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마이사의 몸에서 황금색 광채가 일기 시작한다. 직후 점차 회복해가는 그녀의 몸.
혈색이 점차 되돌아오고 있다. 차가워져가던 그녀의 몸에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미약했던 심장의 박동 또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건강을 되찾은 마이사.
그녀는 저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화로이 잠들어있다.
"아아…."
그리고 니디아는 한탄했다.
"정말 엘릭서를 사용해버리다 니… 무슨 생각인가요, 한지훈 씨…!"
그녀는 허탈한 얼굴로 내게 그리 물었다.
그에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다."
나도 왜 마이사에게 엘릭서를 사용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확신하건데, 내 성격은 특별히 이타적이지 않다.
남들만큼 이기적이고, 남들만큼 주변의 불행해 안타까워한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그것이 나란 인간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나는 마이사를 살리기 위해, 내 예비목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엘릭서를 사용해버렸다.
어째서 일까?
크라함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엘릭서가 없다면 전투 뒤 나는 확실히 죽게 될 텐데.
잠시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 던 니디아.
그녀가 문득 내게 물었다.
"한지훈 씨, 혹시 마이사를 사랑 하시나요?"
"뭐?"
이게 뭔 개소리야.
내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에도 불 구, 니디아가 이어 말한다.
"엘릭서마저 사용해가며 살렸잖아요. 그만큼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니디아의 말을 듣고는, 시선을 내려 잠들어있는 마이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온한 안색의 그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마이사의 얼굴을 찬찬히 살 펴본 후.
나는 픽 웃으며 단언했다.
"아니. 그런 감정은 전혀 안 느껴지는데 ."
"그럼 어째서 마이사를 살린 거예요?"
"나도 모른다니까."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음에도. 이성 간의 특별한 감정은 별로 느껴 지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보아왔던 마이사의 평온한 얼굴에 안도했을 뿐.
나는 히죽 웃었다.
"어쩌면, 정말 내 자식처럼 여겼 던 것일 수도 있지."
"자식이요?"
"예전에 내가 양녀로 받아들였었 잖아."
미래에 활약할 인재를 미리 영입 해내 아래에 두기 위한 위장신분.
마이사를 양녀로 받아들였던 것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꽤나 정이든 듯하다.
깊은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녀에게 엘릭서를 먹였으니까.
나는 마이사를 바닥에 뉘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전투가 끝난 것일까.
저 멀리까지 암흑기사들을 추격 했던 엘프 전사들이 하나둘 귀환해 오고 있다.
엘프전사들을 이끌던 인물, 엘븐 가디언 타냐가 니디아 곁으로 와 보고했다.
"여왕님, 암흑기사들과의 전투가 끝났습니다. 추격하던 놈들 중 천여 명 가량을 사살했고, 나머지는 도주 했습니다. 전멸시키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암흑기사와 키메라의 수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게다가 지금은 밤이에요. 추격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수고했어요, 타냐."
"감사합니다. 여왕님."
타냐가 고개를 푹 숙여 목례한다. 니디아가 바닥에 누워있는 마이 사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타냐. 여기 마이사 슈베츠를 치료천막으로 옮겨줄래요? 그리고 전 장정리도 해주시고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여왕님."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군의관을 붙여두세요. 호 위병력도 충분히 배치하고요. 모처럼 살린 마이사에요. 다시 죽게 할 수는 없지요."
엘프여왕 니디아의 명령에 타냐 가 움직였다.
그녀가 바닥에 누워있는 마이사 를 안아들고 다른 엘프 전사들이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적의 야습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엘릭서 하나를 소모했고, 마이사를 구했다.
후회는 없다.
마이사는 꿈을 꿨다.
가끔씩 꾸는 꿈이었다.
자신의 고국 슈베츠가 성세했을 무렵. 아직 연방의 침공을 받기 이전 평화로울 적의 꿈.
꿈속의 마이사는 슈베츠 왕궁 알현실에 있다.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운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충직한 왕국의 신하들. 곳곳을 돌아다니는 익숙한 얼굴의 시녀와 시종들.
알현실 곳곳에는 커다란 슈베츠 국 국기와 왕가의 깃발이 펄럭이고, 알현실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의 표정에는 온화와 평화가 가득했다.
현재의 삭막한 모습과는 달리, 활기가 가득 찼던 과거 슈베츠 왕 궁의 모습.
마이사는 시선을 돌려 알현실 저 너머, 기다란 붉은색 카펫의 끄트머 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왕좌가 자리해있었고.
마침내 볼 수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그녀의 부모.
슈베츠 왕국의 국왕인 아르고안 덴버 슈베츠와, 그의 부인인 뮤제 울리 엘.
그들의 모습이 시야 속에 잡혔다.
그들을 발견한 마이사는 주저 없이 달려가 그들을 껴안았다. 뮤제가 웃었다.
"어머, 마이사. 얘는 참. 몸은 다 컸는데 행동은 아직 애구나. 이렇게 어리광 피우다니."
"귀여운 게 보기좋지 않소, 부인?"
"그러게요. 마이사를 보니 아직 어렸을 적 여보가 생각나네요. 매일 같이 방에서 울먹거리던 걸 달래주 느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흐음! 흠!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지."
마이사는 부모님을 껴안았던 팔을 풀고,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들 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 기억 속에 선명한 이들이다.
듬직한 아버지이자, 근엄한 분위기를 품은 슈베츠 왕국의 국왕.
아르고안 덴버 슈베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어머니이자, 부드러운 분위기로 자신과 왕궁을 살피던 슈베츠의 왕비.
뮤제 울리엘.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들의 모습 이, 꿈속에서나마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울컥.
마이사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새어나온 물방울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에 손수건을 꺼내 마이사의 눈가를 닦아주는 뮤제.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무언가 힘든 일이 있었니, 마이 사?"
마이사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곳이 꿈속임을 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이런 꿈을 꾸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 또한 알 고있다.
이 꿈은 단순한 심적 도피에 불과하다.
삭막하고도 치열한 현실에서 도망쳐, 자신이 가장 그리워하던 장소 를 꿈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싱긋 웃는 뮤제.
"마이사."
그녀는 꼼꼼히 마이사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손수건을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녀가 이어 말한다.
"외롭고 힘들어서 괴롭니?"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뮤제와 아르고아는 실체 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꿈속상상에 불과한 인물들일 뿐.
그래서일까. 그들은 마이사가 어째서 눈물을 보였는지 알고있다.
뮤제가 나직이 이어 말한다.
"힘들었을 거야. 가족 없이, 아무런 연고 없이 긴 시간을 홀로 버텼 으니까."
마이사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 청했다.
"하지만 걱정 마렴. 언젠가, 네가 의지하고 함께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더 이상 외롭고 힘 겨워하지 않게 되겠지."
"의지할 만한 사람. 그게 누구죠? 어머니."
"글쎄? 마이사, 네 근처에 있지 않을까?"
뮤제는 시선을 돌려 곁에서있는 아르고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방긋 미소짓는다.
"내가 아르고아를 만나고 의지하 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르고아 도 내게 기대었던 것처럼. 너 또한 영혼의 단짝을 찾을 수 있을거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네 연인을 찾으렴."
"… 연인이라. 그럴 만한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어머니."
"이런. 아직 어려서 자기 감정조 차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하지만 곧 이야, 마이사. 너도 네 감정을 눈치 챌 때가 올거야. 그때가 된다면…."
그녀가 말꼬리를 늘림과 동시, 마이사의 시야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환한 빛으로 뒤덮여가는 그녀의 시야.
뮤제와 아르고아의 모습 또한 빛 무리에 뒤덮여 흐릿해진다.
마이사는 이 꿈이 끝나고 깨어날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이내 곧 완전히 백색으로 물든 시야 속.
뮤제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린다.
"그때가 된다면 주저하지 마렴."
마이사는 눈을 떴다.
"일어났냐."
마이사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 속에 잡힌 것은 익숙한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아니, 청년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30대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완전한 청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눈빛은 진중했으며 분위기 또한 무겁다.
한지훈의 외모는 처음 보았을 때 와 달라진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상위차원에서 온 존재이기에, 신체의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것일까?
마이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지훈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 몸은 좀 괜찮냐?"
"내 몸…."
한지훈의 물음에, 마이사는 자신 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터인데, 몸 상태는 더 없이 좋았다.
정신은 또렷했고, 몸 또한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온몸에 활기가 돌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만함이 그녀의 심상을 가득 채웠다.
어째서 이토록 쾌적한 몸 상태를 가지게 된 것인지.
마치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
한지훈이 픽 웃으며 중얼거린다.
"멀쩡해 보이네. 다행이야."
"내가 누워있는지 얼마나 되었 지?"
"대충 반나절 정도."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아무리 포션을 사용했다 한들 하루는 꼬박 치료했어야 할 중상이었는데 ."
"포션…. 음, 뭐 그렇지. 네 신체 가 생각보다 튼튼한 거 아니겠어?"
마이사는 눈가를 찌푸렸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한지훈이 포션에 관해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둔 기색이다. 그녀는 그에 대해 따지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나저나 무슨 슬픈 꿈이라도 꿨냐? 왜 울었던 거야?"
"어?"
이어진 한지훈의 말에 관심을 돌 릴 수밖에 없었다.
"너, 자고 있을 때 울고있었어."
마이사는 자신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방금 꿨던 꿈 때문이었으 리라.
한지훈이 클클 웃으며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든다.
"가만있어봐. 닦아줄게."
한지훈이 손수건을 내밀어 마이 사의 눈가를 훔쳤다. 쉽사리 닦여나 가는 그녀가 흘린 눈물. 그에 마이 사는,
"아하하하!"
뜬금없이 웃고 말았다.
한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웃냐? 갑자기 미친 것처럼."
"아니, 방금 전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라… 아무것도 아니다. 한지
"이상한 녀석이야."
한지훈이 툴툴거리며 손수건을 제품속에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이사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 한지훈이 자신의 눈가를 닦아줄 때. 마이사는 꿈속 어머니, 뮤제와 한지훈이 겹쳐보였다.
어린 자신을 항상 달래주던 어머니. 그녀와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이사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좋아, 한지훈. 내가 누워있는 동안 많은 점이 바뀌었을거야. 그렇지?"
"뭐. 그렇지. 적의 야습이 꽤나 치명적이었으니까. 마이사 너야 어떻게 목숨을 건졌지만. 꽤 많은 고위 군관들이 죽거나 다쳤어."
"이렇게 누워있을 틈이 없겠네."
마이사는 침대에서 내려오고, 신발을 챙겨 신었다. 외투 또한 걸쳤다. 그녀가 한지훈에게 요청한다.
"먼저 긴급회의를 열어야겠어. 일단 사령부 막사로 가자.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해야 해."
그녀는 다시금 전장으로 복귀했다.
마이사가 천막 밖으로 걸어나가고, 한지훈이 터덜터덜 그녀의 뒤를 따른다.
밖에는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