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영주님께서 돌아오신다!"
루벤의 영주성에서는 한바탕 소 란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었다.
방금 전, 제국 황궁에서 그들의 영주인 한지훈 공작이 초장거리 도 약 마법진을 통해 귀환한다는 연락 이 왔기 때문이었다.
루벤의 영주대리 역할을 맡고 있던 랑스는 크게 외쳤다.
"가신들을 모아라! 영주님을 마중해야 한다!"
"영주대리님의 명을 받듭니다."
랑스의 지시에 따라 하인들이 분 주히 움직이고, 영지를 관리하던 여러 가신들이 우르르 영주성으로 모 여들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대부분의 가신들이 영주성에 모였다.
어떤 이는 행정관이었고, 어떤 이는 영지군의 지휘관이었으며, 어떤 이는 영지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무려 수백 명.
몹시 많은 수였다.
영지가 발전하고 영지민의 수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그들을 통제할 관리도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신들 중 '제대로 된' 귀족들은 없었다.
비록 공작위라 하나 휘하에 정식 방계가문이 단 하나도 없었던 탓. 라이젠 가문이 생긴 지 얼마 안된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몰려든 가신들 대다수는 단승귀족이거나 혹은 훈작사, 기사 등 반쪽짜리 귀족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족이었다.
커다란 영주성에 귀족 수백이 모 여있는 광경은 루벤이 이토록 발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모자람 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모은 영주대리 랑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아버님께서도 만족 하시겠지."
한지훈의 양아들이었으나, 굳이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지 않던 랑스였다.
그러나 한지훈의 무공을 들을 수록 자연스레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한지훈에게 아버지란 호칭을 서슴없이 입에 담고 있다.
그렇게 영주성에서 수백의 귀족 과 관리들이 모여들어 도열해 있을 때.
쿠르르릉….
진동이 울렸다. 환한 빛을 흩뿌 리며 등장하는 인영.
랑스는 초장거리 도약마법의 마나광을 해치며 걸어 나오는 인물을 확인하고는, 밝게 미소 지었다.
"오셨군요, 영주님. 마중 나왔습니다."
등장한 인물은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
한지훈이었다.
랑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지훈의 외양을 살폈다.
이제 30대를 넘겼음에도 그의 외 양은 여전히 처음 볼 적 그대로, 이십대 중반 수준에 불과했다.
눈빛은 진중하고, 전신에 휘감은 분위기는 날카롭고도 선명하다. 시선에는 위압감이 실려 있다.
오랜만에 한지훈을 마주한 랑스는 직감했다.
'더욱 강해지셨구나.'
비록 검재를 타고나진 않은 랑스 지만, 유년기 시절 타인의 눈치를 오랫동안 살폈기에 다른 이의 수준 과 감정을 읽어내는데 능한 그였다.
그렇기에 랑스는 한지훈이 더욱 강해졌다는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 게 파악해낼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한지훈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가 영주성 내부에 도열해있던 가 신들을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마중이라… 이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오랜만의 영주님의 귀환입니다. 가신된 이들로서 당연히 전쟁에서 영주님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지훈의 중얼거림에 한 관리가 입을 열어 답한다.
과거 이곳이 라이젠령이 아닌 오 스텐트령이었을 때부터 행정을 보 아왔던 인물.
핸리 돌턴 행정관이었다.
"새로운 인원들도 있으니 , 영주님 의 얼굴도 익혀야 하겠고 말입니다."
"뭐, 그런가. 그러고 보니 관리들의 수가 많이 늘은 것 같은데."
"그렇사옵니다."
한지훈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 이고, 헨리 행정관은 이어 말했다.
"영주님의 귀환과 승전에 맞춰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비록 시간이 촉박하기에 그리 화려하게 꾸미진 못했습니다만. 어찌하시 겠습니까? 연회를 열까요? 피로하신다면 연회 를 취소하고 편히 휴식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연회라… 딱 좋네. 마침 손님들 도 있으니 말이야."
"손님이라 하신다면…?"
행정관이 의아한 눈으로 한지훈을 바라볼 때.
번쩍! 번쩍! 번쩍! 번쩍!
환한 빛 무리가 연속해 터져 나 왔다. 그 너무나도 밝은 광휘에 눈가를 찌푸리는 가신들.
직후 빛 무리를 헤치며 사람들이 하나둘 초장거리 도약을 해오고.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 문양은…!"
"황실 기사들! 갑자기 왜…."
한지훈 혼자만이 아닌, 황실 기사 500명이 함께 영지에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한지훈은 씩 웃으며 랑스에게 말했다.
"일시적으로 황실 기사 오백을 통솔하게 되었다. 한동안은 영지에서 기거할 것이니 숙소를 배정해주 도록. 연회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고 말이야."
"황실기사들을 지휘하게 되셨단 말입니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한지훈과 달리 랑스는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고 있었다.
황실 기사란 제국의 황제 아르테 니아의 가장 가까운 무력.
그들 하나하나는 고위 귀족집안 의자제들이자, 훌륭한 경지를 이륙 한강자들이다.
그런 기사들의 지휘권이 한지훈 의 손에 들어왔다.
그것의 의미를, 영주대리로서 정치를 적지 않게 접한 랑스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황제폐하의 신호다. 자신의 안위를 책임지는 황실기사들조차 믿고 맡길 정도로, 영주님을 신임한 다는 신호.'
랑스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한지훈을 바라봤다.
들려오는 소문 덕에 자신의 양아 버지가 황제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황실 기사들까지 맡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다.
한지훈은 씩 웃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부재중 보고는 연회를 진행 하면서 받도록 하지. 연회는 바로 열 수 있나?"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오냐."
랑스가 한지훈을 안내한다. 그 뒤를 황실 기사들과 공작령의 가신 들이 뒤따랐다.
* * *
나는 유리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 짝였다.
입가에 와 닿는 붉은색 액체. 씁 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액체가 목을 축인다.
픽 웃었다.
'이런 휴식도 좋네.'
나는 천천히 연회장 내부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무수히 많은 수의 가신들.
그들이 온갖 호화로운 음식을 맛 보고, 술을 들이킨다. 저들이 담소 를 나누는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보 인다. 은은한 음악소리가 홀을 채웠다.
꽤나 평안한 분위기다.
내가 매일같이 겪었던 전장의 삭 막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맛대가리 없는 염장고기 대신 값 비싼 향신료를 처바른 돼지고기가 모락모락 연기를 흘리고, 쇠로 만든 수통 대신 와인이 담긴 유리잔을 손에 쥐고 있다.
전쟁으로 피로해진 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만 같다.
문득 내심 아쉬워졌다.
'황궁에서의 연회를 즐겼어야 했 는데 .'
듣기로는, 황궁에서 꽤나 화려한 연회를 준비해놨다 한다.
그야 중앙대륙에서 연방을 상대 로 대승을 거두었으니 .
제국에서도 유래 없을 정도로 성 대하고도 화려한 연회였을 터다.
하지만 나는 황궁에서의 연회를 즐기지 못했다.
때마침 연방이 소멸해버렸고,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처럼 준비 중 이었던 연회가 중지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와인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뭐. 연회 같은 건 나중에라도 즐길 수 있겠지.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로 이긴 다음에 말이야."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정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내 양자이자, 지금은 나를 대리해 영지를 통치 중인 영주대리, 랑스 라이젠이 있었다.
녀석은 무어라 열심히 떠드는 중이었다.
"… 전쟁난민을 계속해 받아들이고, 황제폐하의 전폭적인 물자와 식량 지원 덕분에 영지민의 수가 드디어 300만을 돌파했습니다. 영지 군의 수는 10만에 조금 못 미치는 9만 3천여 명이고, 그중 기병은 2만입니다. 동쪽의 토지를 개간해 농 지를 확충하고 있으며…."
나는 연회 와중 랑스에게 그간 영지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사실은 이런 연회자리가 아닌,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듣는 것이 맞 겠지만.
나는 굳이 연회 중에 간소하게 구두보고 받는 걸 택했다.
'이제 영지관리에서 손을 땔 생각이니까.'
나는 슬슬 랑스에게 영지를 완전히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영지의 토대는 완전히 닦아 놨고, 어느 정도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더해 내가 영지로 끌어올 수 있는 기연은 완전히 동났다.
내 힘만으로는, 이전처럼 드라마 틱한 성장세를 보여줄 수 없는 것 이다.
'그리고 나는 흑마법사와의 전쟁에 집중해야 하고 말이야.'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크라함과 놈의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서 유물을 찾고, 세계검을 완성 시켜야 한다. 놈들과의 전쟁을 준비 해야 한다.
몸이 두개여도 모자란 상황.
영지운영까지 내가 손댈 수 없다.
'게다가 단순 관리는 나보다는 랑스가 더 우수하고 말이야.'
기연과 황제의 지원 없이, 단순 운영만 본다면 랑스가 더욱 우수한 관리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러모로 랑스에게 영지를 맡기는 것이 최선.
녀석에게 맡긴다면 영지는 계속 해 무난하게 성장하겠지.
나는 와인으로 입가를 재차 축이 고는 그를 치하했다.
"수고했다. 랑스. 내가 없는 동안 영주대리 노릇을 훌륭히 해줬는데 그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성장 했어. 이제는 제국 제2의 수도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었는걸."
"아버님께서 기반을 잘 닦아주신 덕분입니다."
"아무리 기반이 튼튼해 봤자야. 네가 성실히 영지를 맡아둔 덕분에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 랑 스, 이제부터 네가 영지를 관리해라."
"… 그 말씀은?"
"네가 직접 영주가 되란 소리다. 대리가 아닌, 영주 말이야."
"어…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신 데."
"지금까지와 바뀌는 건 하나도 없을거야. 호칭만 달라지겠지. 가주는 아직 나니까."
물론 가주는 나다. 그렇기에 라이젠령의 소유권은 아직도 내게 있다.
하지만 랑스의 호칭이 바뀐다.
영주 대리에서 영주로. 도련님에서 영주님으로 말이다.
좀 더 의욕이 늘고 책임감이 생기겠지.
나는 픽 웃고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보다 랑스. 영지 내 마탑과 드워프들 현황은?"
"…아! 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녀석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어이어 말했다.
"루벤에 들어선 마탑의 수가 스무 개에 달했습니다. 연구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의 수가 천명을 돌파했 고요. 정착한 드워프들도 스무 개 부족을 넘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좋네. 바네사는 잘 있지?"
"아… '마녀'말입니까? 잘 있습니다. 여전히 연구소를 운영하며 생활 하고 있지요. 최근까지도 여러 아티팩트를 만들어 영주성으로 보내오 곤 했습니다."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영지에는 스무 개 마탑 과 스무 개 드워프 부족이 있다. 더해 바네사가 운영하는 아티팩트 연구소 또한 있다. 거기에 엘프와 황가의 지원까지.
이 정도 준비면 충분히 가능하다.
'세계검의 제작.'
물론 하루 이틀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전 시나리오에서 도 게임이 끝날 때까지 결국 완성 하지 못했던 아티팩트가 바로 세계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잠재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세계검의 제작.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랑스에게 지시했다.
"모든 마탑주와 드워프 족장들, 그리고 바네사를 당장 불러 모아라. 그들에게 시킬 것이 있어."
"갑자기 말입니까? 당장은 안 되고… 일정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들 이 만들거나 연구하고 있는 과제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콧대 높은 마탑 주들은 최대한 느릿하게 오겠죠. 최소한 며칠은 기다려야…."
"아니. 며칠은커녕,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바로 달려올걸?"
나는 씩 웃고는, 내 발치에 내려 놨던 상자를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 게 있다 하면 돼."
"세계수의 나뭇가지…!"
랑스의 눈이 크게 커졌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이어 말했다.
"그것도 세계수에서 가장 농밀한 힘을 머금었던 가지다. 바로 튀어올 수밖에 없지."
세계수의 가지는 엘릭서 이상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아티팩트 재료다.
이 세상 모든 물질들 중 가장 단 단하며, 가장 거대한 힘을 품을 수 있는 귀물 중의 귀물.
마법을 연구하고, 아티팩트를 만 드는 이들 중세계수의 가지를 원 치 않는 이는 없다.
세계수의 가지란 전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재료였으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재차 지시했다.
"마탑주와 드워프 족장들. 그리고 바네사까지, 당장 불러. 늦으면 국물도 없다고 전해주고."
"… 알겠습니다."
랑스가 통신수정구를 들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