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상황이 좋지 않아. 어제의 야습 으로 많은 고위군관이 전사했어."
제2군의 임시 사령부 천막에 도착한 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 내 말에 호응하듯 자리해있는 군관들이 하나둘 말을 보탰다.
"병력 손실도 심각합니다. 고작 한번의 습격에 불과했는데 두 개 군단이 반파되었습니다."
"사기 또한 나락으로 처박혔습니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동요는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이분위기를 반전시킬 뭔가가 필요합니다."
"으음…."
턱을 괴고 표정을 찌푸리는 마이 사.
그들의 말처럼 지금 상황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1만이 채 안되는 수의 적이었다.
반면 이곳 제2군 본영에는 십수 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십수만의 커다란 군세가, 고작 1만이 채 안 되는 적의 별동대에게 사령부를 공격당한 것이다.
적의 우월한 야간전 능력.
이 일의 여파는 꽤 컸다.
병력이 동요하고, 시시각각 사기 가 하락하고 있다.
고뇌하던 마이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연합군은 약화될 것이고, 적은 강성해질 거야. 시간을 많이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 말은?"
"기존의 계획을 전면 파기한다."
마이사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는 큰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의 정체는 윈터아르비엔 전 역을 자세하게 표기해둔 군사지도.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본래 우리 계획은, 적의 성벽을 차근차근 점거해가며 적을 완전 봉 쇄하는 것이었지."
마이사의 말대로, 본래 연합군의 계획은 이곳 윈터아르비엔 요새유 적을 점진적으로 공략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충분하고, 보급 또한 완벽하니.
굳이 서둘러 공략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상황은 바뀌고야 말았다.
"적의 야간전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니, 기존의 전쟁계획을 유지 해서는 안 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속도전을 노린다."
달칵. 달칵.
마이사가 군사모형을 집어들어 지도 위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깃발은 군단급 보병대. 삼각형은 기사단. 동그란 원형은 마법사 전력.
마이사가 모형을 배치해가며 말을 잇는다.
"아군의 사기가 모조리 소진되기 전에. 그리하여 이쪽에 피해가 누적 돼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기 전에. 요새 전채를 장악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속도전이라… 마이사, 2군의 고위 군관들이 많이 죽었어. 속도전 같은 섬세한 작전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을텐데."
"할 수 있다. 나라면 말이야."
내 우려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젓는 마이사.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고한다.
"내가 조금 고생한다면 제2군을 기존처럼 지휘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마이사의 얼굴을, 그 눈빛을 주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또렷하고도 선명했다.
깊은 자신감이 담겨있는 눈빛.
나는 피식 웃었다.
'지휘할 때는 이렇게 생기 넘치는 녀석이, 그땐 왜 삶을 포기했을 까.'
이해 못할 일이다.
마이사의 말이 계속해 이어졌다.
"이번 속도전은 전력의 집중과 병력의 전투피로 분산, 그리고 적의 방어시스템 와해가 중점이 될 것이 야. 이걸 잘 봐라."
달칵.
마이사가 마지막 모형을 지도 위에 배치했다.
나는 지도를 바라보고는, 곧 익숙한 병력배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게 두 개의 제대로 이루어진 군대.
하나의 제대는 보병이 대다수이 며, 다른 하나의 제대는 기병과 기사단, 그리고 전투마법사들이 화력을 보조한다.
이전 시나리오에서 꽤나 자주 보 아왔던 진형이기에, 나는 이 진형의 정체를 알고있다.
'종심전투교리 진형.'
과거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운용하 던 기동전 전략이자, 이전 시나리오 의 마이사 슈베츠가 자주 사용하던 전략이다.
"군과 충격군, 두 개 제대로 이 루어진 부대로 적의 성벽 곳곳을 동시에 공격한다. 그에 적 지휘부는 혼란에 빠져 섣불리 예비대를 투입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적 방어거점의 일부가 깨지게 되겠지. 아군 충격군 제대에 의해서 말이야."
"맞다. 이후 아군 충격군은 적의 종심 깊숙이 파고들어가 방어체계 의 혼란을 야기할 것이며, 덕분에 일반군이 보다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게 되겠지."
사실 종심전투교리는 공성전에는 맞지 않는 교리다. 본래 광활한 적의 방어전선을 상대할 때 운용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병력끼리의 간격이 협소 한 공성전에서는 그 효율이 크게 떨어질 터.
하지만 문제는 없어보인다. 이곳 윈터아르비엔 요새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요새의 크기와 성벽의 길이가 몹시나 길기에, 병력의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이 정도로 거대한 전투공간이라 면 종심돌파교리를 적용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터.
마이사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전투는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군과 충격군, 두 개의 제대가 번갈아가며 정지와 추 월을 반복해 적의 영역을 장악해나 간다."
"관건은 섬세한 지휘능력과 전장에 투입된 병력의 유동성이로군."
종심전투교리의 장점은 고도의 유동적 구조.
궁극적 목표는 적의 종심을 유린 하여 적의 방어능력의 소멸.
한번의 전투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복합 연속 작전을 펼쳐 승리를 조직해내는 것.
실현하기 위해선 잘 훈련된 병력 과 고도의 지휘능력, 높은 수준의 기동성 및 막강한 화력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능력.
나는 마이사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사가 있다면 가능해.'
애당초 이전 시나리오에서 마이 사의 장기가 바로 종심돌파였다.
그녀는 예지에 가까운 전세파악 능력과, 극도로 섬세한 전장지휘를 통해 항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해냈다.
이번 시나리오의 그녀 또한 이전 시나리오에 상응할 정도로 능력을 발전시켰으니 , 충분히 잘 해낼 터.
"자, 준비하지. 병력을 재배치하고 다음 성벽 공략을 준비하자고."
마이사가 슬슬 회의를 마치려 한다.
그녀가 씩 웃으며 단언했다.
"내일 아침 공세를 가할거다. 그리고 남아있는 두 개의 성벽을 단 하루 만에 점렴해보이지. 병력 배치 잘 끝내고, 전투를 대비해 푹 쉬게 해줘. 내일은 꽤나 힘든 싸움이 될테니까."
제3성벽을 책임지는 최상급 흑마법사, 아틀리트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래. 마이사, 그 계집을 성공적 으로 처치했다 그말이렸다?"
그가 계획했던 대로, 마이사 슈 베츠를 처치했기 때문에.
-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처치는 아닙니다. 대리자이시여.
"저주 걸린 장검으로 그년의 배를 꿰뚫었다 하지 않았나? 필시 죽 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어."
확신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몸이 직접 준비해 배부했던 저주받은 장검이다. 죽음 이외의 결과는 없을 터다."
별동대로 보냈던 2천의 암흑기사 들.
그들은 하나같이 저주받은 장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틀리트가 직접 저주마법을 걸어준 장검이었다.
최상급 흑마법사인 그의 경지는 결코 하찮지 않았고, 그런 그가 만약을 대비해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 그의 저주가 농밀하게 어려있는 장검에 마이사가 상처입었다.
저주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생체활동을 정지시켰을 터.
살아있을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 도 없다.
엘릭서 따위라도 복용하지 않는 한 말이다.
아틀리트는 클클 웃었다.
"이제 연합군 놈들은 완전히 와 해되겠군."
아틀리트는 마이사 슈베츠의 리더십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의 지휘능력은 대단했다.
전장의 빈틈을 순식간에 찾아내 공략했고, 병력을 제 손발처럼 손쉽 게 다루었다.
공세는 한 치의 허점조차 없이 치밀했으며, 현장을 장악하는 솜씨 또한 흠잡을 것이 없었다.
국소적인 전장부터 드넓은 요새 전체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명령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저주에 당해 죽게 되었으니 , 아틀리트는 장담했
"우리의 승리다."
아틀리트가 시선을 돌려 그의 시야 한컨에 떠올라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맡은 제3성벽 의 곳곳을 비추는 전략지도였다.
그는 지도에 보이는 연합군 측의 움직임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예상대로 연합군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있군. 놈들은 조만간 스스로 붕괴될 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연합군 측의 움직임은 기존의 진형과 달리 뿔뿔이 흩어져있는 상태였다.
크게 세 방향에서 뭉쳤던 것과 다르게, 나름의 여유간격을 두고 퍼 져있게 된 것이다.
사실은 다음 성벽 공략을 위한 병력 전개였지만, 군략에 조예가 없는 아틀리트는 그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병력이 퍼지게 되었으니 적의 단합이 흐트러졌으리라고 단순 하게 판단할 뿐.
그는 아직 마이사 슈베츠가 생존 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아틀리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좋아. 이대로 3일만 지켜보지. 그때쯤이면 놈들의 진형이 상당히 무너져있을 터. 그때를 노려 야습을 건다면 놈들을 일제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틀리트의 생에 있어 3일째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내일, 그의 목숨이 끊길 것 이기 때문에.
야습 없는 밤이 평화롭게 지나간다.
다음날 아침. 연합군의 병력 전개가 완료되었다.
"이제 슬슬 전투시작인가."
나는 홀로그램에 떠오른 지도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군단 지휘술 스킬로 인해 떠오른 홀로그램 이었다.
전장의 영역이 너무나도 광대하 기에 지도에 모든 화면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얼추 현재 전세를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만족스 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완벽해. 이 정도라면 순식간에 성벽너머로 전진할 수 있겠 어."
이전의 연합군이 크게 세 방향에서 뭉쳤던 것과 달리, 이번 연합군 의 진형은 다소 헐거웠다. 병력을 한 군데에 뭉치지 않고 드넓게 퍼 트려놓았기 때문이다.
"전방위에서 고른 공세를 펼쳐 적의 예비대 투입을 지연시키고, 충격군으로 놈들의 전선을 돌파한다. 이후 충격군이 놈들의 종심을 휘젓 기만 한다면…."
이후는 볼 것도 없다.
적은 내부가 붕괴되어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 혼란을 틈타 전진과 제압을 반복해 적을 차근차근 물리 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놈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
나는 시선을 들어올려 다시금 전 방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제3성벽 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이사는 오늘 안에 4성벽까지 공략할거라했다."
3성벽과 4성벽을 단 하루 만에 공략하는 일.
사실 내가 직접 군을 지휘한다 한들 힘든 일이다.
그만큼 두 성벽의 동시공략은 어 렵고 난해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어찌 보면 허언이라고 여길 법한 발언.
허나 마이사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나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으 므로.
내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성벽 의 공략이 모두 완료된 뒤의 일.
후우. 심호흡했다.
"4성벽 뒤 어딘가에 크라함놈이 있을거다."
크라함. 놈은 여전히 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이 요새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여기는 게 합당 할 터.
철그럭.
장검손잡이를 매만졌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진다.
"놈과 전투한 뒤. 아마도 나는 죽겠지."
나는 크라함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승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크라함과 싸울 때 나는 유물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그 유물 사용 의 여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엘릭서가 필요한데….
그 엘릭서가 내 수중에는 없으니까.
마이사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엘릭서를 소모해버렸으니까.
유물을 활성화 하는 순간, 내 죽음은 확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삶에 미련이 없는 거, 마이사뿐 만이 아닌지도 모르겠어."
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였음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딴 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어쩌면 나 또한 지쳐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꽤나 오래전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이후 항상 피를 묻히고 살아왔다.
내 정신이 마모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마이사를 살린 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나 또한 생에는 미련이 없으니 , 차라리 아직 젊어 장래가 창창한 마이사를 살리는 게 더 낫다고 여겼던 걸지도.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엘릭서는 없고, 내 죽음 은 확정되어 있으니 .
뒤늦게 생각해봐야 바뀌는 것도 없다.
다만, 끝까지 전력을 다해 전투에 참여할 뿐.
내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전 방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전진 준비!
마이사의 목소리가 통신수정구를 울렸다. 그녀의 명령이 아군의 통신 망을 타고 전군에 전파되어간다.
부우우우우우-.
직후 전장 곳곳에서 길게 울리는 뿔피리 소리.
"전진 준비! 전진을 준비하라!"
"대형 갖춰!"
"간격을 맞춰라! 곧 전진할 것이 다! 전투 준비하고 긴장을 풀지 마 라!"
"방패 올려!"
우수수 일어서는 신호기. 목청 높여 휘하 부대들을 다독이는 여러 지휘관들. 삐그덕 거리며 도열하는 공성장비들.
그렇게 연합군이 공성전 준비를 모두 갖춘 직후.
- 전진! 전진하라!
마이사의 전진명령이 떨어졌다.
부우-. 부우우우우우-.
뿔피리소리가 다시금 길게 울리고, 신호기의 색깔이 바뀌며 병사들 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제 슬슬 시작인가.
"가자."
철컹.
나는 투구의 바이저를 닫고는 전투마 위에 올라탔다.
내가 약보로 앞으로 나아가고, 그런 내 뒤를 기사단들이 뒤따른다.
바야흐로 마지막 전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