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보인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한다는 홀로그램.
떠오른 홀로그램은 저것 하나뿐 만이 아니었다.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연속해 울리는 알림음의 무리들.
[세계의 축복'이 발현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종류의 죽음을 극복합니다.]
[아이템 : 리바이어던의 핵'이 '세계의 축복'과 반응합니다!]
[아이템 : 베히모스의 핵'이 '세계의 축복'과 반응합니다!]
[모든 상태이상이 치유됩니다.]
직후 이변이 일었다.
내 몸에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 한다.
완전히 어둠 속에 물들어있던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어갔다.
심장이 다시금 박동하고, 혈관을 따라 신선한 혈액이 유동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마나와 자연력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어, 괴사한 내 신체 부위들을 수복시켜갔다.
잃어버렸던 감각들을 모조리 되 찾았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그 모든 감각이 이전처럼 선명하게 느껴진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사라졌던 감각이 순식간에 돌아 오는 감각이란.
내 변화는 단순한 회복으로 그치 지 않았다.
[유저의 모든 능력치가 '세계의 축복'과 반응합니다!]
[신체 능력치가 교정됩니다.]
[근력 1,000]
[민첩 1,000]
[내구 1,000]
[체력 1,000]
[마나 1,000]
[유저가 반신(Demigod)의 영역에 도달했습니다!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내 신체는 회복을 넘어서 진보해 가기 시작했다.
근력, 민첩, 내구, 체력, 마나. 내 모든 능력치가 극도로 증폭되었다.
전신의 근육은 폭발적인 힘을 머 금고 맥동했으며, 온몸이 깃털보다 도 가볍게 느껴졌다.
뼈와 관절, 피부가 이전에 느껴 본 적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느껴 졌다.
원한다면 평생이라도 뛸 수 있을 것만 같은 무한한 체력이 느껴졌다.
유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나가 심장 속에 들어찬다.
나는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
방금 전 유물을 활성화했던 내가 지녔던 능력치는 600.
헌데 저 '세계의 축복'이라는 것 덕분인지, 내 모든 능력치가 1,000에 이르게 된 것이다.
추측해본다.
'니디아가 무언가 수를 써준건가.'
이전에 한스와 전투할 당시 겪었 던 세계수의 축복과 엘프여왕의 가 호처럼. 그녀가 무언가 이능을 발현 해 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 여긴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꽤나 시기적 절한 지원이었다.
이렇게, 내가 죽음에서 되살아나 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데미갓이라.'
눈앞의 홀로그램을 재차 훑어보 고는 피식 웃었다.
지성체를 넘어서 초월자, 초월자 를 넘어서 반신이라니. 참 알기 쉬운 격의 단계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만 같다.
뭐, 이 세상을 처음 접했던 것도 게임이었으니 .
잡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눈앞에서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크라함. 방금 전 나를 가지고 놀 았던 흑마법사.
놈은 경악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있다. 답지 않게 녀석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다.
놈이 뒷걸음치며 읊조린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네놈이 세계의 축복을 받은거지?! 이 공간 은 내 진멸세계로 완전히 장악된 상태란 말이다! 외부와 완전히 격 리되었을 터인데!"
놈이 이 지하공간 가득 새겨놨던 검은색 마법진, 진멸세계.
그것은 나를 공격함과 동시에, 외부와 차단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엘프의 지원을 받아 죽음을 극복, 보다 강한 존재로 거듭났다.
'저 시나리오 관리자의 개입 덕분이겠지.'
왠지 모르게 그런 직감이 들었다.
피식 웃었다.
"고맙네."
시나리오 관리자. 처음에는 그저 나에게 시련을 부여해주는 엿같은 새끼인 줄 알았다.
헌데 점점 나를 도와주고 있다.
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일단 지금은 눈앞의 크라함을 죽이는 게 먼저다.
철그럭.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내 세계검을 주워들었다. 크라함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발악하듯 외친다.
"그래봤자다, 한지훈! 네놈은, 네 놈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 니!"
놈이 검은색 세계검을 치켜든다. 일렁이는 칠흑의 기운. 타오르는 놈 의 붉은 안광.
흥험한 기운이 다시금 주변 공간에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진멸세계여!"
크라함이 세계검을 이쪽으로 겨 눈다. 검은 세계검에 검붉은 오러광 이 일어나 격하게 타오른다.
"놈에게 완전한 죽음을!"
콰아앙!
사방을 메웠던 검은색 연기가 순식간에 실체화를 마치더니, 이쪽으로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진멸세계의 공격. 견뎌낼 수 있을 리 없다.
아까 전의 나였다면 말이다.
허나 나는 강해졌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승리하는 건 나다.'
세계검에 한껏 정화의 기운을 밀 어넣었다. 세계검에 어린 백색 오러 가 더더욱 격렬하게 타오른다.
검신이 찬란한 빛을 머금어 강대 한 기세를 발했다.
나는 세계검을 양손으로 잡고, 크게 휘둘렀다.
파앗!
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백색의 빛무리.
방사된 빛무리는 내게 쇄도해오 던 검은색 기운을 순식간에 지워 없애버리고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 지하공간 가득 메워져있는 검은색 마법진 또한 타격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콰콰콰콰쾅!
청백색 스파크와 함께 검은 마법 진들이 지워져간다. 그러자 급격히 사라져가는 크라함의 진멸세계.
질척한 검은색 기운이 빛무리에 휩쓸려 사라진다.
"마, 맙소사…! 말도 안된다."
크라함이 뒷걸음친다. 놈이 한 발자국씩 내게서 멀어져가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세계의 가호를 받았다 한들, 이토록 강해질 수는 없단 말이다.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고작일 터인데. 어찌하여…."
나는 발걸음을 옮겨 크라함에게 걸어간다. 놈은 재차 뒷걸음질 친다.
그때. 문득 놈이 무언가 깨달은 것일까.
크라함이 두 눈을 크게 뜬다.
"이 기운은…."
직후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크라 함. 놈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 린다.
"엘로힘…. 그래, 엘로힘이 관여 한건가."
그게 무슨 소리일까.
놈 앞에 선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그시 녀석을 바라보았다. 엘로힘이 관여했다는 녀석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으므로.
놈의 혼잣말이 이어진다.
"엘로힘. 이 세상을 방치하던 신 이어째서 지금 관여한 것인가. 어째서… 내가 그토록 부르짖으며 구 원을 찾았을 때는, 결코 모습을 드 러내지 않았던 엘로힘이, 어째서!"
크라함의 얼굴에 분노가 어린다. 놈이 이쪽을 바라보며 뇌까린다.
"힘든 삶이었다.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다. 수없이 구원을 찾아 엘로힘을 불렀지만, 놈은 결코 내게 응답 하지 않았다."
한탄과 분노가 반쯤 섞여있는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
썩 보기 좋진 않다.
"헌데, 어째서, 어째서 엘로힘이 네놈을 돕고있는 것이냐! 네놈과 내 차이가 무엇이라고!"
네놈과 내 차이가 무엇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스를 떠올렸다. 한스 또한 비슷한 말을 내게 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에 나는 대답했다.
"너는 세상을 저주하고 멸망시키 고자했다."
크라함. 볼라바아 혹마법 학파의 종주.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악의 수괴.
놈 또한 처음부터 저런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필시 다른 인간들처럼,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장했겠지.
그런 평범한 지성체가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증오를 품으려면 어떤 경험을 해야할까.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야 이토록 비틀린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확신할 수 있다.
놈은 잘못돼있다. 생각이, 가치관 이 비틀려있다.
"반면 나는 이 세상을 지켜내고 자 싸웠다."
나는 크라함과 달랐다.
내 주변, 내가 소속된 집단, 나아 가지성체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사실 반쯤 등 떠밀려 나선 전장 이었다. 내가 대단한 인류애와 사명 감 따위를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나는 나와 인연을 맺은 이 들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싸우고, 전투를 거듭해, 어느새 영웅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크라함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놈은 그저 부하와 동료를 소모품 으로 다루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 한들 소모해버렸으며, 사람의 목숨을 그저 다루어야 할 자원으로 취 급했다.
세계검을 완성하고 엘로힘이 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인명과 영혼을 소비했다.
나는 과거, 내가 막 군단장으로 진급할 무렵. 당시 북부사령관이었 던 데이비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 려 보았다.
- 반드시 패배할 전쟁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싸운다면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지요.
- 하지만 인의를 버리고 병사를 소모품으로 여긴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 그럴 때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당시의 나는 선택해야 했었다.
사람의 목숨을 자원처럼 여기며 오직 목적만을 달성할 것인지. 혹은 인간의 도리를 지켜 전투에 임할 것인지.
나는 여기서 후자를 선택했었다.
가혹한 전투에 임하면서도, 최대한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크라함은 전자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주변 인물들을 하찮은 소모품으로 여겼다. 세상에 분노하고 모든 것을 소모해가며 멸망시키려했다.
그 차이가 지금 이 순간 아닐까.
"너는 모든 걸 불신하고 저주한 나머지 혼자가 되었고. 나는 다수의 조력을 받아 이자리에 섰다."
혼자는 약하다. 다수는 강하다.
그리고 여기서 혼자는 크라함이 었고, 다수는 나였다.
그러니, 처음부터 승패는 결정되어 있던 것이다.
나는 세계검을 치켜들었다.
"혼자인 너는 결국 패배할 운명 이었던 거야."
화르르륵.
세계검에 오러를 돋웠다. 아른아 른 피어오르는 백색 광휘.
반신의 영역에 들어선 덕분인가. 내 세계검에서 일렁이는 오러광의 광휘는 너무나도 순수하고도, 찬란했다.
그리고, 죽음이 목전이라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 까.
"내가 , 내가 이렇게 죽을 것 같 으냐아!"
크라함이 괴성을 내지르며 세계 검을 쥐어든다. 반항하려는 기색.
놈이 발악하듯 외친다.
"나는 엘로힘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내 삶, 나의 신체! 영혼과 운명! 그 모든 것을 이 일에 걸었단 말이다!"
"하지만 실패했지."
"실패하지 않았다! 네놈만 죽으 면, 나는 절대를 극복하고 이 세상 의 신이 될 수 있다!"
놈이 세계검을 쥐고 달려든다.
콰앙, 하는 파공음과 함께 내뻗 어지는 검은색 장검.
허나 느리다. 반신의 격을 취한 내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검격-나는 놈의 장검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세계검을 휘둘러 녀석의 오른 팔을 잘라냈다.
서걱!
미약한 절삭음.
"크아아아아아!"
직후 터져나오는 크라함의 비명.
"내 팔이, 내 팔이이이!"
"이전의 육신이었다면 고통은 없겠지만, 한스의 육신을 빼았았기에 고통 또한 느끼는건가. 몇 안 되는 단점이로군. 그렇지 않나?"
"죽여버리겠다! 한지훈!"
크라함이 제 오른쪽 어깨를 짓눌 러 흘러나오는 피를 막더니, 왼손으로 세계검을 쥐어들고 다시금 달려 든다.
쯧. 혀를 차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재차 울리는 절삭음.
"크으으으!"
크라함이 왼팔마저 잃고 휘청거 리더니,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낮아진 놈의 얼굴.
나는 시선을 내려 녀석을 내려다 보았다.
"크라함. 이제 모두 끝이다. 막다른 길이란 말이다. 네놈은 결코 엘 로힘이 되지 못하고, 세상은 평화와 번영을 되찾을거다."
"후욱, 후우욱!"
"마지막 유언은 없나?"
크라함이 고통에 숨을 헐떡인다.
그래도 한때 모든 지성체의 적이 었던 녀석이니, 유언 정도는 들을 만하다 싶어 녀석에게 그리 물었다.
그러자 크라함이 고개를 치켜들 고 내게 고한다.
"너를 저주하마…. 한지훈."
"기꺼이 받아들이지."
놈의 유언. 딱히 들어줄 만한 가치는 없었다.
파앙!
검을 휘둘렀다. 백색 궤적이 놈 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녀석의 모가지가 붕 떠오른다.
왈칵 튀어오르는 붉은색 핏물. 한스의 육신을 그대로 취한 덕분인 지, 녀석의 피는 흑마법사답지 않게 붉은색이었다.
툭. 데구르르….
크라함의 목이 지면을 뒹군다. 나는 푹 한숨 쉬었다.
"이렇게 끝인가."
화르르르륵!
나는 정화의 기운을 일으켜 크라 함의 시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백색 불꽃이 놈의 시체를 완전히 소멸시 켜간다.
크라함. 흑마법사들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다.
내가 놈의 목숨을 끊었다 한들, 모종의 방법으로 다시금 되살아날 수 있다. 이를 염려해 놈의 시체를 정화의 기운으로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되살아난 적과 싸우는 일. 한스 와 이미지긋지긋하게 해보았다. 다음 적은 사양이다.
나는 크라함의 시신이 모조리 불 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시선을 돌려 지하공간 한켠을 바라보았다.
"저기 안쪽에 시스템의 중추가 있겠지."
검은색 마법진으로 뒤덮인 이 지하 홀의 한켠. 그곳에는 반투명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양문이 하나 자리해있다.
필시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으리 라 여겨지는 곳.
아마도 저곳에, 시스템의 중추라는 것이 자리해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겠지."
나는 발걸음을 옮겨 수정문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