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369화 (369/390)

369화.

"놈들이 북부대륙에 상륙했군."

크라함이 어둑한 지하계단을 걸 어내려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고도 긴 지하계단이었다.

이곳은 북부대륙 최북단에 자리 한 요새유적, 윈터아르비엔의 지하.

지금 크라함은 숨겨져 있던 통로 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곧 놈이 이 요새에 당도할 터.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놔야겠지."

저벅, 저벅, 저벅.

크라함은 계속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기나긴 지하계단이 끝나고, 커다란 홀이 그 의 앞에 나타났다.

번쩍!

그가 홀에 당도하자, 벽면과 천장에 달려있는 마나등이 일제히 점멸한다.

마나등의 색은 창백한 푸른색.

무기질적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청색 조명이 지하공간을 가득 메운다.

크라함이 시선을 돌려, 홀의 끝에 자리해있는 하나의 문을 바라본다.

가히 성문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청색의 반투명한 수정구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반투명한 문 너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크라함이 그 문을 바라보며 나직 이중얼거린다.

"이 앞에 시스템이 있다."

그는 서슴없이 걸어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문을 짚었다.

그러자,

- 띠링!

크라함의 귓가를 때리는 알림음 소리.

그의 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유저가 아닙니다.]

[접근권한이 없습니다.]

떠오른 홀로그램의 문자는 크라 함조차 모르는 종류의 문자였다.

이 세계의 고대 문자부터 현재 쓰이는 마나어까지, 모든 문자와 언어를 취하고 학습한 그조차 모르는 문자라니.

분명 타 세상의 언어로 쓰여져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크라함 또한 나름의 격을 얻었기 때문일까.

그는 홀로그램의 내용을 직감적 으로 알 수 있었다.

"접근권한이 없다. 그리고 유저가 아니다…. 필시 한지훈이 지닌 '이름 없는 별'의 격이 필요하다는 것 이겠지."

크라함이 스르륵, 손을 내린다.

저 수정으로 이루어진 문 뒤에 시스템의 중추이자, 시나리오의 완 결점이 있다.

그곳은 오직 이 세상의 주인공, '이름 없는 별'만이 입장 가능한 공간.

아직 한스의 격을 흡수했을 뿐, 한지훈의 격을 취하지 못한 크라함 에게 있어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할 일 이다.

"한지훈. 놈이 이곳에 당도하기만 한다면, 녀석의 격을 빼앗고 시스템 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이 공간의 열쇠는 한지훈 그 자체였다.

그가 이 지하공간에 도착한다면, 그리하여 크라함이 '이름 없는 별' 의 격을 빼앗아 취한다면.

비로소 크라함은 완전한 초월자 가 되어 시스템의 공간에 입장할 수 있으리라.

그는 품속에서 세계검을 뽑아든다.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암흑색 장검이 손에 쥐어진다.

"놈의 격을 빼앗고 신세계의 신 이 되어 ,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되 리라!"

그가 세계검으로 지면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한다. 암흑색 마법진 이 지하 홀 바닥 전체에 아로새겨 졌다.

크라함. 그는 한지훈이 반드시 와야 하는 이 공간, 시스템의 중추 앞에서 그를 기다릴 심산이다.

시이한 검은색 기운이 지하공간 전체를 그득 메워간다.

눈이 펑펑 내린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눈들 이하늘하늘한 공기를 타고 날아들 어, 내 투구 위에 안착했다.

투구와 어깨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인다.

후드득.

나는 몸을 털어 몸에 붙은 눈사 라기들을 털어냈다. 시선을 들어올 려 전방을 바라본다.

작게 중얼거렸다.

"눈 더럽게 많이 내리네."

시야는 온통 백색 일색이었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비처럼 쏟 아져 내리고, 지상에는 새하얀 설원 지대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 뒤를 따라오는 제1군의 행군행렬이 있다.

나는 잠시 행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살피고는, 안도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사기는 문제가 없어.'

병사들의 상태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없었고, 움직임 또한 굼뜨지 않았다. 이런 춥디추운 오지를 행군함에도 전혀 사기가 하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음이 라.

'먼저 장비.'

병사들 전부가 방한력 높은 전투 복을 입고 있다. 설원의 혹한에 대비해, 안감을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두터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것 이다.

더해 그들이 쥐고 있는 검과 창 등 병장기들 또한 몹시 우수했다.

모두 내 영지, 루벤에서 만든 드워프제 보급 병장기들이었다.

우수한 철광석을 사용해 드워프 들이 양산해낸 훌륭한 품질의 검과 창, 활들.

어디 그뿐인가?

당장 시야에 보이지는 않지만, 흑마법사들에 대항할 아티팩트 병 기 또한 충분히 보급했다.

기사들에게는 흑마나를 정화할 수 있는 아티팩트 기병창들을 보급 했으며, 발리스타에 사용할 아티팩트 투사체 또한 대량으로 갖춰놨다.

'그리고 음식과 기타 물자.'

식량과 땔감 등 부가적인 물자들 또한 풍족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엘프가 있는 중앙대륙에서 이곳 북부대륙으로 막대한 양의 식량과 땔감, 건초 따 위가 수송되고 있다.

덕분에 병사들은 이런 오지에서 도 배불리 먹고, 걱정 없이 불을 쬐며 온기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지금 연합의 원정군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행군을 실 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에 더해, 그들의 사기가 높은 또 하나의 이유.'

나는 병사들의 눈빛을 주시했다.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자부심.'

병사들의 눈빛에는 온통 자부심 이 서려있다.

각국에서 차출 받아 이자리에 있는 연합의 병사들.

본디 그들은 각 나라의 방위와 치안을 담당했다.

마물을 소탕해 국민의 안정을 수 호하며, 외적을 물리쳐 국토를 지킨다.

헌신적이고도 명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그들의 주적은 같은 인간들이었다.

나는 과거 내 휘하 병사였던 카일이 공국전쟁 당시 했던 말을 떠 올려본다.

- 칼로 베고, 창으로 꿰뚫고, 불에 태워버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간을 죽이려합니다. 정말 끔찍한 일 아닙니까?

- 고작 땅덩어리 차지하려고,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이게 같은 사람새끼가 할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헤치고 죽 인다. 땅 한 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동일한 인류끼리 서로 창칼을 들이미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에 싸울 대상은 인류가 아니다.

흑마법사, 그리고 놈들이 다루는 괴물의 무리다.

전 인류 공통의 적을 상대해, 지 성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몸소 참전한 그들이다.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욱 깊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해 그들을 지휘하는 인물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나, 한지훈 라이젠이다.

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빛을 읽었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어려있는 감정을 읽어냈다.

'존경과 경외.'

그들의 눈빛 속에는 하나같이나 를 향한 경외, 그리고 선망이 자리 해 있었다.

믿음직한 지휘관이자, 위대한 영웅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

저들은 나를 믿고 있다.

그 어떤 어려운 전장에서도 기어 코 승리를 쟁취해내는 나, 한지훈 라이젠을 말이다.

나 또한 저들의 믿음에 보답해줘 야겠지.

그렇게 내가 병사들의 시선을 담 담히 받아들이고 있을 때였다.

"표정이 묘하네요. 한지훈 씨.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긴장이라도 하신 건가요?"

"니 디아."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내 옆에서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직접 참전할 생각인가? 위험할 텐데."

"이번 전쟁에 저희 엘프의 엘븐 가디언 모두가 참전했어요. 그들의 여왕인 제가 중앙대륙에 처박혀있어서는 안 돼죠. 그렇지 않아요?"

니디아와 그녀가 이끄는 엘븐 가디언들 모두가 이번 전쟁에 참여했다.

보급과 정보지원에 집중하느라 많은 수의 엘프전사를 파견하지 못 한 만큼, 그들 세력의 최고전력을 모두 이번 전장에 투입한 것이다.

니디아는 픽 웃는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어요. 막다른 길이지요. 그러니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투자함이 맞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만약 이번 전쟁에서 패배해, 크 라함이 진정한 초월자이자 제대로 된 신격을 얻게 된다면.

전세계가 흑마법사의 지배 아래 로 떨어지고 만다.

때문에 니디아도, 그리고 제국과 슈베츠를 비롯한 다른 인간 국가들도.

모든 여력을 이번 원정에 투입하고 있다.

흑마법사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온 세상 국가와 문명이 사 라질 것이고.

모든 지성체는 그들의 노예나 실험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북부대륙 원정. 사실상 모든 지성체 세력이 가진 여력을 극한으로 뽑아내 실행한 원정이다.

그렇기에 이런 대규모 병력을 파 병할 수 있었음이라.

그렇게 내가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한지훈 씨."

문득 니디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예정된 멸망. 예전에 제가 언급 한 적이 있었지요."

"그렇지."

니디아는 몇 번인가 예정된 멸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 의미를 자세히는 모른다. 그녀가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으 니까.

하지만 곧 마지막 전쟁이 다가와 서인가.

그녀는 예의 '예정된 멸망'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듯하다.

"한지훈 씨.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어요."

사박, 사박.

그녀가 눈길을 사뿐히 밟으며 걸 어갔다. 나 또한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인간은 채 백 년을 살지 못해 요. 오러를 깨우치고, 마나를 다루는 기사와 마법사 또한 그 수명이 최대 삼백에 불과하지요. 장수종인 저희 엘프 또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천 년 이상을 살지 못하고요."

그녀는 수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무엇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 는, 제한된 시간.

"생명체뿐만이 아니에요. 집단이 나이념 또한 마찬가지이죠. 인간의 왕국 대다수는 수백 년이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세력을 이룬 대제국 이라 한들 수천 년을 버티지 못해 요. '영원'의 발전과 존속이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에요."

니디아가 고개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친다.

"일개 지성체부터 커다란 대륙까 지. 모든 물질과 이념에는 수명이 있어요. 그리고 그 수명은, 이 세상 과 차원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차원에도 수명이 있다고?"

"네. 그리고 저희의 차원 또한, 수명이 다 되어 곧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지요."

차원의 수명이 다 되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인간의 감각 으로는 영겁에 가깝게 느껴지는 기 나긴 시간일 터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한지훈 씨가 계시는 상위차원과 달리, 이곳 하위차원은 창조된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세상의 창조 주이신 엘로힘 또한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었고요."

엘로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리를 비웠다. 다른 세상을 창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주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주인 없는 세상은 조금씩 삐걱 거리다가, 언젠가는 소멸하고 말지 요. 흑마법사가 다루는 흑마나. 그것은 방치된 세상의 균열로 인해 만들어진 공허의 침식현상이에요.

창조주가 관리하는 세상이라면 흑 마나 따위 있지 않지요."

소멸을 목전에 둘 정도로, 아주 오랜 기간 창조주에게 외면받아 방 치된 것이다.

"한지훈 씨. 멸망해가는 차원이 멸망을 피하고 존속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문득 그녀가 그리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답을 알려주었다.

"신. 신이 필요해요. 지성체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위대한 신이. 신이 이 차원을 관리해 수명을 연장해줘야 하는 거예요."

"신이라… 그럼."

"네. 한지훈 씨가 신이 되어야 하는 거죠. 위대한 엘로힘이 이 세상에 내려보낸 마지막 기회. 자신의 대리자로 삼은 상위차원의 인물.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지닌 자. 그것이 바로 한지훈 씨니까요."

니디아의 말을 들은 나는 놀라지 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피식 웃어넘겼을 뿐.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구에 있을 적, 내가 한 일이라 고는 그저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 종일 게임에 몰입했을 뿐이었다.

헌데 지금 와서 살펴보니 스케일 이 꽤나 거대하다.

방구석 폐인이던 내가 알고 보니 신이 점지한 자신의 후계자이며, 시스템은 그런 나에게 신격을 부여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니.

"신… 엘로힘도 참 이해가 안 되는구만. 자신의 후계자를 게임 따위 로 정하다니 말이야."

"위대한 존재의 생각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뭐, 예정된 멸망이라. 신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바뀐 건 없으니까."

그렇다. 모처럼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한들, 바뀐 건 그 무엇도 없다.

이 세상이 멸망이 예정되어 있으 며, 상위차원의 존재인 내가 신이 되어야 존속 가능하단 이야기.

다소 흥미롭지만 그저 그뿐.

내가 승리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 중단 한 줄의 덧붙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

나는 시선을 돌려 북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저 멀리, 머나먼 하얀색 지평선과 눈보라로 흐릿한 시야 너머. 어렴풋이 보인다.

"윈터아르비엔."

시스템의 중추가 있는 장소. 커다란 요새 유적지.

그곳이 바로 앞 목전이다. 고작 하루 정도의 행군거리만이 남아있는 상황.

"내일. 결판이 날거야."

그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크라함을 죽이고 모든 유물을 모아 시스템의 인증을 받는다면.

시나리오가 끝나게 된다.

"퀘스트창."

나는 오랜만에 퀘스트창을 띄워 올려본다.

- 띠링!

알림음과 함께 떠오르는 홀로그램.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의 완성이 머지않았다.

나는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 간다.

하얀색 눈보라를 헤치며, 내가 이끄는 군대가 전진해갔다.

윈터아르비엔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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