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나는 자리에서서 두 환상체의 다툼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다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심해의 패자 리바이어던.
내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문득 창피해졌던 것인지.
베히모스가 짐짓 분위기를 바꿔진중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히모스의 질문에 내가 쥐어들 고 있는 수정구, 리바이어던의 핵이 대답한다.
- 네 힘을 빌리기 위함이다. 베 히모스.
- 힘을 빌린다라…. 저 반쪽짜리 초월자를 도우려 하는 것이겠지. 과연. 강제력이 느껴진다. 저자는 세계의 선택을 받았군. 그렇기에 리바 이어던 네놈이 저 하찮은 지성체 출신 초월자에게 조력하고 있는 것 이었어.
이전에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과거 환상종의 핵들은 나를 돕는 것에 대해 어떤 강제력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이전 중앙대륙에서 리 바이어던이 순순히 나에게 조력해 줬을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건지, 베히모스의 핵이 리바이 어던에게 물었다.
- 한데 어째서 나에게까지 손을 뻗는단 말이냐. 리바이어던, 네놈의 힘만으로도 저 초월자에게는 충분히 차고 넘칠 터인데.
베히모스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지금의 나는 리바이어던의 힘 일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스템의 가호 덕분에 지성체의 격을 초월했음에도.
유물을 힘을 어느 정도 끌어올린 다면, 육체가 버티지 못해 이쪽이 죽어버린다니.
이래서야 계륵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내가 굳이 다른 유물까지 손에 넣으려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 사악한 존재가 활동을 시작했다. 놈에게 네 힘이 넘어가서는 안된다.
크라함을 상대해야 하기에.
그동안 유물상태로 잠들어 있었 음에도, 계속해 외부 소식을 수집했 던 것일까.
리바이어던은 내 예상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베히모스에게 말한다.
- 상황이 심상치 않다. 기존의 모든 시나리오가 폐기되었으며, 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둘 죽거나 새로이 등장했다. 광기의 별과 대적자의 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 광기의 별, 그리고 대적자의 별이라. 그 말은.
- 세상의 커다란 분기가 닥쳐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 머지않아 이 세상은 멸망하거나, 혹은 재구축 되겠지. 우리 반신들이 엘로힘에게 죽어 봉인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가만히 서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 고 있던 나는 미약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엘로힘? 그건 또 뭐야?'
전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광기의 별은 크라함의 의미하고, 대적자의 별은 한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엘로힘이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인물의 이름 이다.
그런 내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것일까. 리바이어던이 전음으로 내 게 알려온다.
- 엘로힘이란, 우리 환상체들이 신을 일컫는 고어다.
"신?"
- 그래. 엘로힘 (Elohim).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방관자.
창조주라는 건 알겠는데, 방관자는 무슨 뜻일까?
리바이어던의 설명이 이어진다.
- 엘로힘은 모든 생명과 물질을 창조하신 우리의 자애로운 어머니 이자, 모든 관리와 책임을 방치한 채 상위차원으로 떠나버린 비열한 아버지이시지.
"상위차원으로 떠났다면… 설마."
상위차원이란 말에 나는 눈을 가 늘게 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위차원이란 단 하나에 불과하다.
'지구.'
나의 고향이자, 이곳 블랙 오케 스트라 세계관보다도 더욱 상위에 자리해있는 세상.
혹시 엘로힘이라는 신은 이곳 블 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을 만든 뒤, 상위차원인 지구로 향했던 것 아닐 까.
리바이어던은 그런 내 추측에 긍 정했다.
- 그래. 엘로힘이 향한 상위차원 이 바로 네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그곳일 터다. 네놈의 영혼과 육신은 다른 엘로힘의 피조물들과 그 기본 구성이 동일해. 분명 네놈은 엘로힘 이 만든 피조물들의 후손이다.
즉, 지구에 있는 신과 이곳 블랙 오케스트라 세계관의 신이 동일인 물이라는 소리다.
어찌 보면 지구와 이 세상은 배다른 형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정작 이곳에 대해 아는 건 쥐뿔도 없었구나.'
이 염병할 게임 속으로 끌려온 뒤, 수많은 전공과 업적을 쌓아 신분을 상승시키고 휘하 세력을 일구어왔다.
하지만 늘어난 내 무력과 영향력 과는 상반되게, 내가 이 세상에 대 해 알고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내가 어찌하여 이 세상에 끌려들 어 온 건지, 시스템은 어째서 내게 간섭하는 건지. 그리고 저 환상종들 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세계관의 심층적인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주변에 제국 황제나 엘프 여왕 같은 고위 인사들이 있다 한들, 그들은 결국 지성체.
알고 있는 지식과 파악하고 있는 역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 내 눈앞에는 환상체의 기억을 온전히 담은 핵이 두 개나 있다.
저 둘과 대화할 수 있게 된 나라 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지 도 모른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리바이어던. 그리고 베히모스. 그 엘로힘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
- 설명이라…. 어렵지 않지. 다른 지성체였다면 격이 모자라 백치가 되거나 영혼이 소멸당했을 테지만. 네놈은 반푼이에 불과해도 초월의 격을 이루었으니 .
- 하지만 지금 알려주기엔 여유 가 없군.
"알려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내 물음에 베히모스가 답한다.
- 사악한 존재가 내 신전으로 전이해오고 있다. 사사로운 담소 따위 나눌 시간은 없을 텐데?
"뭐?"
내가 그리 경악하는 그때.
쿠르르르르르…!
굉음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이후 피부에 느껴지는 불쾌하고 도 질척한 기운. 사악한 인물의 기 감이 온 신경을 저릿저릿 자극한다.
나는 깨달았다.
"흑마법사."
놈들 또한 이유물, 베히모스의 핵을 노리고 이곳 서부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행이 이죽거리는 음성으로 이어 말한다.
- 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나중에 제대로 풀어주마. 일단은 전투에 집중하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그럭.
세계검을 쥐어든다.
크라함의 흑마법 학파, 볼라바아 의 최고위 간부 중 하나. 크라함의 최측근.
최상급 흑마법사 테르본.
그는 허공에 오연히 떠올라있는 상태로 지상을 내려다본다.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저곳이 유물이 있는 신전이로 군."
테르본의 붉은색 안광이 한 신전 으로 향한다.
신전이라 하나, 사실은 폐허라 불러야 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이곳저곳에 기둥과 건물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벽면에는 이 끼와 풀 따위가 무성했다. 언뜻언뜻 보이는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내려온통 구멍이나 있다.
하지만 그런 허름한 신전을 바라 보던 테르본은 곧 저것의 정체를 깨달았고,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 베히모스의 뼈로 만들어진 신전이라! 대단하군!"
환상종의 뼈란 몹시나 뛰어난 아티팩트 소재이자 고위의 가치를 지닌 연구물질. 의외의 부수입에 기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맡은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
테르본은 기쁨의 감정을 잘 추스른 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 를 드높이 치켜들었다.
"일단 버러지를 지워버린다."
그의 지팡이에서 암흑색 기운이 피어오른다.
쿠르르르르르….
이후 울리는 웅혼한 흑마나의 파 동.
직후 게이트가 열렸다.
허공에 균열이 발생하더니, 이후 공간이 쩌억 열리며 심연의 공간이 드러난 것이다.
게이트 너머에서 이형의 존재들 이하나둘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주인께서 직접 하사하신 흑마법사와 암흑기사. 그리고 광인과 포식 자들이다."
철그럭, 철컥. 저벅.
지상으로 내려앉아 대열을 정비 하는 일천의 암흑기사. 그들의 호위 를 받으며 내려서는 일백의 상급 흑마법사.
쿠웅! 우지근!
그리고 그 육중한 덩치로 지면을 밟는 열 개체의 포식자와, 마구잡이 로 흩어져 움직이는 일백의 광인들 까지.
그들이 게이트에서 넘어와 금세 진형을 갖추고 강렬한 기세를 발하 기 시작한다.
지켜보던 테르본의 붉은색 안광에 점차 희열의 감정이 섞이기 시작한다.
"주인의 기대에 반드시 응하겠나 이다."
크라함은 테르본을 신임해 저토록 막대한 병력과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해주었다.
테르본은 감격했고. 그렇기에 그 어떠한 수를 써서든 맡긴 임무를 달성하고자 한다.
"앞으로 나아가라! 보이는 하찮 은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없애 라! 유물을 확보하라!"
그가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볼라바아를 위하여 !"
테르본의 광오한 목소리가 천공 과 지상을 뒤흔든다.
- 크아아아아아!
암혹기사와 광인, 흑마법사, 포식 자들로 이루어진 혹마법의 군세가 전진을 시작했다.
"미쳐버린 규모네."
신전의 정문. 그곳에서 나는 동쪽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저 평야 너머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안구에 마나를 집중시켜 시력을 강화한 상태였고, 그 덕분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쿠웅, 쿵, 쿠웅.
굉음을 울리며,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커다란 덩치. 포식자.
- 키아아아아아!
이성을 잃고 오직 전투본능에 매 몰되어 달려오는 광인들의 무리.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대열을 짠 채, 전신갑주의 쇳소 리를 일으키며 절도있는 발걸음으로 전진해오는 암흑기사들과.
- 쿠르르르르….
하나둘 흑마나를 끌어올리며 광 역 공격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일백 의 흑마법사들까지.
적의 수가 터무니없이 많다.
"암흑기사 일천, 흑마법사 일백, 광인 일백, 포식자 열 개체."
이자리에서 내가 파악한 적의 전력이었다.
내 표정에 절로 낭패가 어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트웨인 녀석 들이랑 같이 오는건데."
나는 유물의 위치를 알아낸 뒤, 황실 기사들과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만을 데리고 움직였다.
최대한 빠르게 유물을 회수하기 위한 처사였다.
그렇게 기민하게 움직인 덕분에 흑마법사 놈들보다 한발 앞서 유물에 당도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저토록 터무니없이 많은 적이 몰려들어 올 줄이야.
나는 가만히 자리에서서 고뇌했다.
'아군의 전력은 황실 기사 사백. 그리고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일백.'
이번에 나는 황실 기사들을 사백 명밖에 데려오지 못했다.
저번 전투에 중상을 입은 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비교적 전력보전이 잘 되어서, 정원인 일백을 채운 상태라 하나.
그럼에도 너무나도 압도적인 열 세에 처한 상황이다.
'지금 전력으로는 적의 암흑기사와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 도 버거워.'
황실 기사는 강하며, 라브리에 마법전투단은 현존 전투마법사들 중 최강의 화력을 지니고 있다.
허나 그래 봤자다.
그들의 전투력은 어디까지나 평 범한 인간들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에 최적화되어있으니 .
아무리 우수한 그들이라 한들 광인이나 포식자 같은 괴물들을 상대 할 수는 없다.
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유물의 힘을 활성화한 나밖에 없을터.
후우.
한숨을 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다시 무리를 해야하는건 가."
아무래도 저 포식자와 광인들은 내가 상대해야 할 듯싶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옆에 있던 제피르에게 유리병을 건넸다. 유리병 안에서는 황금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다.
내가 건넨 유리병의 정체는 바로 엘릭서였다.
나는 제피르에게 엘릭서 한 병을 쥐어준 뒤 지시했다.
"제피르, 이건 엘릭서다. 만약 내가 전투 중 쓰러진다면 내게 이걸 먹여줘."
"한지훈? 네놈, 뭘 하려고…."
"이번 위기를 타파하려면. 어찌 되었든 한번 죽게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유물을 사용하고자 한다.
유물을 사용한다면 내 육신이 버 티지 못해 절명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유물의 힘없이 결코 극복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엘릭서를 사용해서라도 환상종의 힘을 빌릴 수밖에.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리바이어 던의 핵을 들어올렸다.
"그럼. 가보자고."
포식자 열 개체.
그리고 광인 백 개체.
이번에 내가 혼자서 상대해야 할 적들이다.
물론 힘든 전투이겠지만.
마침내 완성된 세계검과, 잘 정 제된 유물의 힘을 극한으로 활용한 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전투 이리라.
나는 작게 읊조렸다.
'유물 활성화.'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유물'을 사용합니다.]
[소유중인 유물 : '리바이어던의 핵'.]
화르르르륵!
수정구에서 푸른색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