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390화 (완결) (390/390)

390화.

"끝났군요."

지하에서 울리는 지진이 멎었다. 멍하니 철문 앞에서있던 니디아는 공기의 마나와 자연력을 확인해보았다.

공기 중의 마나와 자연력 농도. 많이 줄긴 했지만, 더 이상 줄어들 고 있지 않다.

이 세상 전체가 모조리 순수한자연력과 마나로 환원되어 한지훈에 게 흘러들어가려 했던 것이, 어느새 중지되어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니디아는 직감했다.

"결국, 엘로힘이 되길 거부하신 거네요."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니디아는 한지훈의 선택에 순수하 게 기뻐했다.

그녀는 한지훈이 엘로힘이 되길 원했지만, 멸망을 바라진 않았다. 그렇기에 멸망을 거절하고 엘로힘의 경지를 포기한 한지훈의 선택이 기 꺼울 수밖에 없다.

니디아는 자리에서 한지훈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저벅, 저벅.

철문 너머, 지하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필시 한지훈이 지상 으로 걸어나오는 소리이리라.

니디아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래 있었어야 할 타냐와 마게브를 위험감지라는 명목으로 정찰을 보낸 까닭이다.

물론 위험감지라는 명목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실상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에 한 정찰명령이었다.

"드디어, 제 마음을 밝힐 때가 되 었네요."

니디아는 처음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심산이다.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한지훈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힐 생각 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변치 않았다.

그가 모든 일을 끝냈고, 더 이상 남아있는 시련은 없으니 . 자신의 감정을 밝히기에 가장 최상의 때라 여 긴 것이다.

그렇게 니디아는 한지훈을 기다렸 고.

철컥. 끼이이익….

곧, 한지훈이 철문을 열고 등장했다. 니디아는 한지훈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언제나 보아왔던 익숙한 외양이다.

허나 그가 품고 있는 기세와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평소에 발하던 강자의 기세와 날카로운 전투 의지가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신을 정체 모를 신비함과 성스러움이 휘감고있었다.

한지훈이 시스템과의 이별을 고했을 때 전투스킬이 모조리 증발하면서 날카로운 기세는 잃어버렸지만.

그의 격은 반신에 오른 상태 그대로여서, 장엄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품게 된 것이다.

한지훈의 변화에 내심 놀란 니디 아.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요?"

"… 많은 일이 있었지. 정말 많은 일이."

한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리 대답했다.

저벅, 저벅, 털썩.

지친 것일까. 한지훈이 계단 밖으로 걸어나오고는 바닥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다. 그가 니디아에게 묻는다.

"상황은, 정리되었나?"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전투상황. 그에 니디아는 대답했다.

"네, 모두 정리되었어요. 광인과 포식자는 모두 처치했고, 흑마법사 의 군대는 죄다 죽거나 와해되었지 요. 이전쟁은 저희의 완벽한 승리 에요."

"그래. 승리인가…."

피식 웃는 한지훈. 항상 승리해왔지만,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기꺼운 것일까. 그는 시원스 레 미소지었다.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죽 거리듯 비틀린 미소가 아닌 밝고 환 한 미소.

니디아 또한 그의 밝은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잠시 한지훈을 바라보던 니디아.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지훈 씨."

"왜."

"할 말이 있는데요."

이쪽을 돌아보는 한지훈. 마주치는 검은색 눈동자.

니디아는 한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처음 한지훈을 알고 나서 느낀 것은, 공포였다.

세계수와 전 여왕이었던 엘리스의 기억으로 본 한지훈은 잔혹한 학살 자이자 탐욕스런 정복군주였다.

그는 흑마법사와 손을 잡아 대륙을 멸망시켰고, 온 지성체를 학살했다. 대지와 강이 피로 마를 날이 없었다. 무수히 많은 도시들이 불타오르고 파괴되었다. 문명이 몰락했다.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의문이었전생의 한지훈과 달리 이번 생의 한지훈은 이상하리만큼 헌신적이었다.

그는 부하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서 제 몸을 사지에 밀어넣는 걸 마 다하지 않았으며, 무고한 시민을 지키기 위해 적지에 잠입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전생의 우군이 었던 흑마법사를 증오했으며, 제 아 군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검을 잡고 기술을 단련시켰다.

그리고 이후. 니디아 그녀 본인이 엘프여왕이 되어 모든 진실을 깨달 았을 때, 그녀는 한지훈에게서 경외 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개 병사 시절부터 고위 군관을 지나 장성 자리에 도달할 때까지, 그 인품은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부당하게 이 세상으로 끌려들어왔 음에도, 부하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제목숨을 수없이 사지에 처박았다.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다. 그의 전신에는 상처와 고통이 마를 날이 없었으며, 눈가에는 부하 를 잃은 슬픔과 적에 대한 증오가 항상 자리해있었다.

그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 어떤 엘프보다도 고귀하며 아름다운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태껏 함께 행동한 그녀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를 마음에 둔 건지 모르겠다. 깨닫고보니 니디아의 시선은 항상 한지훈을 향해있었고, 항상 그에 대한 것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자 하니.

니디아는 한지훈의 검은색 눈동자 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지훈 씨. 사실 저는-."

기나긴 인생을 살아온 엘프 니디 아였음에도, 부끄러워 쉽사리 내뱉 긴 힘든 말이다. 그렇기에 주저하며 힘겹게 말을 잇는다.

"저는 당신을-."

버벅이는 니디아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한지훈. 그렇게 그녀가 막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으려 할 때.

두두두두두.

건물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에 니디아의 말이 끊기고, 대신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지훈! 어디 있나?!"

마이사의 목소리였다. 니디아는 그녀답지 않게 미간은 잔뜩 찌푸리 며 중얼거린다.

"하필 이때…!"

마치 정확한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마이사의 등장이 니디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가 원망하듯 마이사를 바라본다.

"우리는 승리했다!"

성벽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성벽 위에 올라 연설했다.

"사악한 흑마법사를 몰아냈고, 놈들의 수장 크라함을 제압했으며, 이 세상의 몰락을 저지하였다!"

연설이라고 해도 별것 없었다. 그냥 우리가 적을 물리쳤으며, 승리했 다고 외칠 뿐이다.

나는 연설 실력이 그리 썩 좋지 못하다.

"모두 그대들이 함께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설은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었다. 이번 전투는 꽤 나 그 의의가 컸으니까.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자부심을 줘야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해 목청을 드높이고,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가며 외쳤다.

"그대들이 있어 모든 지성체를 수 호하고, 사악한 흑마법사들의 흉계에서 이 세상을 지켜낼 수 있었다."

시선을 내려 성벽 아래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군대가 도열해있다.

제국, 슈베츠 왕국, 유목 연합, 엘프, 군소국가 연합 등. 대륙과 국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방대한 병력이 모여 흑마법사의 세력과 맞서 싸웠다. 역사상 그전례가 없는 위대한 업적이다.

"그대들이 모든 지성체들의 영웅 이다."

나는 도열해있는 병력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시선에 담았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활기가 가득했다.

춥디추운 기후에도, 그리고 크고 작은 부상과 온몸 진득하니 달라붙 어있는 피로조차 그들의 안색을 바 꿀 수 없었다.

온 병사가, 기사들이, 마법사들마 저 전쟁의 승리에 감격하고 기뻐하고 있다.

완벽한 확실한 승리. 나는 미소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나도, 그리고 역사도. 너희들을 지성체 문명의 수호자이자 영웅으로서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고맙다.

나는 그리 말을 끝맺고는 단상에서 내려갔다. 이후 들리는 것은,

- 와아아아아아!

- 한지훈 연합 의장 합하 만세!

- 제국에 영광있으라!

- 슈베츠 왕국을 위하여 !…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

병사와 기사, 마법사들이 저마다 내 이름과 자신의 소속국가를 부르 짖으며 환호한다. 나는 픽 웃으며 그들의 모습을 살피고,

"명연설이었어. 한지훈."

내 옆에서있던 인물이 그리 말 걸었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마이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명연설은 개뿔, 뭐 한 것도 없는데 ."

"그러기엔 병사들의 반응이 너무 격렬하지 않아?"

확실히, 극히 짧은 연설임에도 불 구하고 병사들의 반응은 가히 열광 적이었다. 물론 내 연설이 훌륭하기 때문은 아니다.

"원래 승리 직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좋은 법이야."

전쟁에서 막 승리해 사기가 극도 로 치솟은 상태에서 한 연설이다. 내가 뭘 하던 반응이 좋을 수밖에 . 단상 위에서 부장님 개그 300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해도 반응이 몹시 좋을 것이다.

아이건 좀 무리수인가.

뭐, 어쨌든.

"이제 정말 끝이구나."

나는 푹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작게 그리 중얼거렸다.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

크라함을 죽였고, 놈의 세력을 분 쇄했으며, 엘로힘의 마지막 개입 또한 어찌어찌 잘 넘겨냈다.

이제 남은 것은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 일뿐.

픽, 절로 웃음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북부대륙에서의 일은 모두 끝났다.

이 혹한의 대륙에 다시는 오지 않길 바라며, 나는 철군 준비에 박 차를 가했다.

대규모 병력이 저마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북부대륙 전쟁이 끝난 뒤.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연합 회의를 시작하겠다."

루벤영지에 자리해있는 연합 본부. 각국에서 파견된 대사들이 참석 해있는 커다란 회의실 안. 나는 원 탁의 가장 상석에 앉아 엄숙히 선언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아직도 연합의 의장이었다.

사실, 전쟁이 끝난 직후 연합 의 장직을 내려놓고 영지에서 한적한 삶을 보내려 했었다. 그동안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으니 , 느긋하게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내 휴식계획은 사정없이 분 쇄되고 말았다.

'다들 기어코 뜯어말리더라.'

내가 의장직을 사임하려 하자, 온갖 녀석들이 다 튀어나와 내 결정을 만류했다. 그들이 나를 말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설마 나 외에 의장될 만한 녀석 이 없었다니.'

이 세계에서, 나보다 연합 의장직에 어울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연합이란 조직이 실상 내가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기 때문이 기도 하고, 타국의 군주가 아니면서 도 나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 전무 하기 때문이다.

그에 어쩔 수없이 나는 연합의 의장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계속 유 지하고 있다.

기왕 의장직을 수행하는 거, 큰 전쟁도 끝났겠다. 직무에 심혈을 기 울이고 있는 중이다.

의장직이란 게, 이래 봬도 꽤나 보람찬 직책이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연합의 의장으로서 연합 회의를 주재하는 중이다.

"가장 먼저 흑마법사 토벌작업이다. 어찌 되었지?"

"보고드리겠습니다. 의장합하."

내 물음에 회의실 한켠에 대기하 고있던 군관, 오스카가 저벅저벅 걸 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나와 같은 북부군 출신 장성. 그는 지금 완전히 연합으로 소속을 옮겨 다국적군을 주로 지휘하고있다.

오스카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한다.

"현재, 우리 연합군은 동부대륙에 숨어든 흑마법사의 잔당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 크라함은 죽었고, 놈의 기반세력이던 볼라바아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광인과 포식자들 또한 모조리 죽어버렸다.

하지만 전세계의 흑마법사들이 전부 사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전투였던 북부대륙 전투.

그곳에서 대다수 흑마법사들은 죽 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사해 탈 출한 놈들도 결코 적지 않았고.

지금 그 잔당 흑마법사 놈들은 주로 동부대륙에 숨어들어 자기만의 거점을 구축하고 있다.

그에 우리 연합에서는 흑마법사의 완전소탕을 위해 병력을 전개하고 있는 와중이다.

오스카의 보고가 이어진다.

"놈들의 삼분지 이를 제압 완료했고,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놈들은 철저히 수색격멸할 것입니다."

"예상 소요시간은?"

"석 달 안에 완벽한 소탕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를 바라보았다.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온다.

"지긋지긋한 흑마법사 놈들. 드디어 모조리 궤멸시킬 수 있겠어."

흑마법사의 세력은 약해졌다.

크라함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놈들은 점조직화 됐으며, 결속력과 그 머릿수 또한 나락까지 떨어졌다.

놈들은 소탕하기 쉬운 허접쓰레기 들이다. 그저 뿔뿔이 흩어져있어 하나하나 찾아 부수기 번거로웠을 뿐.

허나 그것도 끝이다.

제피르, 오스카, 베르겐 등이 지휘하는 대규모 병력이 동부대륙에서 흑마법사를 수색섬멸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모조리 죽어 사라질 것이다. 인류의 암 덩어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기쁘지 아니할 수 없다.

이후 나는 연합회의를 주재하며 여러 안건을 다루었다.

"소년병 징집 금지 협약이 만장일 치로 채택되었다. 이로써 연합에 소속된 국가들중 그 어느 국가도 소년 병을 징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 를 어길 시 모든 연합국에게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마물소탕 및 도로건설을 위한 파병 결의가 가결되었다. 열강회원국에서는 소국에 병력과 물자를 파견 할 것이며, 마물소탕과 도로와 댐 건설을 비롯한 민생 안정작업에 착 수할 터다."

"흑마법사 운용 금지조약. 만장일 치로 채택되었다. 그 어느 국가도 흑마법사를 운용할 시, 무력과 금력을 비롯한 대규모 제재를 받게된다."

"다음으로, 유목 연합과 제국측의 지원물자…."

땅땅땅. 의사봉이 계속해 소음을 발한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결의 안들이 속속들이 통과된다.

나는 흐뭇해져 미소지었다.

소년병 징집 금지, 소국의 치안 안정과 기반시설 건설 지원, 흑마법사 운용 금지조약까지. 다 내가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것들이다.

나는 아직도 내 원본의 흐릿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어렴풋이나 마 현대 유엔의 기억을 지니고있다.

애당초 이 연합 자체가 유엔을 어느 정도 모방해서 만든 집단이다.

그 유엔이 펼쳤던 일을 참고해 만든 것이 바로 위 결의안과 법안들 이었다.

소년병 징집 금지는 아동권리협약을, 흑마법사 금지조약은 핵무기금 지조약을, 소국에서의 마물소탕과 기반시설 건설은 평화유지군과 산업 개발기구를 참고했다.

현대 지구의 머리 좋은 엘리트들 이 지혜를 쥐어짜내 만든 각종 제도 들이다.

적절히 이쪽 사정에 맞춰서 따라 한다면 최소한 중박은 치고, 때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나와 각국 대사들은 하루 종일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고,

"회의를 파한다. 해산하지."

어둑해진 저녁무렵에야 회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난 직후에도 나는 쉴 수 없었다. 내 집무실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나 의 집무실로 향했고. 어느 순간.

"요즘 상당히 바빠보이네, 한지훈."

"마이사."

복도에서 마이사를 마주쳤다.

아무래도, 이번 회의 때문에 연합 본부에 와있는 상태인 것 같다.

실무는 대부분 대사들이 하지만 중요안건의 최종결정은 마이사 같은 군주들이 하니까.

나는 마이사의 등장에 피식 웃고 는, 엄살 부리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바빠 죽을 것만 같다. 몸 과 머리가 쉴 날이 없어."

"한지훈."

내가 너스레를 떨고있자니, 마이 사가 문득 나에게 말한다. 나는 시선을 옮겨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근 연합 일에 열심이라는 소식 들었어. 활기차게 사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음… 그래."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마이 사.

그에 나는 순간 당황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딱히 그녀의 말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방금 지어보인 미소가, 내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쟤가 저렇게 밝게 웃을 줄 알았나?'

내 기억 속에 있는 마이사는 냉 소적이고 계산적이며, 웃음 또한 나 를 닮아 몹시 시니컬했다.

마이사는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의 얼굴은 평소 내가 보아왔던 것과 전혀 달랐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보는 사람마 저 따스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환한 미소.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환한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잠시 멍한 정신에서 깨어나 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픽 웃었다.

"이거 참. 한순간 홀릴 뻔했어."

북부대륙 전쟁이 끝나고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지성체 문명은 서로 간의 모든 전쟁이 사라지고 그동안 발전 과 팽창의 시기를 보내고있다.

마이사는 그 평화로운 시간 동안 꽤나 많은 안식을 얻은 듯싶다.

평화의 효능이란 이렇게도 대단하다.

그토록 냉소적이었던 마이사의 얼굴 표정을, 저렇게 밝게 만들다니.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고생들은 어쩌면 마이사의 저 따스한 표정을 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비식비식 웃고있을 때, 마이 사가 문득 나에게 제안했다.

"한지훈."

"왜."

"말할 게 있는데 ."

그녀가 내게 다가와 무언가를 말하려한다. 천천히 열리는 그녀의 입술.

허나 그녀는 내게 용건을 밝히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한지훈 씨."

"이런. 다른 사람이 있네."

내 뒤로 어떤 인물이 나타났으므 로.

"나중에 이야기할게, 한지훈."

마이사가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 난다.

나는 시선을 돌려 바라보고, 곧 새로이 나타난 인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니디아네. 여긴 무슨 일이야?"

"의장에게 밝힐 내용이 있어서 요."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엘프여 왕 니디아였다. 그녀가 손에 들린 서류들을 팔랑거리며 말한다.

나는 의문을 느껴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서류길래? 그다지 중요해보 이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통신망으로 전송하면 됐지 않아? 본부 까지 오는 게 너무 번거로웠을 거 같은데."

"심심해서 놀러오는겸 해서 직접 전달하려왔죠. 뭐, 직접 오길 잘했네 요. 하마터면 뺏길 뻔했으니까요."

뭘 뺏긴다는걸까?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니디아는 마이사를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둘 중 하나가 선수치기 없기로 하지 않았어요? 마이사 씨."

"니디아! 오해야. 나는 선수친 적이 없…."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지 쩔쩔매는 마이사. 그런 그녀를 쏘아붙이는 니 디아.

"잠깐 대화 좀 해야겠어요. 마이 사 씨? 일단 그쪽 집무실로 가죠."

"후우…. 알았어. 이쪽이야."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예요."

니디아와 마이사가 함께 어딘가로 걸어간다.

어째서일까. 그녀들은 항상 서로 에게 날을 세우면서도 함께 다니는 일이 은근히 많다.

서로 친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뭐, 모를 일이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겠지.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저벅, 저벅.

나는 발걸음을 옮겨 계속해 복도 를 걸었다. 걸어가는 와중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을 바라봤다.

내 영지, 루벤의 야경.

어둑한 밤이 되었음에도 도시는 적막에 휩싸이지 않았다.

오히려 밤의 낭만을 즐기겠다는 것마냥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분주 히 돌아다니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환한 마나등이 밝힌다.

마치 현대 지구의 도시처럼 아름다운 야경.

절로 뿌듯한 감상이 올라온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금방 죽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

지금은 이토록 커다란 도시와 영지를 소유하고, 연합의 의장으로서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있다.

문득, 나는 처음 내가 깨어날 무렵을 떠올려보았다.

당시의 나는 가진 게 쥐뿔도 없는 허접에 불과했다. 능력치는 밑바닥이었고, 무력은 일천했으며, 오러 나 마나 따위도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무수한 전장을 거치고, 살아남아, 전공을 세워, 포인트를 모아, 부하와 동료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살아왔다.

결국 가로막는 모든 적을 분쇄하고 제거해 끝까지 생존했다. 연합의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검을 내려놓고 법 과제도로써 이 세상을 보다 훌륭하 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

"나는 잘 해가고 있어."

창문 밖 야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엘로힘 따위의 힘이 없어 도, 현대 지구처럼 진보한 세상이 될 수 있겠지."

진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현대 지구로 귀환하고자 노력했다. 그곳 이내 고향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는 내 고향이 아니었다. 나는 지구태생이 아니었고, 그저 지구에 있을 원본의 복제품에 불과했다.

나는 현실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끌려들어 왔던 것이 아닌, 처음부터 게임 속 유닛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목표를 바꾸었다.

"이 세상을 지구처럼 발전시킬거야."

지구로 향하는 것이 아닌, 내 고향, 이곳 블랙 오케스트라 세계를 지구처럼 풍족하게 발전시키는 것으로.

적어도 수백 년, 많다면 천 년에 달하는 기나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반신이야. 죽지 않지."

내게는 거의 무한한 시간이 있다. 더해 재력과 무력, 권력과 세력이 있다.

가진 것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그리 오랜 기다림 없어도 이 세상을 눈에 띄게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전쟁 대신 평화를, 창칼 대신 식량을 만드는 세계를 말이다.

지구에서는 아직도 이뤄지기 힘든 일이지만,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소망한다.

"이 세상이 발전하길."

그리하여 현대 지구처럼, 아니, 지구보다도 더욱 훌륭하고 성숙한 문명을 갖추기를.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나는 반드시 실현시켜 보일 것이다.

먼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멍하니 도시의 야경을 바라본다.

거대한 도시 전체가 은하수처럼 빛나고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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