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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84화 (384/390)

384화.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려, 바로 앞에 있는 크라함을 바라보았다. 놈의 눈빛을 살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번들거리는 핏빛 안광. 놈의 눈동자에는 찰나의 흔들림조차도 없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 기 색.

"그렇기에 네놈에게 제안하는거그가 양팔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러자 어디선가 날아와 그의 양손에 잡히는 마법지팡이와 검은색 세계검.

"내게 대적하는 것을 멈추고, 나 에게 협력한다면…."

크라함이 마법지팡이를 휘젓는다.

직후 일어나는 이변.

쿠르르르르르르….

흥험한 소음이 울리며 허공이 일 그러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곧 검은색 음영이 드리워진다.

마치 게이트마법과도 비슷한 모습.

하지만 직감할 수 있다.

지금 크라함이 운용한 마법은 게 이트마법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도 아득히 상위의, 오직 초월의 영역에 이른 위대한 마법사 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이다.

"…네놈을 지구로 보내주겠다."

차원 간섭 마법.

크라함이 검은색 세계검을 휘두 른다. 그러자 쩌억 벌어지는 검은색 장막.

갈라진 검은 장막 너머에서 환한빛무리가 쏟아져나오고, 이후 장막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경관이 보였기 때문에.

"그래. 이곳의 상위차원이라 할 수 있는 곳. 네놈의 고향, 지구다."

작은 방의 경관이다.

방안에 자리해있는 침대와 책상.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여있다. 그 컴퓨터 모니터 액정을 빛내 고 있는 것은 게임 블랙 오케스트 라의 로고.

방금 전까지 기억나지 않았던, 내 방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은 경관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침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다.

"저게 네놈. 정확히 말하자면 네 놈의 원본이지."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인물. 내 원본. '지구의' 한지훈이.

소름 끼치게 꼭 닮은 얼굴이었다.

언제나 거울을 볼 때마다 자리해 있던 얼굴.

비록 시스템의 가호 덕분에 체격은 이쪽이 더욱 컸으나, 얼굴은 단 한치의 다름없이 완벽히 똑같았다.

크라함이 나직이 말을 잇는다.

"네놈 또한 초월에 이른 격이 있으니 깨달을 수 있겠지. 방금 내가 발현한 마법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내 차원 간섭 마법은 타 차원을 관 측하는 것까지 진보했으며, 실제로 네 앞에서 실현해보였다."

그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비록 '지금'은 타 차원을 관측할 수만 있을 뿐, 개입할 수는 없다. 따라서 네놈을 저곳에 보내는 것도, 혹은 나 자신이 직접 저기 상위차 원으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허나."

펄럭.

그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놈의 얼굴이 완전한 음영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드의 그림자 아래로 일렁이는 한 쌍의 붉은 안광.

"허나 네놈이 나에게 협력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모든 유물을 취하고, 격과 육신마저 갖춰, 진정한 엘로힘 이 된다면… 네놈을 저 세상으로 보내줄 수 있다. 내가 엘로힘이 되 기만 한다면 말이다…."

엘로힘이 된 자신의 모습이라도 상상해본 것일까.

그가 클클클 웃는다.

사악한 웃음소리.

"원한다면 저 원본 대신의 삶을 살 수도 있게 해주지. 무얼! 쉬운 일이다. 놈의 기억을 추출해서 네게 이식해주마. 그렇다면 너는 이전의 기억을 복구하고… 원본의 자리를 빼앗아 네가 원본인양 행세할 수도 있겠지. 매력적이지 않나?"

쯧.

나는 기분이 나빠져 혀를 찼다.

"내가 네놈에게 협력하고 지구로 갈거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나? 크라함."

"뭐가 문제이지?"

그가 나에게 되묻는다.

"네놈의 고향, 지구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네 유일한 소망이 아니 었는가?"

맞다.

내 궁극적인 목표. 지구로 귀환 하는 것.

이 처절하고 야만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내 단 하나의 염원이었다.

"내가 이루어줄 수 있단 말이다."

크라함이 다시금 시선을 돌려 게 이트 안쪽을 바라본다. 놈이 이어 말했다.

"네놈은 나에게 유물과 격을 넘 기고, 네놈은 원본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리한다면서로가 원하는 모든 걸 충족할 수 있지. 너는 원하던 지구의 삶을 되찾고, 나는 엘로힘이 되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놈이 시선을 다시 되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어디 그뿐일까. 네놈은 지구로 넘어가서도 지금의 신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일반 지성체를 아득 히 뛰어넘어, 노화와 질병을 완전히 극복한 신체를 가진 채 저 풍족한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이다!"

확실히, 지금 내 신체 그대로 온 전히 저 세상으로 넘어간다면 나는 영생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 신체는 시스템의 가호를 받아 완전히 지성체의 영역을 초월 해있는 상태이니까.

크라함의 말이 진실이라면, 꽤나 매력적인 선택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순 없다.

영생. 지구의 모든 인류들이 바라마지 않던 것을 내가 가지게 되 었다는 소리이니.

"반면, 네놈이 내 제안을 거절한 다면……"

목소리를 낮게 내리까는 크라함.

놈의 붉은색 안광이 좀 더 진해 진다.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네게는 엘릭서가 남아있지 않 지."

크라함은 내게 더 이상의 엘릭서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는 듯하다.

"말이 길어졌지만. 간단한 선택이다. 한지훈."

크라함이 마법지팡이를 쥐고있는 오른팔을 들어올려, 게이트 너머 지구의 모습을 가리켰다.

"약속된 영원의 삶이냐."

그가 오른손을 돌려 나를, 정확히는 내가 쥐고있는 세계검을 가리 킨다.

"아니면, 확정된 죽음이냐."

"택하라. 한지훈."

나는 침묵한 채 고뇌했다.

'영생. 그리고 죽음이라.'

시선을 들어올려, 눈앞 게이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초라한 내 방의 모습이 떠올라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있다.

'귀환. 그리고 영생.'

저 방 너머에는 커다란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있고.

이 야만적인 세상보다 훨씬 안락 하고, 풍족하며, 평화로운 생활이 자리해있다는 것을.

다시금 시선을 돌려 내 손아귀를 바라봤다.

'혹은 죽음.'

내 손아귀에는 세계검이 쥐어져 있다.

커다란 크기의 장검. 문득 손아 귀에 실리는 장검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했을까.

피식.

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이 커다란 아티팩트 장검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그 묵직한 무게를 느끼고 있자니.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엘프 여왕 니디아. 그녀를 따르는 엘븐 가디언들. 영지를 운영하고 있는 랑스. 영지의 드워프와 마탑주 들.

이 세계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준 이들이다.

내가 신세졌던 게 어디 이들뿐인 가.

이 세상에 떨어졌던 이후.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은 한둘이 아니다.

그간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황제. 아주 예전부터 함께해왔던 마이사. 북부군 시절부터 서로 합을 맞추어왔던 단장들. 평민출신 십인 장이었던 나를 키워줬던 그레드 천 인장. 그리고 처음 눈을 떴을 무렵 나와 함께 전장을 전전했던 병사들 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과 함께 했기 에, 지금 이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녀석들을 버릴 수는 없지."

헌데 그들을 배신하고 오직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정도로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다.

철그럭.

세계검을 굳세게 쥐어들었다.

"결국 나와 대적하는 것을 택했 는가."

눈살이라도 찌푸린 것일까. 크라 함의 붉은빛 안광이 일순 미약하게 흔들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째서이냐?! 지구로의 귀환과 영생이다. 네가 그토록 원했던 소망, 그이상을 내가 이루어줄 수 있단 말이다!"

"이래봬도 동료를 배신하고 버릴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지라."

"동료라니? 이해할 수 없군. 그런 덜떨어진 놈들을 위해, 영생을 마다하고 확정된 죽음을 받아들이 겠단 말이냐?"

부하와 동료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크라함으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놈에게는 긍정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으니까.

어찌 보면 불쌍한 놈이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저리 되 었는가.

내가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 것을, 어째서 저토록 이해하지 못하겠 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처음으로 크라함에게 동정을 느꼈다.

놈이 쯧 혀를 찬다.

"어리석군. 기어코 확정된 죽음을 선택하다니. 네놈은 나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오기 전까지 내가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만 있었는 줄 아느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후욱.

나는 심호흡했다.

오러를 끌어올린다.

"붙어보자고. 크라함."

화르르르르륵!

격렬하게 타오르는 푸른색 불길. 불길이 세계검의 검신을 완전히 뒤덮고, 내 전신에서 푸른색 광휘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사라졌던 푸른색 광휘가 이어두운 지하공간을 환하게 밝혀 갔다.

"마지막 전투라 생각하니까, 홀가 분한데."

전의가 상승한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감각이 날카롭 게 벼려졌으며, 긴장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정면의 크라함을 바라보았다.

놈 또한 마법을 발현하려는 것일 까. 녀석의 온몸에서 흉험한 붉은색 빛이 일렁이고 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것이 마치 신호인 것처럼, 나와 크라함이 거의 동시에 읊조렸다.

"진멸세계."

"유물 활성화."

- 띠링! 띠링!

[아이템 : 리바이어던의 핵'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아이템 : 베히모스의 핵'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말하지 못했네 요."

니디아가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지금 이곳은 유적도시 내성의 1층. 한지훈이 향한 지하계단의 통로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린다.

"지금쯤이면, 슬슬 한지훈 씨께선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셨겠지요."

아까 전, 한지훈이 막 지하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직전. 그녀는 모든 것을 한지훈에게 말할 심산이었다.

한지훈이 가진 출생의 비밀.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감정까지. 이 장소에서 모조리 고백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하지 못했다.

"어차피 말한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으니…."

자신과 한지훈은 결코 이어지지 못한다. 그녀는 그리 체념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녀에겐 체념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옆에 있던 타냐가 나직이 묻는다.

"여왕님. 정녕 한지훈을 살리실 심산이십니까."

"네. 한지훈 씨를 살릴 거예요."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고개를 푹 숙이는 타냐.

"여왕님께서 목숨을 잃게 되십니다."

니디아는 자신의 목숨을 소모해, 한지훈을 살리고자 한다.

과거 전대 엘프 여왕이었던 엘리 스가, 자신의 격을 희생해 죽음 직전의 한지훈을 살려냈듯이.

이번에는 니디아 그녀가 스스로 의 목숨을 바치려 하는 것이다.

싱긋 웃는 니디아.

"그런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타냐. 저는 괜찮으니까요."

"이 세상을 존속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 저희 엘프의 사명이에요. 그런 엘프의 여왕인 제가, 새로운 엘로힘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영광스럽지 않나요?"

니디아는 고개돌려 타냐와 마게브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두 엘븐가디언들. 그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주군인 니디아가 얼마 안 가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는데 . 표정이 좋을 수가.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도, 니디아는 밝게 웃고있다.

"저는 오히려 기뻐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엘프의 사명까지 완수하다니 말이에요."

그녀의 억지웃음에 타냐와 마게브가 눈을 감는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침울한 기색.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지하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진동이 터져나왔다.

그 충격에 흔들거리는 내성. 후 드득 떨어져내리는 천장의 먼지.

건물의 골조가 삐그덕거린다.

"시작됐네요."

니디아가 시선을 돌려 철문을 바라보았다.

저 철문 너머, 쭉 이어진 지하공 간 속. 한지훈과 크라함이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를 지원해야 한다.

후우.

니디아가 작게 심호흡하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세계수여. 엘프여왕의 마지막 권 능을 발현할게요. 저를 도와주세 요."

그녀가 이능을 발한다.

오직 엘프여왕에게만 허락된, 이 세상 최고위의 이능이었다.

찬란한 녹색 빛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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