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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89화 (389/390)

389화.

번쩍!

내려그어지는 백색 궤적.

직후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홀로그램이, 힘없이 반으로 잘려 흔들리더니 사라진다.

내 세계검이 처음으로 홀로그램을 절삭했다.

그러자 내 몸으로 마나와 자연력 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멈췄다.

시나리오 해체가 중지된 것이다.

[내 개입을 절삭했군.]

새로운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인정하지. 너는 진심으로 내 후 계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전지 와 전능을 버리고 약간의 인연을 택 한거다.]

새로이 떠오른 관리자의 메시지 또한 절삭했다.

검로가 그어지자 황금색 홀로그램 이 반으로 갈라지고 허공으로 흩어 진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을 언젠가 후회할거다. 한지훈.]

"개소리."

다시 검을 휘둘렀다.

메시지가 잘려 사라진다.

[네 주변의 모든 인연과 지성체는 언젠가 그 생명이 다해 죽어 사라질 것이다. 그때 가서도 지금처럼 엘로 힘이 되는 걸 거절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럼에도 연속되어 떠오르는 관리 자의 메시지.

무시하고 검을 휘두른다.

서걱. 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관리자의 홀로그램을 절삭하면 절삭할수록 녀석의 '존재감'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공격이 녀석의 본체를 타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놈은 전지하고 전능하며, 사실상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내가 잘라낸 것은 놈의 '영향력'.

녀석이 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 과 간섭을 하나둘 지워가고 있다.

비유하자면, 본체 자체엔 타격을 가하지 못하지만, 놈이 힘을 투사할 '길'들을 잘라버린다고 할까.

이쪽에 간섭할 수 없도록 모든 회선을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홀로그램을 베어나가다 보 면, 놈은 결국 이 세계에 대한 간섭 능력을 완전히 상실할 터.

그때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물론 내가 절삭하는 것은 관리자 의 메시지뿐만이 아니었다.

"퀘스트."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부여된 퀘스트가 없습니다.]

[서브 퀘스트]

[부여된 퀘스트가 없습니다.]

번쩍.

나는 검을 휘둘러 퀘스트창 홀로그램을 절삭해냈다.

시나리오 관리자의 영향력이 더더욱 축소되었다.

지체하지 않고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귓가를 때리는 알림음.

지금 나는 놈의 모든 영향력을 말살하기 위해, 벨 수 있는 모든 홀로그램을 베고있다.

엘로힘의 간섭력 그 자체라 할 수있는것. 시스템과 홀로그램.

그것들을 모조리 베어낸다면, 이 세계는 놈의 영향 하에서 완전히 독립할 수 있게 된다.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

[엘로힘의 후계자]

[스킬 : 군단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상급)]

[스킬 : 기마술(상급)]

[스킬 : 투창(입문)]

[스킬 : 은신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몰입]

[엑스트라 스킬 : 전투예지]

[근력 (알 수 없음)]

[민첩 (알 수 없음)]

[내구 (알 수 없음)]

[체력 (알 수 없음)]

[마나 (알 수 없음)]

(남은 포인트는 0pt입니다.)

보이는 것은 내 정보창. 그동안 쌓아왔던 무수히 많은 기록들이 자리해있다.

내가 보유한 스킬들. 그간 쌓아온 능력치들까지.

엘로힘에 의해 후계자로 지정되고, 대량의 마나와 자연력을 흡수한 덕분일까. 내 능력치는 모두 (알 수 없음)이라 표기되어있다.

그만큼 능력이 극도로 증폭되었다는 것을 뜻하겠지.

나는 세계검을 치켜올렸다. 홀로그램을 절삭하기 위해.

허나, ……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 정보창. 만약 이것을 세계검으로 절삭해낸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힘을 잃게 되는 건가.' 내 스킬과 능력치들. 자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동안 내가 달성한 업적들의 결과이자, 내 강함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지표였으니까.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었으 니까.

그러나 엘로힘이 이 세상을 해체 하는 것을 막고 놈의 영향에서 독립 하기 위해서는, 모든 홀로그램을 제 거해야 한다. 그중에는 내 정보창 또한 포함된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는 망설임이었다.

허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고독한 신보다, 고독하지 않은 필멸자가 더 나은 법이지."

나는 세계검을 휘둘러 홀로그램을 베어냈다.

서걱!

손쉽게 홀로그램을 가로지르는 세계검.

시야 속 자리해있던 내 정보창이 절반으로 쪼개지고, 화면 속 문자들 이 힘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내 몸속 대다수의 스킬과 기술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전장의 공기를 읽는 방법을 잊게 되었고, 수준 높은 검술은 기억에서 사라졌으며, 말은 어떻게 타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투창과 은신 또한, 그 노하우와 방법이 모조리 잊혀져갔다.

내가 익힌 기술이 모조리 소멸해 간다.

그나마 다행으로, 내 신체에 담긴 힘은 그대로였다.

시스템의 가호가 사라졌지만, 이미 형성된 육체 자체는 온전히 보존 되는 모양.

나는 시선을 들어올려 앞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관리 회선이 단절되어 버렸군.]

관리자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허 나 그 메시지는 이전 같지 않았다.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지 않았으 며, 압도적인 존재감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놈이 이 세계에 펼쳐놓은 관리 회선이 대다수 제거되었기에, 그 영향력이 극도로 줄어든 것이다.

직감했다.

저 홀로그램이 마지막이다.

저 작은 홀로그램만 절삭해낸다면, 엘로힘은 모든 간섭력을 잃고 이 세상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된다. 그만큼 놈의 존재감은 확실히 약해져 있다.

철그럭.

나는 세계검을 집어들었다. 비로소 놈의 모든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그때 문득.

[한지훈. 너와 대화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다. 그러니 질문 하나 하지.]

놈이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새로이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질문이라. 뭐지?"

[내가 만든 세계는-.]

홀로그램의 말꼬리가 이어진다.

곧 완성된 문장.

[내가 만든 세계는, 재미있었는 가?]

순간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었 으므로.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사실 재미는 없었어. 즐거움이라 고는 쥐뿔만큼도 느끼지 못했지."

블랙 오케스트라 세계관.

게임으로 할 때는 극한의 재미를 느꼈지만, 막상 이 세상 속에서 태 어나보니 이만큼 막장인 것도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폭력.

오지에서는 마물이 인류를 위협하고, 강력한 대량학살 마법이 전장을 유린한다.

인권의식은 시궁창에, 물자와 식량 또한 풍족지 못하다.

내가 알고 있는 현대에 비해 여러모로 안 좋다. 아니, 극악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이 재미를 찾을 만큼 여유 있는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갈 만한 가치는 있었어."

그럼에도 이 세계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 났다. 능력도, 성격도, 추구하는 것 도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세계가 썩 싫 지만은 않다. 괜찮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귀었으니까. 내가 괜히 엘 로힘의 자리를 거절하면서까지 그들을 지키고자 한 게 아니다.

내 대답을 들은 관리자가 대답한다.

[그런가….]

나는 다시금 세계검을 쥐어들며 읊조렸다.

"그럼,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고. 엘로힘."

검을 휘둘렀다. 번뜩이는 백색 궤 적. 순식간에 잘려나가는 마지막 홀로그램. 직후 이 지하공간에 이변이 인다.

쿠르르르르르르….

어둠을 밝혔던 환한 광채가 일제 히 사라지고, 공간이 흔들리고 진동했다.

엘로힘과의 연결이 비로소 완전히 끊기자, 힘을 잃은 이 공간이 붕괴 하는 것이리라.

"나가볼까."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는 그리운 얼굴들을 보며 해후할 시간이다.

콰앙!

지면을 박차고 공간 밖으로 향한다. 내가 지나온 공간이 우르르 무 너져내렸다.

시스템이 있던 지하공간이 완전히 매몰되어간다.

쿠르르르르르…!

"진동이다! 조심해!"

"총사령 각하! 몸을 숙이십시오! 지진입니다!"

기사들과 함께 유적도시로 향하고 있던 마이사. 그녀는 기사들의 보고에 급히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서있는 지면이 크 게 흔들린다.

쿠구구구구구! 쿠쿵! 쿠르릉….

마이사의 몸이 흔들리고, 그녀가 타고 있는 전투마가 휘청거렸다.

마이사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는 기사들에게 되물었다.

"지진이라니! 자연적인 지진인 가?"

"아닙니다. 자연지진은 이렇지 않습니다! 분명 뭔가의 이변입니다. 전투의 여파 같습니다."

"상황은 모두 끝나지 않았는가?!"

마이사는 시선을 돌려 유적도시의 중앙방향, 한지훈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쿠궁. 쿠르르르릉….

지면이 다시금 진동하고있다.

기사들은 이 지진을 대마법이나 , 혹은 그에 상응하는 커다란 규모의 교전으로 인한 여파라 여기고 있다.

어째서일까. 광인과 포식자들이 무력화돼 크라함이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했다.

헌데 또다시 새로운 교전이라도 있는 듯 땅이 흔들리고있다.

이렇게 땅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전투라.

마이사는 추측한다.

'이런 전투를 벌일 만한 인물은 한지훈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사실이다.

과연 한지훈은 무엇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인가.

더해 이변은 이 커다란 규모의 진동뿐만이 아니었다.

"총사령 각하! 대기중의 마나가 급속도로 희박해져갑니다!"

한 기사가 그리고했다. 그에 다른 기사들 또한 동조합니다.

"… 확실히, 마나의 흡수 효율이 평소의 절반 이하입니다. 대기 중 마나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어째서이지? 마나 농도는 항상 일정한 것이…."

기사들이 하나둘 혼란에 빠지고, 마이사 또한 갑작스러운 여러 이변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그들이 혼란에 허우적거리 고 있을 때였다.

"총사령 각하! 저길 보십시오!"

한 기사가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그에 마이사는 시선을 돌려 기사 가 가리킨 방향을 주시했고, 곧 볼 수 있었다.

번쩍!

빛기둥. 거대한 황금색 빛기둥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마이사나 다른 기사들이 평생 단 한번도 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며 찬란한, 일견 신의 힘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성스러운 빛이었다.

빛기둥을 발견한 기사가 읊조린다.

"저곳에서… 대량의 마나가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음…."

저 빛기둥 아래 어딘가, 한지훈이 있을 터다. 마이사는 그리 직감했다.

저토록 대량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인물은 그녀가 알기로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마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한다.

"저곳으로 향한다."

"총사령 각하! 위험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지금 상황은 이변투성이입니다. 대기 중 마나와 자연력 농도가 극히 희박해지고 있고, 갑자기 빛기둥이 치솟는가 하면, 전투의 여파로 인한 격한 지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진을 재고해 주십시오. 적어도 이상황이 정리된 이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사들의 격렬한 만류.

허나 마이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진한다."

마이사가 시선을 돌려 빛기둥을 바라보았다. 한지훈에게로 향할, 이 정표와도 같은 환한 빛.

마이사가 나직이 말을 잇는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 지금 한지훈에게로 가야한다는 예감이. 늦 게 간다면, 얄미운 누군가에게 소중 한 뭔가를 뺏길 것 같은 예감이 든 단 말이야."

"총사령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 신…."

"출발하라! 지체해서는 아니된다! 내가 앞장서겠다!"

마이사는 기사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앞서 나아갔다.

어째서 저리 서두르는 걸까.

기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곧 전투마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마이사를 뒤쫓는다.

마이사와 기사들이 찬란한 빛기둥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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