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일반 병사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천막 외진 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카테르.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자가 바로 제국의 악마, 한지훈 라이젠….'
한지훈이 천막을 가르고 등장했다.
분명 화려한 광택으로 번쩍였을 전신갑주가 진한 핏물로 온통 범벅 이 되어있었으니 .
얼마나 많은 수의 호위대를 죽이 고 베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한지훈의 모습을 바라보는 카테르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도 안되는 무력이로군….'
카테르는 유목연합의 연합장이자 한 민족의 최고지도자.
유목민들의 세계에서 지도자란 일신의 무력이 강대하지 않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 카테르였기에 당연하게도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타인의 무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은 말이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한지훈의 무력은 너무나도 드높았다.
전신을 휘감고 있는 무지막지한 위압감.
시선은 날카로운 한편 강대한 기 세가 어려있었으며, 발걸음 한 발자국마다 패기가 실려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마나의 잔향 은 그 농도가 너무나 농밀해 정신 이 흐트러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그리고 이 지휘부 천막 의 다른 부족장 모두가 달려든다 해도 결코 이길 수 없을 정도의 강 함.
카테르는 비로소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승리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한지훈의 무력을 확인하고 나니,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목숨마저 포기할 그가 아니다.
후욱.
카테르가 숨을 내쉬며 혼란한 표정을 갈무리한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카테르는 일반 병사의 복장을 입어 일개 병졸로 위장하고 있었다.
목숨만은 부지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부족장들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트웨인과 제국측 입장에선, 서부 대륙 전쟁 후 유목연합을 차질없이 통솔하기 위해선 기존 부족장들을 살려놓는 게 일 처리가 수월하니까.
하지만 연합장인 자신은 다르다.
전쟁의 끝은 항상 기존 절대지배 층이었던 왕과 왕족을 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있을 저항의 구심점을 없애 놓기 위함이다.
그리고 연합장인 카테르는 제국 과 트웨인 입장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
협상을 통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타 부족장들과 달리, 그는 죽음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렇기에 카테르는 병사로 위장 했고, 적당한 틈을 봐 도망칠 생각 이었다. 실제로 적당한 도주경로와 도주에 사용할 전마까지 준비해뒀 고 말이다.
이자리만 어떻게 모면한다면,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
카테르는 이를 악물고 한지훈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였다.
"거기 숨어있었구만."
잠시 천막 내부를 둘러보던 한지훈. 그가 피식 웃으며 카테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벅,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한지훈.
카테르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분명 위장은 완벽했다.
헌데 한지훈 저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단숨에 자신의 변장을 간파 해낸 것이다.
그가 주춤 뒷걸음질 치고, 한지훈은 그런 그의 바로 코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철컹!
한지훈이 투구의 바이저를 올렸다. 얼굴이 드러난다.
이전에 들었던 소문으로 들었던 대로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한지훈이 들고 있던 거검을 지면에 박아놓고는, 허리춤에 패용했던 장검을 꺼내들었다.
그가 이죽 웃으며 말한다.
"카테르 연합장. 생각보다 잔머리 가 굴러가는데 그래? 하지만 날 너무 멍청하게 봤어. 고작 변장 따위 로 나를 기만할 수 있다 여겼나?"
"어떻게… 어떻게 알아낸 거지!? 네놈은 내 얼굴조차 모를텐데!"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가 장검의 날끝을 이쪽으로 겨눈다. 예리한 검날의 반사광이 시리 게 반짝인다.
"일단, 네 녀석은 따로 쓸모가 있으니까. 잠깐 자고 있으라고."
그의 푸른색 장검이 휘둘러졌다. 눈으로 따라잡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재빠른 쾌검이었다.
카테르 그가 미처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
서걱! 콰직!
"끄아아아아아!"
카테르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 른다.
나는 검을 휘둘러 카테르의 양 팔을 자르고, 발목의 힘줄을 베어냈다.
붉은색 피가 치솟는다.
"끄아아아아아!"
카테르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컥, 울컥.
천막의 바닥에 녀석이 사지에 뿜 어져 나온 핏물로 젖어간다.
너무나 아픈 고통이었을까?
카테르는 잠시 눈가를 파르르 떨 더니, 곧 힘없이 고개를 지면에 처 박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나는 놈의 옷을 찢어 잘라낸 팔다리를 묶어 적당히 지혈했다. 과다출혈로 죽는다면 써먹을 수 없기 때문에 한 조치였다.
"여, 연합장님!"
"저 무뢰한 제국의 개가! 감히 카테르 연합장님을…!"
"빌어먹을 놈!"
경악과 고함이 이쪽을 주시하던 부족장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다.
그에 내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힐끔 바라보자, 놈들은 내 시선에 압도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저들은 각 유목민족의 부족장들. 나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내 경지가 어떠한지 충분히 느 끼고 있을 터.
제 상관의 죽음에 순간 열이 올라 고함을 질렀지만, 그렇다고 이쪽을 향해 달려들 만큼 무모한 놈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갈람프 에게 지시했다.
"갈람프. 부족장놈들 모두 제압해 줘."
"알겠네. 죽이지는 말고?"
"가급적 죽이지는 마. 반항하는 놈들 빼고."
"명을 따르지."
갈람프가 황실 기사단원들을 시 켜 부족장들을 제압했다. 그들을 무릎 꿇리고, 적당한 옷가지로 팔다리 를 묶었다.
부족장 놈들은 분한 듯 표정을 한껏 일그러트렸지만, 역시나 반항 하는 놈은 없었다.
반항한다면 단숨에 목이 잘릴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지휘부 천막 내부가 완전히 정리되어갔다.
그리고 그때.
펄럭!
천막의 입구가 열리며 유목연합 놈들이 뛰쳐들어왔다. 방금 전 우리 가 돌파했던 호위대 놈들이었다.
"빌어먹을! 부족장님!"
"부족장님들과 연합장님을 구해 내라! 저 제국의 무뢰배 놈들에게 당해서는 안된다!"
이후 오러를 줄기차게 뽑아내며 달려드는 유목민족 전사들.
나는 쯧 혀를 차고는, 장검으로 바닥에 제압되어있는 연합장의 목을 겨눴다.
"멈춰라.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 면, 이자리에 있는 연합장과 부족 장 놈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지."
나는 보란 듯 연합장의 목덜미를 살짝 긁었다. 날카로운 검날에 베여 핏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크윽…!"
"인질극이라니, 저 비열한 놈이!"
그에 달려들었던 전사놈들은 자리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자리에 있는 부족장 놈들. 아마도 유목연합 모든 부족의 수장들일 터다.
인질극이 먹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품속에서 통신수정구를 꺼내들었다.
"누르비테. 지휘부 천막을 완전제 압했다. 연합장을 비롯한 놈들의 부족장 모두를 포획했어."
- …오오! 정말인가?! 정말 지휘 부 천막을 완전 제압하는데 성공 했단 말인가?!
"정말이고 말고. 지금 내 앞에 모두 포박되어있다."
- 대단하다. 정말 실로 대단하다 한지훈! 그토록 어려운 임무를 기어코 성공시킬 줄이야!
순순히 기뻐하는 누르비테.
나는 이어 말했다.
"놈들의 대가리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으니 , 이제 유목연합의 지휘체 계는 완전히 무력화되겠지."
어떤 전쟁터이든, 군을 지휘하는 장수와 참모들이 사라진다면 그 군대는 와해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놈들의 최고 지휘부를 완전히 제압해버렸으니 .
"전투를 중지하고 적에게 항복을 권유하라. 놈들의 지휘부가 제압되 었고, 부족장 놈들의 신변이 이쪽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 순순히 항복 할거다."
놈들은 항복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을 터.
나는 씩 웃었다.
"서부대륙 정벌전쟁이 끝났다. 누 르비테, 고향을 되찾은 걸 축하한다."
전쟁이 끝났다.
* * *
전장 정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와 황실기사들은 포박된 부족 장들과 연합장을 트웨인 본영으로 끌고 갔다.
병사들은 적을 무장해제시키고 포로로 취했으며, 그 포로들을 시켜 전장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전사자 시체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시체를 한곳에 모아 불에 태워 정화했다.
그리고 나는 트웨인 본영에 도착 해 누르비테와 만났다.
"피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내 얼굴을 바라본 누르비테놈이 대뜸 하는 말이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사선을 뚫고 승리를 쟁취해낸 아군에게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 망 정, 보자마자 피냄새 운운하다니. 너무한 거 아냐?"
"전사가 풍기는 피냄새는 최고의 찬사라네. 우리 유목민족에서는 말이지."
거참 야만적인 놈들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한지훈. 자네와 제국의 지원 덕분에 우리 트웨인은 고향땅을 되찾을 수 있었고, 다시금 서부 대륙의 지배민족이 될 수 있는 기 반을 차지했다. 다시금 정말 감사하 네."
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와 제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트웨인은 서부대륙 정벌에 실패했을 것이다.
나와 제국이 힘을 합쳐 만든 식량과 군수물자 지원. 그리고 전장에서의 내 활약.
이것들이 없었다면 결코 승산이 없었을테니까.
이번 서부대륙 정벌에 트웨인은 무려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트웨인 민족에서 싸울 수 있는 모든 성인을 차출했기에, 그리고 보급을 제국에서 모조리 부담했 기에 간신히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이었다.
반면 유목연합 측은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사실 15만 병력은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은 아니었다.
후방에서 수렵과 채집을 위한 이 들이 있어야 했기에, 싸울 수 있는 이들 전부를 전투병력으로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즉, 제국의 물자지원이 없었다면 트웨인 측은 제대로 된 병력조차 꾸리지 못해, 결국 서부대륙 전쟁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터.
더구나 평범한 트웨인의 전사들 이 적진으로 처들어가, 놈들의 저항을 돌파해 지휘천막을 급습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나와 황실 기사들만이 성공 해낼 수 있는 위업이었다.
만일 나와 황실기사단이 없었다 면 트웨인은 이번 칸타라콜 대평원전투에서 패배했을 터다.
그가 고개 숙여가며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
누르비테가 고개를 들어올려 내 게 확언한다.
"우리 트웨인과 제국의 우정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걸세."
"그래.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어쨌든. 전쟁은 끝났고.
나와 트웨인, 제국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다.
트웨인은 서부대륙 지배민족의 자리로 복귀했으며, 제국은 강력한 우방과 서부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고, 나는 유물을 얻게 될 터다.
절로 미소가 흘러나온다.
"그럼 이제 가봐야겠어. 할 일이 많거든."
"할 일이라니…. 승전 기념 연회 를 준비하려 했는데 . 많이 바쁘 나?"
"그럼. 바쁘지."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한다.
"정확한 유물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거든."
"유물의 위치라…. 어떻게 알아내려고 하는건가? 그 엘프의 마법사 들도 완전히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들었네만."
"물론 그렇지. 이곳 칸타라콜 대 평원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알지만, 원체 큰 평야지대라 말이지. 조사하는 것에만 한세월이 걸릴거다. 하지만 빠르고 효율적으로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방법이라. 그게 뭔가?"
궁금한 듯 의아한 얼굴로 묻는 누르비테. 나는 녀석에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카테르가 있잖아. 내가 사로잡은 유목연합의 연합장. 놈을 털어봐야지."
지금 내 수중에는 빈사상태인 유 목연합의 연합장, 카테르가 있다.
녀석을 심문한다면 유물의 위치 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적당한 수준의 심문으로는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할 터.
저래 봬도 나름의 강자다. 무수 한 고문과 압박에도 꽤나 오랫동안 버티어내겠지.
허나 이쪽에는 제피르가 있다.
"신체단련은 꽤 했겠지만, 정신은 다른 문제이니 말이야. 제피르라면 놈의 정신방벽을 파훼하고 유물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 따위 간단할 거다."
과거 나는 카렌 왕국 크라그연대 의 연대장, 더스틴 크레이그를 사로 잡아 정신방벽 파훼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빼냈던 적이 있다.
그때처럼 마법의 힘을 통해 유물 의 위치를 알아낼 심산이다.
내 말에, 누르비테가 눈가를 찌푸렸다.
"꽤나 잔인하구나, 한지훈. 카테 르 그놈 저승가는 길이 썩 고통스 럽겠어."
"고통스러워야지. 우리의 적인데 말이야. 하여튼, 이제 가봐야겠어. 지금쯤이면 제피르가 모든 준비를 다 마쳐놨을 테니."
"잘 가게나. 짬이 난다면 승전연 회도 참석해주고."
"시간이 난다면 참석하지."
나는 누르비테의 배웅을 받으며 천막 밖으로 나섰다.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본영 한켠에 마련된 공간, 카테르의 수감 공간이었다.
이제는 놈의 정신을 헤집어 정보 를 얻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