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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80화 (380/390)

380화.

"적의 지휘부가 붕괴했다! 몰아 쳐라!"

한지훈이 3성벽의 지휘부를 파괴한 뒤, 마이사는 더욱 거세게 군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지휘천막에 자리해있는 그녀가 지도를 바라보며 쉼 없이 지시한다.

"4군단, 측면으로 선회. 3군단을 보조하라."

"1군단! 키메라가 돌진해올 가능성이 높다! 방진을 꾸리고 충격에 대비하라!"

"파라블렘 기사단! 1군단이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우측으로 파고들어! 적의 허리를 잘라내는 것 이다!"

"14번 군단…."

그녀의 눈이 바쁘게 지도를 홅는다.

한지훈이 마지막 최상급 흑마법사를 처치했다.

더해 놈들의 종주인 크라함마저 현장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

이제 놈들에게 있어 구심점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남은 것은 상급 내지 중급에 불과한 흑마법사들과, 그런 허접한 것 들이 이끄는 노예병사와 키메라들 뿐.

제3성벽을 연합군이 장악하게 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아직 제4성벽이 남아있다.'

그녀의 시선이 지도 끝단의 마지막 성벽으로 향한다.

4성벽. 요새의 마지막 보루인 방어시설이다.

저 4성벽만 돌파한다면 내부에는 광활한 도시유적지가 있다. 네 겹의 성벽을 넘어 마침내 중심지로 진출 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많은 수의 광인과 포식 자, 그리고 지하 깊숙이 크라함이 자리해있을 터.

놈을 제압해야 한다.

물론 녀석들을 제압하는 방법이 야 차고 넘친다.

마이사는 군략의 천재였고, 그녀의지휘 아래 연합군은 정확하고도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지휘봉을 잡은 이상, 그리고 하루 만에 제4성벽까지 공략 하겠다 선언한 이상.

그녀의 계획은 차질없이 이루어 질 것이다.

허나 그녀는 주저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 방법을 쓴다면, 한지훈이 위험에 노출된다.'

단언할 수 있다. 마이사가 떠올 린 방법을 사용한다면, 한지훈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그 라도 극복해낼지 모르는 그런 위험 말이다.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마이사.

그렇게 그녀가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 마이사.

문득 그녀의 손에 들린 통신수정 구에서 어떤 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한지훈의 목소리였다.

마이사는 눈을 뜨고,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 나는 충분히 쉬었다. 이제 다음 지시를 내려줘.

"한지훈…."

- 하하.

어째서일까. 수정구 너머의 한지훈은 뜬금없이 웃었다.

그에 마이사는 영문을 몰라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고, 한지훈이 이어 말했다.

-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안 그래?

"… 그걸 어떻게 안 거지?"

- 네 목소리가 그렇게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너는 내 양녀야. 네 목소리만 들어 도 무슨 상태인지 바로 알 수 있어.

피식. 마이사가 웃었다.

기껏해야 몇 년 동안 함께 살았 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했던 양녀 행세였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마이사는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때 문득.

- 내가 위험해질까봐 다음 지시 를 주저하고 있군. 안 그래?

수정구 너머의 마이사가 침묵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만. 그렇게 내가 걱정되나?"

- 한지훈. 3성벽과 달리 4성벽은 위험해. 내가 입안했지만, 너무 위험한 작전이야. 지금이라도 계획은 변경하는 게 좋아.

"아니. 그대로 간다. 다른 방법은 병력소모가 너무 극심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제 연합군은 제4성벽만을 남겨 두고 있다. 3성벽까지는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완전히 장악해둔 것이다.

하지만 제4성벽 공략은 쉽지 않다.

그 너머에는 키메라나 노예병사 가 아닌, 광인과 포식자들이 있을 터이니까.

광인. 그리고 포식자.

놈들은 크라함이 단일개체로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생체병기다.

놈들은 일반병사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으며, 대량의 화력과 기사단의 전투력을 투입해야만 간신히 소수의 개체를 제거할 수 있을 따 름이다.

허나 그런 광인과 포식자들이 도 합 수천 개체나 저 성벽 너머에 있다.

기존대로 전투한다면 막대한 사상자가 나올 것은 당연지사.

그렇기에 나와 마이사는 토론했고, 결국 찾아냈다.

제4성벽을 공략하는 방법.

사실 알고 보면 별것 없다.

"어그로. 그리고 우회침투."

4성벽 공략 계획을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

"놈들은 멍청하게도 성벽 위를 완전히 비워뒀지."

흑마법사 놈들은 제4성벽 위에 아무런 병력을 배치해두지 않았다.

놈들로선 어쩔 수 없었을 터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크라 함은 광인과 포식자를 도시유적 내부에 풀어두었을 뿐, 전투에 사용하 도록 지휘권을 넘기진 않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번 전략이 성립될 수 있었다.

"아군의 대규모 병력이 성벽 위에서 놈들에게 화력투사를 가해 어그로를 끈 뒤, 그 틈을 타 내가 포함된 소수의 정예병력이 크라함이 있는 곳까지 침투해 놈을 죽인다."

합당한 전략이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흑마법사 의 세력을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크라함을 죽이는 것이다.

크라함이 곧 볼라바아다.

모든 광인과 포식자는 크라함에 게 혹마나를 지원받아 움직이고 있으며, 크라함만 죽는다면 놈들은 얼마 가지 못해 소멸하게 될 터.

즉, 크라함만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니 직접 놈을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사실은 이미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사는 아직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 너무 위험해, 한지훈.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만큼 이번 전투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성벽 위의 아군이 대규모 화력투사를 가해 광인과 포식자들의 주의 를 끈다 한들, 모든 놈들이 어그로에 끌리진 않을 것이다.

최소 수백에 달하는 광인과 포식 자가 도시 내부에 남아있을 터.

그런 수백의 생체병기를 소수의 병력으로 돌파해 크라함에게 도달 해야 한다.

아무리 내 무력이 강대한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허나 상관없다.

"나는 할 수 있어, 마이사."

실패하리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 으니까.

그리고 실패해 만약 내가 죽게 된다 한들, 전혀 아쉬울 것 같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사는 아직도 불안한 기색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어 말했다.

"내게는 아직 하나의 엘릭서가 남아있어. 포션도 다수 가져갈 거고. 충분히 할 만해. 위험한 상황에서 곧바로 회복할 수 있으니 말이 야."

물론 거짓말이다. 내가 가졌던 마지막 엘릭서는 마이사를 회복시키는데 사용했다.

나에게 남아있는 엘릭서는 더 이상 없다.

다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리 말했을 뿐.

내 거짓말이 다소나마 먹힌 것일 까. 마이사가 이내 곧 수긍한다.

- …알았다. 그럼 다음 성벽을 공략하지. 병력이 준비되는 대로 지시하겠다.

만약 내게 엘릭서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가 이번 전투를 허락했을까?

모를 일이다.

- 전군에게 전파한다!

마이사가 통신채널을 바꿔 전군 에게 명령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 각 군은 지정된 위치로 이동한 다! 성벽 위로 올라 요새화하라! 4성벽 너머 광인과 포식자들을 타격 할 준비작업에 착수하도록!

이제 4성벽을 공략한다.

연합군 병력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4성벽 위를 올랐다.

오르는 데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애당초 4성벽 위에는 적의 병력이 단 한 개체도 존재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덕분에 연합군 병사와 기사, 마법사 등 대량의 병력은 수월하게 성벽 위로 올라 요새화 작업에 착 수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그시 바라봤다.

병사들이 대량의 발리스타들을 성벽 위에 올려 설치한다.

전투마법사들이 마나포션을 들이 켜가며 마법을 준비하고, 기사들이 방진을 꾸린다.

성벽 위에 올라온 병력의 수가 꽤나 많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만 정도 되지 않을까. 그 정도로 많은 병력이 위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이성벽은 길고도 거대했다.

나머지 병력은 예비대로서 성벽 바깥에 대기하며, 발리스타 투사체 와 화살, 식량 따위를 보급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버틸 수 있는 건 대략 반나절인가."

대량의 병력이 성벽 위에 올라 일방적으로 원거리 공격을 가한다 한들, 포식자와 광인은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뒤 반나 절이면 성벽 위 대다수 병력이 몰 살될 것이다.

그전에 크라함을 찾아 죽여야 할 터.

나는 시선을 돌려 4성벽 너머 안쪽, 유적도시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의 경관이 시야 속에 자리한다.

유적도시의 모습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이 허물어져 있는 고층 석제건물들.

거리 내부에는 건물파편 무더기 와 먼지 따위가 가득하고, 반쯤 허 물어진 도시 곳곳을 포식자와 광인 따위가 배회하고 있다.

후우. 숨을 골랐다.

"저놈들을 돌파해 크라함이 있는 곳까지 가야한단 말이지."

잠입.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굴라덴 전투라던가.

[스킬 : 은신술(하급)]

이전에 잠입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은신술 스킬도 가지고 있다.

이 스킬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 겠지.

그렇게 가만히 서서 도시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씨."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니디아였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한다.

"굴라덴 때가 생각나네요. 그렇지 않아요?"

"뭐, 그렇지."

이번 잠입에는 니디아도 함께한다. 정확히는 그녀와 엘븐가디언들 까지 함께다.

니디아가 이어 말했다.

"굴라덴때 한지훈 씨와 처음 만 났었죠. 거기서 한지훈 씨와 함께 도시 내부로 잠입해서 흑마법사의 마법진을 파훼했었는데…."

꽤나 오래전의 이야기다.

아직 내가 백인장이었을 무렵.

나는 그녀와 만나 굴라덴 중심부에 잠입해 마법진을 파훼했고, 도시주민들의 언데드화를 막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네요. 한지훈 씨와 잠입이라니."

"똑같진 않지. 이번에 우리가 헤 치워야 하는 건 흑마법사 놈들의 조잡한 마법진이 아닌, 크라함이니까."

그렇게 내가 니디아와 몇 마디 나누고 있을 때.

- 광역마법진을 발현하라!

마이사의 목소리가 통신수정구를 울렸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읊조렸다.

"시작됐다."

전투마법사들이 광역마법진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마나가 허공으로 상승하고, 곧 백색 하늘에 30개의 광역 마법진이 자리해 강렬한 마나광을 일렁이고 있다.

중첩되어가는 광역마법진. 강렬해 지는 기세. 공기를 뒤흔드는 마나의 울음.

광역마법진들의 광휘는 어느새 절호조에 달했고, 그 직후.

- 발현! 발현하라!

마법사들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번쩍!

백색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쿠구구구구구궁….

굉음이 울리고 지하공간이 흔들렸다. 충격에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천장의 먼지.

크라함이 씨익 웃었다.

"왔군. 한지훈."

방금 전 진동은 분명 제4성벽에서 울린 진동이었다.

그 말인 즉, 한지훈과 놈이 이끄는 연합군이 어느새 4성벽에 도달 해 전투를 수행 중이라는 것일 터.

마침내 놈들이 마지막 관문에 도 달했다. 한지훈이 이곳에 도착하기 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크라함이 지팡이를 집어든다.

"놈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해야겠 군. 마법진, 발현. 절대에 도전하는 나의 의지."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시동어 를 읊조린 직후.

쿠르르르르르르.

지하공간 전면에 새겨진 마법진 들이 일제히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피처럼 진한 붉은색으로 반 짝이는 크라함의 마법진들.

그 기세가 너무나도 흉험하고, 질척하며, 불쾌하다.

곧 이내 지하공간은 온통 적색 광휘로 가득 메워졌다.

크라함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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