였다.
“찔러!”
보일이 크게 소리치자, 목책 위에 있던 자경단원들이 일제히 들고 있던 창으로 목책을 넘어오는 오크들을 찔렀다.
“흐압!”
“죽어라!”
푹- 푹-
창에 찔린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피를 흘리며 목책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더운 피가 아래쪽오크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뒤를 이어 올라오는 오크들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악에 받친 양 목책 위로 꾸역꾸역 밀고 올라올 뿐이었다. 심지어 죽은 오크의 시체를 발판 삼아 목책 위로 올라오는 놈들도 있었다.
“창을 던져라!”
다급해진 보일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목책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경단원들이 바닥에 꽂아 놓은 스피어를 뽑아 들어, 아래를 향해 던졌다.
쉬익- 푹
“쿠엑~.”
“죽여라!”
“으악~.”
“창을 꽉 잡아. 끌려가면 끝장이야.”
이제 막 자경단에 들어온 소년들이 어설프게 창을 내뻗었다. 오크가 이렇게 손쉬운 먹잇감을 놓칠 리가 없었다. 힘없이 목표를 잃은 창끝을 붙잡은 오크가 그대로 창대를 잡아당겼다. 창대를 붙잡고 있던 소년이 오크에게로 끌려가던 순간, 옆에 있던 자경단원들이 달라붙었다. 소년을 붙잡아 끌어오는 사이 다른 대원들은 재빨리 오크를 찔러 죽였다.
“똑바로 창을 찔러 넣으라 했잖아. 다 죽일 생각이냐!”
평소에는 함께 웃고 떠들던 형과 동네의 아저씨들이 매섭게 소년을 질책했다. 전쟁을 벌이는 지금은 작은 실수 하나가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대답할 시간이 있으면 정신이나 차려. 지금은 살 생각만 하란 말이다.”
소년이 잠시 뒤로 물러난 사이에도 목책 위에서는 자경단원들과 오크들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를 악다문 소년은 다시 목책으로 다가가 창을 찔러 넣었다.
“좋아! 잘하고 있다.”
주변 자경단원들의 응원을 받은 소년은 점점 더 자경단원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전사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실전을 겪는 소년들이 모두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허억.”
온 힘을 다해 오크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러 넣은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창에 찔린 오크를 바라보았다.
흉물스러운 오크의 얼굴은 창에 찔린 고통으로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이 숨을 삼킨 이유는 그 흉측한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큰 상처임이 분명할 텐데, 오크는 밀려나기는커녕 자신의 가슴을 찌른 창을 붙잡고 목책을 넘어왔다. 깜짝 놀란 소년이 당황한 나머지 창대를 잡은 상태 그대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취이익~.”
“오, 오크가 넘어왔다!”
주변의 자경단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목책 위에 올라선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놈을 막아!”
여기저기 자경단원들이 몰려들었다. 오크를 공격하려 했지만, 가슴에 박힌 창대를 그대로 잡고 있던 소년이 오히려 방해가 되면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놈 보통 놈이 아니야.”
“일단 저 녀석 좀 떨어트려 놓아야겠어!”
자경단원들이 소년을 떨어트리려 기를 쓸 때, 또 한 마리의 오크가 목책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와 자경단원들을 상대로 무차별인 공격을 감행했다. 목책 위로 오크들이 하나둘씩 오르자 자경단원들의 진형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목책 위로 오르는 오크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안 되겠다. 대장 불러와!”
자경단에서 십장을 맡은 바비스가 답답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자경단원 중 한 명이 급히 목에 걸려 있는 피리를 입에 물었다.
삐-
길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망루 위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지휘하고 있던 보일이 다급하게 동쪽 목책 쪽을 바라봤다.
“이런!”
보일이 망루에서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목책 위로 벌써 5마리째 오크가 올라와 자경단원들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척 보아도 그들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급히 칼을 뽑아 든 보일은 그대로 망루 위에서 뛰어내렸다. 십여 미터에 달하는 높이가 우습다는 것처럼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린 보일은 날듯이 달려 다급하게 동쪽 목책으로 향했다.
“안돼!”
허나 이미 늦었다. 가슴에 창이 꽂힌 오크 한 마리가 훌쩍 목책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보일 역시 다급히 오크 뒤를 따라 마을을 향해 달렸다.
* * *
꽝-
커다란 폭음과 함께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최일은 한순간 정신을 잃었다. 희미하게나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고함이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몸은 정신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지 얼마나 지났다고, 최일은 다시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은… 어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 최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가….”
비틀거리던 최일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만들어낸 단단하고 잘 짜여 진 근육 대신 작고 왜소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던 최일은 이내 주저앉았다. 그리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더니 탄식했다.
“하~.”
이곳에 어떤 곳인지,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아, 또다시 혼자구나.”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는 어둠 속. 홀로 주저앉아있는 최일은 엄습한 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최일은 소망원 안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소망원이 따듯한 곳임은 분명했다. 갓난아기였던 그를 거둬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나눠줬으니까. 그러나 그 바깥의 세상에서 최일은 언제나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왕따와 따돌림은 일상이었다. 최일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노력을 기울였다.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소망원을 나와 직장을 다니면서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역시 바로 고아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한쪽에는 언제나 아픔과 극도의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남혜원이었다.
고통의 연속에서 만난 한 줄기 빛과 같은 인연.
그녀는 그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다. 그랬기에 남혜원에게 더더욱 빠져들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죽도를 미친 듯이 휘둘렀던 것도 남혜원의 오빠들에게 고아가 아닌, 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이에 연장선에 있는 것도 군인의 삶이었다.
비록 몸은 죽을 것처럼 힘들고 어렵지만, 군인의 삶만큼은 언제나 실력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힘든 특전 부사관의 훈련도 견디면서 군 생활에 전념할 수 있던 것이다.
저벅- 저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