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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60화 (360/390)

360화.

"커헉…!"

나는 충격에 의해 튕겨나가며 크 라함을 노려봤다.

크라함. 놈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진행했지만, 놈은 항상 배후에서 움직였다.

내가 놈의 수하와 싸울 때도, 한스와 전투할 때도, 녀석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일 때도.

크라함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었다.

그런 놈이 어째서, 지금 와서 내 앞에 등장한 것인가.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앙!

내 몸뚱아리가 지면에 처박혀 굴 러댔기 때문에.

흙먼지게 크게 일어나고, 시야가 가려진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올 려 크라함을 노려본다.

여유를 부리는 것일까. 놈은 아직도 제자리에서서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상태.

나는 세계검을 집어들어 검날을 놈에게 향했다.

철그럭. 울리는 쇳소리.

이를 악문다.

'강하다.'

크라함은 강하다.

방금 전 내가 한스에게 가하려 했던 마지막 일격.

대량의 마나를 끌어올려 형성한 오러가 담긴 일격이었다. 당연히 그 일검에 담긴 기세는 결코 하찮지 않았다.

헌데 그런 내 공격을 저토록 손 쉽게 튕겨내버릴 줄이야.

나는 고민했다.

'유물을 활성화할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유물은 두 개. 동시에 활성화한다면 저놈을 이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나는 크라함을 노려보며 고뇌했고, 그런 내 속마음을 마치 간파라도 한 것인가.

- 하찮은 놈. 검을 내려라. 너와 싸울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 뭐?"

- 물론 언젠가는 싸워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싸울 생각이 없다 고 말해야겠군. 한지훈.

무슨 개소리지?

나는 크라함을 노려보고.

크라함은 그러한 내 시선을 담담 히 받아내며, 혹은 무시하며.

고개 돌려 자신의 옆을 본다.

그곳엔 한스가 있었다.

"크으윽…! 크라함! 나를 구해주 러 온 것인가?!"

한스는 자신의 온몸에 난 자상을 틀어잡으며 그리 말했다.

놈의 표정은 고통스러웠으나, 한편으론 안도감이 그득했다.

방금 전 내게 목이 잘릴 뻔했으 나 크라함이 단번에 자신의 구원해 줬다. 압도적인 힘을 보이는 자신의 아군을 목도했으니 저토록 안심할 수밖에.

하지만 그가 안도하기엔 상황이 심상치 않다.

- 그동안 수고했다, 한스. 드디어 세계검을 다루어 네놈에게 걸린 시나리오의 주박을 파훼해 냈더군.

"그렇다. 나는 내 운명을 절삭하고, 오롯이 선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느 정도의 수련만 있다 면 한지훈을 이길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동부대륙으로 돌아가…"

- 그럴 필요는 없다.

크라함이 손날을 세워 수도를 만든다. 로브 안쪽에 숨겨져 있던 앙 상하고도 메마른 팔이 드러난다.

화르륵.

일렁이는 검은색 불길.

"크라함? 지금 뭘 하려는…."

- 네 신체는 내가 잘 사용해주 지. 네놈의 복수 또한 내가 대신 완수하겠다. 그러니….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것일까. 한스의 미간이 험상궂게 일그러 진다. 그리고 직후,

- 죽어라.

한순간이었다.

서걱!

크라함이 수도를 휘둘렀다.

찰나에 불과한 검은색 궤적이 잔 상을 그렸다. 서걱이는 절삭음이 들 리고, 검붉은 핏물이 퍽 튄다.

비틀거리는 한스 요한바르첸.

"커헉…j 어째서… 크라, 함…!"

한스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꺽꺽거린다. 놈이 눈동자를 굴려 마지막으로 크라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당혹과 의혹, 그리고 배신감이라는 감정이 엉망 으로 뒤엉켜있다.

".?.뭐?"

그리고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죽이고 한스를 보호하기 위해 이자리에 크라함이 등장한 줄 알았다.

놈은 인류의 적이자, 흑마법의 종주이며, 한스를 되살려 나를 적대 하도록 만든 이.

기껏 되살려놨던 한스를 내 손에 허무하게 죽도록 방치하진 않으리라. 그리 여겼던 것이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크라함은 내가 아닌 한스를 죽여버렸고.

방금 전까지 나와 전투를 벌였던 한스 요한바르첸은 털썩, 지면에 몸을 뉘었다.

-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한지훈.

잠시간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체 를 바라보고 있던 크라함. 놈이나 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크라함을 예의주시하고. 녀석은 계속해 말을 잇는다.

- 한지훈. 내 목표가 무엇일것 같나?

"네놈의 목표는…."

놈의 질문.

대답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철회하고 대답했다.

"신이 되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잘하면 이번 대화를 통해서, 녀석이 어째서 저런 행동을 벌인 것 인지 알아낼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 으므로.

나직이 입을 연다.

"크라함. 네놈의 목적은 나를 죽 이고 내 격과 영혼을 강탈해서, 이 세상의 신이 되려는 것이겠지. 맞지 않나?"

- 맞다.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 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다.

순순히 긍정하는 크라함.

우우우웅….

크라함이 아공간을 열었다. 허공에 쩌억 벌어지는 검은색 균열.

놈이 지면에 쓰러져있는 한스의 시신을 집어든다.

실 끊긴 인형처럼 딸려오는 한스 요한바르첸의 몸뚱이.

놈의 몸은 많은 피를 흘린 것인 지, 그 색이 꽤나 창백하다.

크라함이 이어 말한다.

-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신이 되기 위해 발악했는지 네놈에게 말한 적이 있을거다. 기억나지 않나? 한지훈.

기억한다.

과거 크라함을 처음으로 죽였을 때. 놈은 꿈속에서 나와 그리 말했었다.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파훼하고, 시나리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다고.

그리고 내 신체와 격이 있다면 시나리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놈의 음울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 내 저주받은 운명을 끊기 위해 뭐든지 다했다. 혹마법을 버리고 백 마법사로서 정점을 차지하기도 했 고. 오직 나와 흑마법사들만 제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워 없애보기도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기 는커녕, 종말을 막지도 못하더군.

그게 한스를 죽이는 이유랑 무슨 상관일까.

나는 놈의 대화를 계속해 들었고, 곧 녀석이 한스를 죽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하지만 네놈이 이 세상에 등장했다. 한지훈, 상위차원의 존재인 네놈이 말이야.

그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다.

일렁이는 붉은색 안광. 언뜻언뜻 보이는 로브후드 안쪽 놈의 얼굴.

녀석의 얼굴 표정은 평온하고도 온화했다.

마치 목적을 거의 다 이루었기 에, 안도한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놈의 계획이 거의 완성에 다달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 한지훈. 네놈의 격과 신체가 있어야만 나는 엘로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거랑 한스를 죽인 거랑은 무슨 관계인데?"

- 간단한 이야기다. 네놈은 상위 차원의 존재. 내가 아무리 흑마법으로 정점의 위치에 도달하든, 세계검을 사용해 내 운명을 개척하든, 네 격을 온전히 삼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각성한 한스의 육신과 영혼이지.

크라함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한스의 시신을 바라본다.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간 것일까.

한스의 육신은 이제 완전히 창백 해져있다. 놈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꼴이 이곳에서도 보일 정도.

크라함이 비릿하게 웃는다.

- 각성한 한스의 육신과 영혼을 취해, 내 신체에 체화시킨다면… 나는 온전히 네 격을 빼앗을 수 있는 기반을 얻게 된다. 한스의 운명은 대적자의 운명. 놈은 이 세상의 주인공인 네놈과 동급의 힘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다.

즉, 놈이 내 격을 온전히 빼앗기 위해서라면 한스가 먼저 각성하고, 그 신체를 빼앗을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한스는 대적자의 별을 가진 이. 놈의 잠재력은 이름 없는 별인 나와 동급.

크라함은 대적자의 별을 타고난 한스를 각성시키고 죽인 뒤, 그 시체를 재료로 자신을 강화할 심산이었다.

- 그리고 나는 각성한 한스의 시 신을 취했고. 이제는 네놈을 죽여 온전히 흡수하는것만이 남았군.

철그럭.

나는 세계검을 곧추세웠다. 크라 함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놈은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 허나 아쉽군. 네놈을 오랜만에 마주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만. 아직 한스의 육신을 내 몸에 체화시키지 못했다. 여기서 네놈을 죽여서는 안 되지. 그렇다면 네 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할 터 이니.

아직도 한껏 여유를 부리며, 차 갑게 식은 한스의 시신을 살펴볼 뿐.

부웅.

크라함이 한스의 시신을 아공간 너머로 던졌다. 공간의 균열 속에 삼켜지는 한스의 시신.

크라함은 아공간을 닫고는, 다시 금 이쪽을 주시한다.

-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곧이다.

그가 지팡이를 드높이 치켜든다. 직후 놈의 지팡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암흑색 기운.

- 나는 한스의 육신을 흡수해 스스로를 강화할 것이다. 그 후 네놈 마저 죽여 흡수해, 비로소 이 세상 의 주인이 되리라.

놈의 메마른 말에 조금씩 환희의 감정이 어리기 시작한다.

- 엘로힘. 나에게 저주받은 운명을 수여한 잔혹한 창조주! 그와 동 격의 존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놈에게 복수할 때가 머지않단 말이 다!

쿠르르르르르….

허공에 수십, 수백 개의 균열이 열렸다. 나는 허공을 바라본다.

'게이트 마법.'

지금 크라함은 게이트 마법을 발현하고 있다.

나는 허공에 열린 균열들을 노려 보고,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저 균열 너머에서 거대한 괴물들 이 속속 도착하는 것이 보였으므로.

'포식자 수백 개체를 불렀다.'

크라함은 대규모 게이트 마법을 발현, 동부대륙에 있을 포식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나는 으득, 이를 갈았다.

'망할. 이래서야 내가 유물을 활 성화한다 한들 크라함 놈을 이길수 없어.'

유물을 활성화해도 고작 10분 정도밖에 제 실력을 낼 수 없다. 10분을 넘겨 신체가 한계에 도달하면 내 몸이 붕괴해버린다.

10분은 저 포식자들을 모조리 처 치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크라 함까지 상대할 수 없다.

곧 게이트마법이 발현되었다.

쿠웅! 쿠웅! 쿵 쿠웅!

허공에서 낙하해 지면에 착지하는 포식자들의 무리.

그에 한창 키메라를 섬멸하고 있던 보병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깔려 죽어나간다. 포식자놈들이 지면에 격돌하는 소리 사이사이로, 기사와 병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메아리쳤다.

크라함이 클클 웃는다.

- 그러면 조만간 다시 보지. 한지훈. 내 전생의 아군이자 현생의 적.

- 다음에 나와 마주했을 때. 네 놈의 신체와 격, 그리고 영혼은 모조리 나의 것이 될 것이다.

화르르르륵.

크라함의 신체에서 검은색 불길이 치솟는다. 흑마법사들이 발현하는 초장거리 도약 마법.

치솟았던 검은색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크라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곳 전투현장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아마도 놈은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동부대륙으로 돌아갔겠지.

나는 시선을 내려 방금 전까지 놈이 있던 장소를 바라봤다.

'한스가 죽었다.'

지면에는 검붉은 색의 핏물자국 이 나있었다. 죽어가던 한스가 홀린 피였다. 이미 피는 메말라 지면에 굳어있는 상태.

대적자 한스가 죽고, 크라함이 강화되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올려 주변을 살 펴보았다.

- 우오오오오오오!

- 크아아아아아!

지면을 구르며 일어난 포식자들 이하나둘 포효하며 기세를 발하고 있다.

놈의 장엄한 음성이 공기를 진동 시키고 웅혼한 파동을 발한다.

쯧, 혀를 찼다.

"결국 모두 다 크라함의 계획대로라는거군."

내가 한스를 죽이는것도, 부활한 한스가 그에 증오를 품고 각성하는 것도.

모조리 크라함이 유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크라함은 강해질 터다. 한스의 시신을 자신이 흡수함으로 써.

지금도 유물 없이는 상대하기 벅 찬데, 그런 놈이 더더욱 강화된다 면…

승산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염병할."

나는 욕지거리를 뇌까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라함이 한스의 육신을 취해 강화되는 것. 커다란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일단은 지금 막 등장한 수백 개 체의 포식자들을 처리해야 한다.

나는 통신수정구를 집어들었다.

"마이사. 포식자들을 제압해야 하지? 유물을 사용하겠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줘."

아직 전투 끝나지 않았다.

크라함과 한스에 대한 일은 생각 의 저편으로 던져놓고, 일단은 눈앞 의상황에 집중해야 하리라.

나는 통신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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