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보고 드립니다! 총사령 각하!"
척. 군막 내부로 들어온 한 군관 이 절도 있게 경례한다. 이어 보고 한다.
"잔존 포식자 97체를 구축했으 며, 지금은 대지 정화작업에 착수 중입니다. 반나절 이내에 완료될 예정입니다."
"수고했다. 군관."
마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에 응했다. 그녀가 군관에게 물었다.
"한지훈은? 어찌되었지?"
포식자와의 전투 도중 한지훈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유물로 잠깐 이나마 신적인 힘을 발휘했지만, 결국 신체가 유물의 힘을 이기지 못 하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지금 마이사는 그 한지훈의 상태 를 묻고 있다.
군관이 대답한다.
"한지훈 의장합하께서는 지금 의무막사에 계십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만, 엘릭서를 복용했기에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깨어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선례를 살펴볼 때, 약 일주일 가량 걸리리라 예상됩니다."
"그래. 그럼 편히 쉬도록, 군관. 승전을 축하하며 연회를 열어도 좋다. 병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풀어 주고."
"감사합니다! 총사령 각하!"
"그럼 나가보게."
펄럭.
보고를 마친 군관이 군막 밖으로 빠져나가고, 마이사는 외투를 챙겨 입었다. 멋들어진 장성용 정복이었다.
옷차림을 갖춰 입은 그녀는 사령 부 군막 내부를 나섰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가는 마 이사 슈베츠. 그녀가 주변 막사의 모습을 살펴보며 피식 웃었다.
"연회를 허락할 필요도 없었군. 알아서 잘 놀고 있었어."
군막 밖으로 나서자 한창 병사들 이 술과 고기를 나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병사들에게 축하파티를 지시하기 이전에, 다른 장성들이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돌린 것이다.
마이사는 주변을 살피며 계속해 길을 걸었다.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병사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기쁨과 뿌듯함의 기색이 어려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류의 적을 상대해 결국 승리 해냈으니 .'
마이사는 발걸음을 옮긴다. 드문드문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오기도했다.
"그러니까, 그때! 한지훈이 포식 자를 단칼에…."
"맙소사! 대단하군."
"자네는 한지훈 합하의 무위를 보지 못했나?"
"보지 못했다네. 나는 예비대여 서, 아군 뒤통수만 보다 끝나지 않았는가? 선두에 섰던 이들은 많이 봤다는군."
"정말 신적인 무력이었네. 어찌 그 커다란 괴물을 상대로, 인간 이…."
병사들이 떠드는 내용은 당연하 게도 한지훈의 활약이었다.
전장에서 내내 강력한 무위를 뽐낸 한지훈이다. 유물을 사용한 그의 무력은 대단했고, 일검으로 포식자 를 가르고 괴물을 쓰러뜨렸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목격한 이들 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 병사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한지훈의 무력에 감탄하고, 또 경외하는 병사들.
저들은 알까?
한지훈은 자신의 생명을 소모해 가며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마이사가 후 한숨을 내쉰다.
"남아있는 엘릭서는 이제 단 한병밖에 없어."
강대한 유물의 힘을 한지훈의 신체가 온전히 감당 할 수 없기에, 매번 엘릭서를 섭취해 목숨을 보전해 왔다.
그리고 남아있는 엘릭서의 수는, 고작 한 병.
마이사는 생각한다.
'한지훈이 제정신을 차린 뒤에, 유물을 활성화 하지 말라고 권해볼 까.'
엘릭서는 그 어떤 부상이나 병마 도 치료하는 만능의 물약. 하나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상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지훈은 연합의 의장. 그가 없다면 연합도 없고, 연합이 없으면 결국 흑마법사들의 농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러니, 한지훈의 목숨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해야 한다.
잠시 생각을 이어가는 마이사.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헛수고야. 한지훈 그 녀석 이유물 사용을 꺼릴 위인이 아니 지."
한지훈이란 인간은 항상 그랬다.
전투에서 휘하 병사들의 희생이 생길 것 같을 때, 단 한 명의 병사 라도 더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앞장서 군을 이끌었다.
그런 한지훈이다.
유물을 사용해 전쟁에서 이기고 아군의 손실을 줄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마지막 엘릭서마저 사용 해버릴 인간.
그러니 차마, 자제하란 이야길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니 마이사는 금세 의료천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사령 각하를 뵙습니다!"
척 경례하는 보초 기사.
내부에 있는 인물의 신분이 신분 인 만큼, 보초를 서는 이가 병사가 아닌 기사였다.
마이사는 경례를 받으며 용건을 밝혔다.
"한지훈의 얼굴을 보러왔다."
"의장합하께선 아직 의식이 없으 신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다. 얼굴만 보러 왔을 뿐 이니까."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수고하거라."
펄럭.
그녀는 천막을 걷어 내부로 들어 섰다.
내부에는 하나의 침상만이 자리 해있다. 마이사는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시선을 내려 침상 위를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의 사내.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마이사가 피식 웃는다.
"나는 이렇게 컸는데 . 너는 처음 봤을 때와 다름이 없구나."
지금의 나이가 30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하등 달라진 것이 없다.
마이사는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서 한지훈을 바라보았다.
한지훈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 한 상황이었기에 대화는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사는 작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칠칠치 못한 녀석."
그녀가 손을 뻗어 한지훈의 머리 를 쓰다듬었다. 푸석푸석한 머릿결 의 질감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친다.
"너는 언제나 그랬어. 자신의 생명보다 전투의 승리를, 그리고 아군 의 생명만을 생각했지."
독백하는 마이사.
그녀는 한지훈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그만두고는, 시선을 내려 그의 얼굴을 다시금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야."
이미 몇 번이나 한지훈이 정신을 잃고 병상에서 신음하는 것을 지켜 봤던 그녀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한지훈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감정이, 그리고 영 문 모를 애틋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소망했다.
강해지고 싶다고.
물론 육체적인 강함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뛰어난 지 성.
압도적인 군략으로 수월하게 적을 제압하고, 아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한지훈, 나는 강해졌다."
그녀는 그 능력을 실제로 쟁취했다.
여러 번의 군 지휘경험, 그리고 본인의 노력과 의지가 겹쳐, 그녀의 잠재력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사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그리하여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니 .
당당히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네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지금보다도 더더욱 강해질거야. 그래서 네 녀석이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게 만들거라고."
한지훈이 유물을 사용하지 않게 하려면?
간단하다.
마이사 자신이 강해지면 된다.
그리하여 그가 유물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병력을 지휘해 적을 압도적으로 섬멸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말하고, 피식 웃는 마이사.
"… 정신병자도 아니고. 의식 없는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이라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것 일까.
그녀는 이자리에 다른 인물이 없다는 것에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그녀는 몰랐다.
이자리에는 마이사, 그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뭘요.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꽤나 의젓한걸요. 마이사 씨?"
갑작스레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전의 꼬맹이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요."
싱그러움을 한껏 담아 청아한 목소리.
마이사는 뒤돌아서며 눈썹을 찌푸렸다.
"니디아.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 지?"
그녀의 배후에서있던 것은 다름 아닌 니디아, 엘프 여왕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니디아가 한껏 이 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컸는데, 너는 처음 봤을 때와 다름이 없구나?. 부터 요."
"처음부터 있었다는 소리로군."
마이사의 얼굴 표정이 더욱 찌푸 려진다.
분명 자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아무도 없던 의료천막 내부였다.
설마 은신마법 따위를 사용해 모습을 숨겼던 것일까?
뭐, 지금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자신이 창피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용건이었으니 .
마이사는 니디아를 노려본다.
"여기는 무슨 볼일이지? 중앙대륙에서 한창 엘프를 통솔하고 있어 야 할 엘프 여왕께서 말이야."
그녀 날 선 목소리로 니디아를 추궁했다.
어제부터일까? 마이사는 니디아 에게 영문 모를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해 못할 일이었다.
분명 니디아는 연합의 중추중 하나이자, 자신과 한지훈의 은인일 터 인데. 어째서 그녀에게 적의를 품게 되는 것일까.
마이사는 그이유를 이해하지 못 했지만, 니디아는 그이유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서글서글하게 받아 넘기는 니디아였다.
"어머. 바쁜 제가 기껏 짬 내서 병문안을 왔는데 .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시는 건가요?"
"병문안이라니. 그럴 리가."
코웃음 치는 마이사.
그녀가 손가락으로 니디아의 왼손을 가리킨다.
"왼손에 들린 그 서류뭉치를 보 면 목적은 다른 것 같은데."
"뭐… 겸사겸사에요."
니디아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어 말했다.
"알아낸 정보를 한지훈 씨에게 알려주려고 왔는데 . 정작 정보를 받을 한지훈은 몸져누워있지 말이에 요'?"
"정보라…."
니디아의 용건을 들은 마이사.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을 뿐, 니디아가 가져온 정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연합의 정보부문을 맡은 니디아가 통신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와서 전달하려 한 정보다.
분명 극도로 중요하고, 철저히 기밀을 지켜야 할 내용일 터.
의장도 아닌 자신이 굳이 알려 해서는 안된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허나 어째서일까.
"마이사 씨. 이걸 한번 봐보시겠 어요?"
니디아는 그 정보를 마이사에게 알려주려 하는 듯싶다.
마이사가 의문을 표한다.
"왜 내게 주지? 한지훈이 깨어난 다면 그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좋지 않나?"
"그가 깨어난 뒤부터 준비한다면 많이 늦고 말거든요. 그만큼 급한 일이에요."
"무슨 일이기에."
"일단 받으세요. 마이사."
니디아는 서류뭉치를 마이사에게 내밀고, 마이사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바스락.
잠시 서류를 훑어보는 마이사.
"이해가 안 가는데 ."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흑마법사 놈들이 북부대륙을 노 린다고? 어째서?"
서류는 다름 아닌 흑마법사들의 다음 행동을 파악한 서류였다.
지금 흑마법사들은 북부대륙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
놈들은 모든 인류와 지성체를 제 압해 결국 흑마법사들의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
이번 남부대륙 전투처럼, 타 대륙을 침공하는 일자체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어째서 북부대륙일까?
"그 오지에 뭐가 있다고 가려는 거야?"
북부대륙에는 아무것도 없다.
국가도, 문명도, 인간도.있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설원지 대와 드문드문 자리해있는 과거의 유적지대뿐.
사실상 문명의 불모지.
그 북부대륙을 어째서 손에 넣으 려 하는 것일까. 흑마법사의 움직임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마이사였다.
"마이사 씨. 북부대륙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곳이에요."
그에 니디아가 부연 설명한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나직이 고했다.
"북부대륙에는 '시스템'의 중추가 있어요."
그녀의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 * *
동부대륙, 과거 연방 수도였던 폐허 도시.
그곳의 중심부에는 하나의 커다란 붉은색 수정구가 떠올라있다.
인간 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고도 웅장한 크기를 갖춘 적색 수정구.
그 수정구에서는 검은색 기운이 일렁이고 있다. 흑마나의 파동이었다.
한동안 잠잠히 허공에 떠올라있 던 수정구에, 어느 순간 이변이 일기 시작했다.
콰직! 우드득!
수정구에서 크고 작은 실금이 아 로새겨진다. 이후 균열은 수정구 전체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정구 전체를 균열과 실금이 완전히 뒤덮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찰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쨍그랑!
수정구가 깨어져나간다. 그와 함께 수정구가 품고 있던 거대한 흑 마나는 그대로 주변 사방을 휩쓸었고, 강렬한 파동이 지상을 유린하고 천공을 뒤흔들었다.
후드득, 떨어져내려 지상에 곤두 박질치는 수정구의 파면무리. 그러자 내부에 있던 존재의 모습이 드 러난다.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기른 한 명의 사내다.
전신은 튼튼한 근육이 뒤덮고 있으며, 얼굴은 언뜻 온화하나 그러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가졌다.
한스 요한바르첸. 한지훈의 대적자인 인물.
그의 모습이 깨진 수정구 내부에서 나타난 것이다.
허나 그는 한스 요한바르첸이 아니었다.
"… 오랜만에 느껴보는 건강한 육체로군. 좋아. 아주 좋아."
각성한 한스의 신체를 빼앗은 크 라함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환희를 느끼고 있다.
끝없이 느껴지는 활기. 넘쳐흐르는 생명력. 맥동하는 심장.
푸석푸석해 시체와 다름없던 자신의 본래 몸과 완전히 다른 몸뚱 이다.
크라함은 오랜만에 느껴지는 젊음과 생명의 맥동에 기뻐하고 있다.
"기분이 매우 좋군."
그가 평소 버릇대로, 질척한 미소를 짓는다.
저벅.
부드럽게 하강해 지상을 내려밟는 한스. 아니, 한스의 모습을 빼앗 은 크라함.
그가 지상을 밟자, 화르르르륵!
검은색 불길 수천 개가 그의 앞에 펼쳐지고, 흑마법사들이 도열한다. 휘하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주인 의 등장에 발맞춰 사열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자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 크라함이시여! 새로운 육체 를 얻으신 것을 감축 드리옵나이 다!"
"여기, 종주님의 물품들입니다."
가장 선두에 있던 노쇠한 흑마법사가 검은색 로브와 마법지팡이를 내민다.
크라함은 작게 손짓했다.
펄럭!
그러자 스스로 날아와 그의 몸을 감싸고, 손에 들려지는 로브와 마법 지팡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크라함이나 직이 읊조린다.
"각성한 대적자의 육체를 손에 얻었고, 격과 경지의 향상을 이루었다."
그가 입가를 비틀며 이어 말했다.
"남은 것은 한지훈을 죽여 놈의 격과 운명을 빼앗고, 유물을 모아 시스템의 인증을 받는 것뿐."
그렇다면 그는 엘로힘이 되어 , 이 주인 없는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수 있다.
크라함이 지시한다.
"북부대륙 원정을 실행하라."
크라함이 이끄는 흑마법사의 세력이 일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다음 전장은 하얀색 눈으로 뒤덮 인 세상, 북부대륙이다.
"곧 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시나리오의 끝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