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383화 (383/390)

383화.

나는 지하계단을 걸어간다.

저벅, 저벅.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리는 발자국 소리.

벽면에 매달린 청색 조명이 시리 게 산란하고, 발소리는 무기질적인 석벽을 때려 웅웅 울린다.

지하로 향하면 향할수록 긴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곧 끝이다.'

시나리오의 끝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시야 속 한켠에 떠올라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를 완성하라는 퀘스트창 이 보인다.

피식.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

처음, 이 세계로 끌려들어왔을 적부터 내가 세웠던 결심.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글쎄.

내가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다.

결말은 둘 중 하나다.

크라함과의 전투에서 놈에게 패배해 죽거나. 혹은 전투 이후 유물 사용의 여파로 죽거나.

모두 내가 죽는 결과들뿐.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크라함. 너만은 반드시 죽어줘야 겠어."

나의 죽음은 이미 확정되었다.

그러니, 나는 크라함만이라도 반드시 죽여버리길 원한다.

놈만 없다면 적어도 이 세상은 구원받을 터이니 말이다.

저벅, 저벅.

길고도 긴 지하계단을 걸어가 아래로 향한다. 지하 깊숙이 파고들어 갈수록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무겁고, 질척한. 온갖 악의가 극한으로 농축되어 만들어진 불길한 기운.

'혹마나.'

지하 안쪽으로 내려갈수록 진하 게 느껴진다. 그 질척한 감각이 뒷 골을 울리는 것만 같다.

후욱.

심호흡하며 세계검을 굳세게 쥐 어잡았다.

"거의 다 왔어."

이토록 진한 흑마나가 느껴진다는 것은, 크라함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일 터. 그리 여기며 나는 지하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고.

곧 마주할 수 있었다.

'문.'

지하계단이 끝나는 장소. 그곳에는 요새의 성문처럼 커다란 석제 양문이 자리해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에 띤 것은 석문 사이에서 흘 러나오는 검은색 연기. 극도로 농축 된 혹마나다.

그리고 연기와 함께 은은히 새어 나오는 붉은색 광휘. 흑마법의 발현 으로 인해 생성된 마나광.

이 석문 너머에, 극도로 농축된 대량의 흑마나가 격렬히 유동하며 이형의 흑마법이 발현 중이다.

분명 크라함이 정체 모를 흑마법을 발현하고 있을 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라함, 네놈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전장에 등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동안 여기서 뭔가를 꾸미고 있었어."

크라함이 그동안 숨어있던 이유.

놈은 이곳에 틀어박힌 채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과연 어떤 수작질을 해놨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세계검을 집어들었다. 오러를 발현한다.

화르르르륵!

검신을 집어삼키듯 격렬히 타오르는 푸른색 광휘. 암흑색 기운이 일렁이는 공간에서 내 오러광이 청아하게 빛났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려놨든. 네가 그 어떤 함정을 준비해 두었 든."

철그럭.

나는 검날의 첨단을 석문으로 겨누었다.

"모조리 파훼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야."

나는 한껏 응축시켜두었던 힘을 한번에 쏘아냈다.

단 한번의 찌르기.

저 견고한 문을 부수는 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두터운 석문이 박살 나 흩어졌다.

비산하는 파편무더기.

문 뒤에 자리해있던 대량의 흑마 나가 흩어져 휘날리고, 곧 방안의 모습이 보인다.

부서진 석문 너머로 자리해있는 것은 꽤나 커다란 지하 홀이었다.

사람 수천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

그 드넓은 지하공간의 사방에는 검은색 마법진이 아로새겨져 있다.

벽에도, 지면에도, 천정에도. 단 한 뼘의 여백조차 없이 빽빽히 새 겨져있는 암흑색 마법진들.

마법진들은 흉험한 붉은색을 번 들거리며 발광하고 있다.

'기분 나쁘군.'

꽤나 소름 끼치는 공간이다.

피처럼 진한 붉은색을 발하는 마법진들과 뿌연 흑마나의 연기가 시야를 온통 채운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다.

그렇게 내가 주변의 모습을 둘러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어서 와라. 한지훈."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한편 낯선 목소리였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편안했는 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된 건 꽤나 오랜만이로군."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흑마나가 농축된 뿌연 연기 너머, 흐릿하게 어떤 사람의 인영이 보인다.

"전생 나의 오랜 벗이자, 나의 주군이었었던 이."

검은색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인물저벅, 저벅.

놈이 점점 앞으로 걸어나온다.

뿌연 혹마나의 연기에 가리워졌 던 녀석의 모습이 가까워지며 점차 선명해진다.

"현생에서는 나의 적이 된 인물. 이름 없는 별, 상위차원의 영혼, 한지훈이여."

저벅, 저벅. 우뚝.

놈이 발걸음을 멈춰선다.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여 미터 정도.

둘 모두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서로를 타격할 수 있는 거리다.

나는 긴장감을 끌어올릴 채 놈을 노려보았다.

언제든지 녀석을 공격할 수 있도 록.

허나 어째서인지.

"그리 노려보지 말라. 당장 싸울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지금은 일단 대화를 하지. 그동안 쌓인 대화거리가 많지 않나."

녀석은 당장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스르륵.

크라함이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익숙한 얼굴.

사내새끼 주제에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기른, 재수 없이 곱상한 얼굴. 한스 요한바르첸의 얼굴이었다.

한스의 얼굴을 한 크라함이 내게 말한다.

"한지훈. 내가 네게 제안하지."

그가 시선을 들어올려 이쪽을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쳤다.

핏빛으로 빛나는 크라함의 안광.

"나에게 협력하라. 그렇다면 너를 본래 세상으로 보내주지."

* * *

크라함은 눈앞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검은색 눈동자, 검은색 머리카락. 시선은 날카로웠으며, 풍기는 기세는 격렬했다. 웅위한 카리스마가 그 의 온몸을 휘감고있다.

한지훈.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지닌 이.

자신이 이 세상의 신-엘로힘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재료.

크라함이 그에게 제안했다.

"나에게 협력하라. 그렇다면 너를 본래 세상으로 보내주지."

"… 그게 무슨 소리이지? 네놈."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한지훈. 이쪽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는 진한 적의가 가감 없이 드러나있다.

크라함의 제안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기색.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크라 함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으니까.

지금의 제안은 그저 좀 더 쉽게 일을 끝내기 위한 시도일 뿐.

한지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 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최후에 엘 로힘이 되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 여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한껏 여유로운 표정 으로 한지훈을 바라보고 있다.

크라함의 제안이 이어진다.

"말 그대로다. 네놈의 소망을 엘 로힘이 된 내가 이루어주겠다. '이곳'의 네놈을 네 고향, 상위차원인 지구로 올려보내주겠다는 거다. 그러니 내게 협력하라. 한지훈."

"역시 개소리였군."

제안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일 까.

철그럭.

한지훈이 세계검을 고쳐잡는다.

그에 피식 비웃음을 흘리는 크라 함.

"한지훈. 너는 이 세계의 모든 걸 충분히 알고있다 여기고 있을거다. 엘로힘과 유물들. 운명과 시나리오. 언젠가 닥쳐올 예정된 종 말…."

"어울리지 않게 혓바닥이 길군 그래. 크라함."

"하지만, 정작 네놈 본인에 대해 선 무얼 알고 있지?"

저벅. 크라함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간다. 간격이 조금 가까워진다.

"한지훈. 떠올려봐라."

저벅. 그가 한 발자국 더 걸었다. 남은 거리 약 8미터가량.

한지훈이 경계하듯 오러를 끌어 올린다.

화르르륵!

그의 전신을 푸른색 광휘가 휘감았다. 검붉은 연기 속 청색 마나광 이 아스라이 피어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함의 말 은 계속해 이어졌다.

"네놈 본인에 대해 무얼 알고있 지'?"

"영문모를 소리를 지껄이는군."

"지구에 있을 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나?"

저벅. 저벅.

크라함이 발걸음을 옮겼다. 좀 더 가까워지는 거리. 그의 접근에 한지훈이 기세를 끌어올린다.

크라함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떠올려보아라, 한지훈. 지구에 있을 적 네놈의 모습을 말이다."

"네 부모님, 네 가족, 네 친우들 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가?"

한지훈의 얼굴이 굳는다.

"역시. 기억나지 않나보군."

크라함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하기야, 네놈에게 상위차원의 기억은 전혀 없을거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한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무슨 개수작을 부린거냐. 크라 함. 어떻게 내 기억을 조작한거 지?"

"오해로군. 나는 네놈의 기억에 손을 댄 적이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터인데. 아직 엘 로힘도 되지 못한 내가 ,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지닌 네놈의 기억을 변조할 수 있으리라 보나?"

"그럼 이건 뭐지?"

으득.

이를 악무는 한지훈.

"어째서, 지구의 기억이 내게 없는거냐."

처음에는 무시하려했다.

그야, 놈과 말을 오래 섞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놈의 제안을 기만책이라 여겨 상대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구에서 나는 뭐였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간신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아주 단편적인 신상정보들과, 조각조각나있는 지식들뿐이다.

이름 한지훈.

군 전역 이후 모 대학교 재학 중.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를 클리어 한 이후 이 엿같은 세상에 끌려들 어왔다.

블랙 오케스트라를 클리어하는데 사용한 역사와 군사 지식들, 그리고 약간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지금껏 싸워왔다.

그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전무하다.

부모님이 누구인지. 내 친구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교육과정을 거 쳐 어느 대학교에 진학했는지. 지구에서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조 차.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혼란스럽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이 엿같은 세상에 떨어진 뒤, 나는 지구에 있을 적 내 추억을 떠올 려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 엿같은 세상에서 십수 년을 굴러다녔다.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몇 번인가 부모님과 친우들을 떠올릴 만했는데 .

어째서 그러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들을 떠올려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가.

나는 시선을 들어올려 크라함을 바라보았다.

놈의 태도를 보아하니, 내게 지구의 기억이 없는 이유를 알고있는 듯하다.

크라함이 클클 웃는다.

"간단한 이야기다. 한지훈."

그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그리 말한다.

과장된 몸짓.

"네놈도 충분히 이 세상을 겪어 봐서 알겠지. 이 세상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는 작자는. 결코 자애 롭지 않다!"

흑마나가 진하게 스며들어가 있는 크라함의 음성. 놈의 목소리가 웅웅 공간을 울린다.

"그 엘로힘의 시선으로 생각해보 아라, 한지훈."

크라함의 붉은색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섬뜩한 감각이 척수를 타고 스멀 스멀 올라온다.

"엘로힘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리자다. 그대리 자의 표본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네놈, '시나리오'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 '지구의 한지훈'이었지."

크라함이 입꼬리를 비튼다.

"헌데 굳이 불완전한 지성체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안 그러나? 차라리 우수한 개체를 개조해 활용하는 것이 더욱 효울적 일 터인데 말이야."

불길하다.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차마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불길하고 꺼림칙한 것 이상으로, 어째서 내가 지구의 기억이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 앞섰으므로.

으득.

이를 악물고 놈을 재촉했다.

".??말하고자 하는 게 뭐냐. 의뭉 은 그만 떨고 제대로 말하지, 크라 함."

"그래. 간단히 알려주지."

크라함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 킨다.

"한지훈. 네놈은 원본이 아니다."

순간 나는 놈의 말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의미 모를 소리였으 니까.

허나 녀석은 멈추지 않고. 마치 내게 선고하듯.

"너는 복사품에 불과하다."

내게 고한다.

"지구에 있는 원본 한지훈을 복사해 쓸모없는 기억과 인연을 제거 한 뒤, 이곳에서 재창조된 존재. 오직 엘로힘의 대리자가 되기 위해 설계되어 탄생한 개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한지훈, 이름 없는 별. 바로 네놈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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