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 드디어 연결되었어!
통신수정구 너머에서 마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것이 냐, 한지훈?! 약 십분간 그대와의 통신이 완전히 차단됐다. 차단이 풀 리니, 갑자기 포식자 수백 개체가 등장했고….
"아무래도 중간에 난입한 크라함 이 나와 그쪽과의 통신을 차단시켜 놨던 것 같은데, 놈이 물러나니 통신망이 회복되었군."
- 크라함! 그자가 전장에 나타났다고? 그게 무슨 일이지?!
크라함이라는 말에 마이사가 반 웅한다.
하긴, 놈은 흑마법사의 세력의 정점이다. 그런 크라함이 직접 전장에 등장했었다 하니 놀랄 수밖에.
나는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 그러니까 크라함이 나와 한스의 전투에 난입했고, 놈이 각성한 한스를 죽이고 그 시체를 취했다는 사실을 밝힐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어 포기했다.
'시간이 없어.'
저 내용을 밝히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 복잡한 상황을 구두로 논리정 연하게 전하는 것은 몹시나 힘든 일이다.
특히나 이런 전장에서는 말이다.
"…그건 나중에 설명해주지. 어차 피 놈은 지금 동부대륙으로 다시 이동한 상태다. 더 이상 이전투에 개입하지 않을거야."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았다.
"마이사. 일단은 저 포식자부터다. 놈들을 처리해야 해."
눈앞의 적에 집중할 것을 당부했을 뿐.
내 말에 그녀가 수긍한다.
- …알았다. 한지훈. 일단 포식자 부터 처리하지. 유물을 사용할 생각 이라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들어올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난장판이 되기 일보 직전인 상태의 전장이 자리해 있다.
- 크오오오오오오!
쿠웅! 쿵! 쿵! 쿵!
하나둘 자세를 추스르고, 전투 전 함성을 지르는 포식자들의 무리.
수백 개체의 괴물이 내지르는 함 성이 이 드넓은 평원 전체를 크게 진동시키고 있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도망치지 마라! 이 쓰레기들아! 놈과 맞서 싸워야…."
"저딴 괴물을 어찌 상대하란 말이냐!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고!"
"으아아아아!"
그리고 겁에 질려 통제가 흐트러 지고 있는 연합의 병사들의 진형이 무너지고 있다.
물경 수백에 달하는 포식자들의 등장에 사기가 나락까지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저 사기를 어떻게든 상승시켜놔 야 이전장을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기를 드높이는 방법이 란 별것 없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
내가 유물을 활성화해 강대한 힘을 보이고, 그리하여 아군에게 승산 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면.
저들은 도주하는 것을 멈추고 다시금 전장에 가세하리라.
나는 양손으로 세계검의 손잡이 를 붙잡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품속에 있는 유물의 힘을 빌려오 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울려온다.
- 반푼이 초월자. 어디 내 힘을 마음껏 써보아라.
- 네놈이 감당하기 힘든 힘이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나보군.
협력하겠다. 내 힘의 일부를 빌려주 지.
두 환상종의 목소리. 리바이어던 과 베히모스의 목소리였다.
- 띠링! 띠링!
직후 내 귓가를 때리는 알림음.
홀로그램 창이 떠오른다.
['아이템 : 리바이어던의 핵'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아이템 : 베히모스의 핵'이 활 성화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유물이 마침내 활성화되었고.
두 유물에서 흘러나온 웅혼한 기운이 흘러 나에게 스며든다.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갱신되어가는 홀로그램 창.
['아이템 : 리바이어던의 핵"그리고 '아이템 : 베히모스의 핵'이 '세계수의 축복'과 반응합니다!]
[아이템 : 리바이어던의 핵"그리고 '아이템 : 베히모스의 핵'이 '엘프 여왕의 가호'와 반응합니다!]
내게 걸려있던 축복이 유물의 활 성화에 반응하고, 그것이 시스템에 의해 정형화되어 나에게 능력을 부여한다.
나는 상향된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신체 능력치가 교정됩니다.]
[근력 600]
[민첩 600]
[내구 600]
[체력 600]
[마나 600]
"모든 능력치 600이라…."
이전에 유물을 활성화했을 때는, 내 전 능력치가 300으로 고정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600이다. 유물을 두 개나 사용했기에 두 배에 달 하는 신체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피식 웃었다.
'유물을 두 개 활성화했다고 능력치가 두 배라니. 나참, 은근히 대충대충인 것 같단 말이야.'
유물이 하나일 때는 300, 두 개 일때는 600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유물을 모은다 면 900에 달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잡생각을 털어내고는, 상향된 힘을 확인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콰드드득.
전신에서 느껴지는 강대하고도 드높은 힘. 충만한 자신감이 차오른다.
"대단해."
마치 신이 된 듯한 느낌이다.
지금이라면 가로막는 적이 무엇 이라도 일격에 베어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만큼 전 능력치 600이 주는 강렬함은 상당했다.
그렇게 내가 상향된 힘을 살피며 감탄하고 있을 때.
- 여유 부릴 시간은 없을 텐데?
초월자.
리바이어던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린다. 그를 뒤따르듯, 베히모스의 음성이 이어 들려온다.
- 유물을 두 개 사용했기에 네놈 의 신체 가동시간에 좀 더 여유가 생겼다만, 그래봤자 30분에 불과하다.
"30분이라. 그동안 내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건가?"
- 그래.
신체 가동시간도 꽤나 늘어난 듯하다.
유물을 한 개 가졌을 때는 10분 밖에 못 버텼다. 두 개를 가지니 30분은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몹시 좋은 소식이다.
유물을 활성화한 채 30분이라.
"포식자들. 제압할 수 있겠네."
비록 전멸을 시키기엔 개체 수가 압도적이긴 하나, 적어도 과반 이상 의 포식자는 섬멸할 자신이 있었다.
나에게는 30분간,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대한 힘이 있으므로.
통신수정구를 집어들고 마이사에 게 알렸다.
"마이사. 유물을 활성화했다. 먼저 군의 통제를 되찾겠다."
- 통제를 되찾겠다니?! 어떻게?
지금 상황은 개판이다.
포식자의 등장에 병사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있다. 제대로 훈련된 기사들 또한, 간간이 뒷걸음질 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즉, 모랄빵이 나버린 것이다.
멀찍이서 바라보는데도 그 정도다.
이후 포식자들이 본격적으로 인간의 방진과 접촉했을 때, 군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사분오열될 터. 이대로라면 아군이 대량학살 당할 뿐이다.
그전에 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통제를 회복하고 방진을 단단히 형성하도록 해야하니.
"내 힘을 과시할거다."
철그럭.
나는 세계검을 집어들었다.
검을 허리춤으로 당기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화르르르륵!
일렁이는 백색 불꽃.
여러 신묘한 기운이 섞여 만들어 진 거대한 힘이 내 세계검의 검신에서린 채 맥동한다.
나는 마이사에게 나직이 알린다.
"내가 날뛰겠다. 알아서 나머지 병력을 지휘해줘."
그녀라면 내가 어떻게 날뛰든, 제대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거다.
나는 눈앞의 적에 집중한다.
콰앙!
지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목표는 내게서 가장 가까운 포식 자놈. 놈이 시선을 돌려 이쪽을 노 려본다.
가소롭다고 느낀 것일까?
- 크오오오오오!
포식자가 포효한다.
지성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저 집채만 한 얼굴에 이쪽을 깔보는 표정이 담겨있다.
하긴 얼마나 우습겠나. 4층짜리 건물에 달하는 자신의 거체에 달려 드는 인간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내가 아닌 저 놈이다.
나는 돌진하는 와중, 진각을 밟 듯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콰아앙!
터져나가는 지면. 그와 함께 반발력으로 도약하는 내 몸뚱아리.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어느새 나는 포식자의 눈높이까지 떠오른 상태.
후욱.
한껏 숨을 토하며, 허리춤으로 당겨놨던 세계검을 크게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수평베기.
파공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백색 검광이 번뜩였을 뿐.
직후, 퍼어어어억!
포식자의 목이 잘려 떨어진다.
쿠우웅! 소리를 내며 지면에 틀어박히는 놈의 모가지. 충격에 흙먼 지가 일고, 녀석의 잘린 목에서는 검은색 핏물이 분수처럼 치솟는다.
후드드득.
역한 핏물이 지면에 비처럼 떨어 져 내린다. 나는 가볍게 지상으로 착지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 한 마리."
여유 부리지 않는다. 30분이 지나 내 능력이 다 할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포식자들을 사냥할 심산 이다.
콰앙!
나는 재차 지면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돌진했다. 다른 포식자를 사냥하기 위함이다.
포식자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괴물이다!"
"도망! 도망쳐!"
병사들이 우르르 도주한다. 슈베 츠군의 병사들이었다.
방금 전.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 져내리는 수백의 포식자들을 목격했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진한 공포의 기색이 어려있다.
그만큼 포식자들의 외양과, 품은 힘은 몹시 괴이했다.
수층짜리 건물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 지면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 검은색 육신. 날카롭게 빛나는 붉은 색 안광.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공포스러 웠다.
그렇기에 지금 병사들은 정예병 신병 할것 없이, 적지 않은 이들이 방진을 이탈하고 있는 상태였다.
"도망치지 마라! 맞서 싸워야 한다!"
"적전도주는 즉결처형이다! 방진 으로 복귀해!"
장교들이 위협적으로 장검을 휘 두르며 병사들의 이탈을 막아내려 한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들의 저지에 도 불구하고 도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생각한다.
'저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 고?!'
도주하던 병사들은 힐끔힐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를 바라본다.
그들의 배후에는 포식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 쿠오오오오오!
놈이 발을 구른다.
퍼어어억!
직후 수십의 병사들이 놈의 발바닥 아래에 깔려 압사되었고, 수백의 병사들이 그 충격에 지면을 굴렀다.
직후 포식자가 그 커다란 상체를 뻗어, 팔로 지면을 훑자.
콰드드드드득!
지면을 구르던 병사 수백이 그대로 치어 쓸려나간다. 땅이 갈려나간 곳에 병사들의 핏물이 스며들어 붉은색으로 화해간다.
병사들은 생각한다.
'저딴 것과 싸우는 것은 개죽음 이야. 나는 살거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것과 싸우고 싶지 않아.'
이전장에 있는 대다수 병사들은 정예였다.
온갖 험한 훈련과 다수의 실전경 험을 거쳐, '쓸 만한' 병사로 완성 된 이들.
그들은 눈앞에 기사들이 랜스차 징을 가해올 때도 방진을 지킬 정도로 용맹했으며, 필요하다면 적진 으로 돌격해 검과 창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적을 상대하며 길러진 것들.
저런 괴물들 앞에서도 평정심을 지킬 수 있는 병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적전도주는 사형임에도, 거리낌 없이 도망치는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곧 발걸음을 멈춰버렸다.
이변이 일기 시작했으므로.
퍼어어어어어억!
커다란 파열음이 들렸다. 마치 거대한 고깃덩이를 짓뭉개버리는 듯한 소리.
도주하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굉음에 고개를 돌려 배후를 바라보았고, 곧.
"… 포식자가!"
"포식자가 목이 잘려 죽었다!"
"저게 무슨 일이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뭉개기 위해 쫓아오던 포식자. 그 괴물의 목 이 순식간에 잘려나간 것이다.
후드드드득.
비처럼 쏟아지는 검은색 핏물.
포식자의 저 커다란 육신이 천천히 쓰러진다.
쿠우우우웅!
커다란 소음과 함께 지면이 울리고, 바람이 불어와 피안개가 조금씩 옅어진다.
그리고 병사들은 피안개를 해치 며 움직이는 어떤 인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를 가진 인물.
그들은 저런 외양을 가진 인물에 대해서 거의 매일같이 소식을 들었 기에, 그의 정체를 쉽사리 깨달을 수 있었다.
"한지훈…! 한지훈 라이젠이다!"
"한지훈 라이젠 의장합하께서 포 식자를 처치하셨다!"
"오오오오오!"
도주하던 병사들이 발걸음을 멈 추고 한지훈을 바라본다.
한지훈 라이젠. 제국의 위대한 전쟁영웅이자 지금은 연합의 의장 으로서 이 연합군의 수장인 인물.
지금 그는 전장의 이곳저곳을 누 비며 포식자들을 처치해가고 있다.
퍼어어억!
그가 도약하고, 커다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터져나오는 굉음.
검은색 피안개가 쉼 없이 터져나 온다. 포식자들의 거체가 우르르 무 너져내린다.
병사들이 한지훈이 움직여왔던 방향을 바라본다. 그리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저 많은 포식자를…!"
그들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경 외가 어린다.
한지훈 라이젠이 온 방향에는 포 식자들의 시체가 이리저리 널브러 져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시야에만 보이는 것이 약 백여 구의 포식자 사체들.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도 저 포식자의 시체가 몹시 많을 것이다.
병사들은 문득, 생각한다.
'한지훈 라이젠이라면, 승리할 수 있다.'
한지훈 라이젠. 그가 누구인가?
그 모든 전장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온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한 영웅.
그런 그가 이곳에서 싸우고 있다. 혼자서 벌써 백여 개, 혹은 그이상에 달하는 포식자를 처치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앞의 적을 두고 도주하고 있다.
놈에게 등까지 보여가며, 심지어 몇몇 병사들은 가진 칼과 창 따위 를 지면에 내던져가면서까지 말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세기의 대영웅과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웠으면서, 적에게 등을 보이 고 도주하다니 말이다.
이래서야 나중에 한지훈과 같은 전장에서 싸웠노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을까.
한지훈의 등장으로 용기가 솟아 나고 공포는 옅어지자, 수치심이 그 들의 심상을 어지럽혔다.
결국 병사들은 하나둘 입을 열어 말한다.
"…복귀해야겠어. 의장합하께서 싸우시는데 이대로 도주할 수는 없지."
"어차피 적전도주는 사형이야."
"한지훈께서 직접 전투하시는데, 그의 앞에서 도주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방진으로 복귀하라!"
도주를 시도하던 병사들이 하나둘 방진으로 돌아와 진형을 재정비 한다. 그들을 지휘하던 장교들은 도 주한 병사들에게 별다른 처벌을 가 하지 않고, 그저 투구 뒤통수를 세 게 때려줄 뿐이었다.
지금, 한지훈이 싸우는 전장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연합군이 다시 통제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