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출항! 출항한다!"
"닻을 올려!"
중앙대륙에 있던 제국군이 철군을 시작했다. 중앙대륙 남부해안가에 정박해있던 대량의 수송선들이 일제히 돛을 피고 바다를 향해 나 아간다.
그들이 기수가 향하는 방향은 남쪽. 제국 본토가 있는 방향.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이제 좀 쉴 수 있겠어…."
수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이 끝난 것을 비로소 체감한 제국병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병사들과 달리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 것은 좋다. 다만, 전쟁과는 무관하게 불만족스러 운 일이 있었을 뿐.
수송선 갑판에서 바다를 구경하 던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정면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재차 살펴보았
[1등급 비밀 정보]
[모든 유물을 모은 후 북부대륙 의 요새도시 윈터아르비엔으로 가 야만 합니다.]
"염병."
절로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 온다.
일주일 전. 나는 보상으로 얻었 던 1등급 비밀정보를 활성화하며 '유물'의 위치를 알게 되기를 기대 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배신당하고 말았다.
활성화했던 비밀정보에선 유물의 위치 대신, 유물을 모아 북부대륙으로 가야한다는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왜 북부대륙으로 가라는 건지.'
이 세계,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에는 도합 다섯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
연방이 지배하는 동부대륙.
기마민족의 땅 서부대륙.
제국의 영토 남부대륙.
설원으로 이루어진 미개척지 북부대륙.
엘프와 세계수가 수호하는 중앙 대륙까지.
그리고 활성화된 비밀정보는 나 에게 북부대륙으로 가야만 한다고 지시한다.
이상한 일이다.
'북부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북부대륙. 춥고 메마른 땅.
자연환경이 가혹하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며, 제대로 된 문명조차 없다.있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지대와, 간간이 보이는 고대 유적들뿐.
그곳에 가봤자 별다른 이익을 취 하기는 힘들 터다.
헌데 어째서 시스템은 내게 북부 대륙으로 가기를 종용하는가.
그것도 하필이면 그곳을.
"…이전 시나리오에서, 내가 게임을 클리어했던 장소."
요새도시 윈터아르비엔.
내가 현실에서 게임을 플레이 할 적 가장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장소.
그곳을 정복함과 동시에, 게임클리어 안내창을 봤었지.
윈터아르비엔은 북부대륙에서도 북부 끝단에 자리해있는 요새도시다.
사실, 말이 요새도시지 실상은 폐허로 된 유적에 불과하다. 누누이 말했듯 북부대륙에는 사람도, 문명 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탐사라도 하라는 건가.'
과연 저곳에 뭐가 있기에 시스템 은 나를 저곳으로 인도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태껏 비밀정보가 쓸모 없는 정보를 넘긴 적은 없었다.
비밀정보를 따라 저곳으로 간다 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 여겼다.
언젠가 여유가 생길 때 북부대륙에 한번 가봐야겠다.
그렇게 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지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이름을 입에 담은 이를 바라봤다.
"마이사."
저벅, 저벅, 저벅.
마이사는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 어오더니, 내 바로 옆에서 멈춘다. 그녀 또한 바다를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간다. 비로소 중앙대륙 전쟁 이 끝나고, 남부대륙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잠시 지평선을 바라보던 마이사 가 내게 물었다.
"한지훈. 그대는 본국으로 귀환한 다면 뭘 할 생각인가?"
"뭘 하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중앙대륙은 안정화 되었고, 연방 은 원정실패로 휘청이게 될 것이 분명할 터이니. 연방은 최소 10년 동안은 얌전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방은 이번 중앙대륙 원정 실패 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놈들의 국력은 상당 부분 쇄락하게 된 상황.
그러니 최소 10년 동안은 잠잠할 터.
"이 긴 여유 동안 그대, 한지훈 이 뭘 할지 궁금해서 말이다. 항상 전쟁터에서 살아왔지 않나?"
그녀의 말에 나는 픽 웃었다. 마 이사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녀는 줄곧 전쟁터에서만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남장차림으로 소동생활을 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내 게 거두어져 군영에서 살았다.
이후에는 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 고. 지금은 슈베츠군 관전무장으로 서 이곳에 있다.
허나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다가왔으니 .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생활이 기대되는 것 이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아.'
곧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금 혼란의 시대가 찾아옴을 알 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밝은 눈동자를 쉬이 마주할 수 없는 나였다.
허나 그녀가 실망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녀의 물음에 잠시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전쟁이 없다면… 글쎄다. 방구석에서 뒹굴거리기나 할 것 같은데."
"사령관인 그대가 그런 소리라니. 휘하 장병들의 앞에서 모범은 보여 야지."
"내 원래 성격이 그런걸."
"참 재미없는 농담이구나."
사실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만 하더라도 하루종일 방구석에서 게임에 몰두하던 폐인에 불과했다.
아마, 퀘스트니 시스템이니 하는 것이 없고, 이 세상이 현대 지구처럼 평화롭고도 풍족했다면. 나는 이곳에서도 게을리 생활하지 않았을 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마이사 너는?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어찌 할거지?"
"뭐 그야…"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슈베츠 왕국을 제대로 재건해야 하지 않겠나. 이래봬도 나는 여왕이 라네. 한지훈."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고국을 되찾았다. 이제 남부대륙으로 돌아간다면 제국이 아닌, 슈베츠의 왕녀로서 일국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여왕직을 수행하며 국가를 부흥 시켜야지. 모처럼 그대가 되찾아준 내 고국이다.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제대로 키워야 하지 않겠나."
마이사가 결연히 다짐하는 듯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꽤나 결의가 넘치는 자세.
저 모습을 보니 그녀가 국가를 잘 다스리는 것은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애당초 높은 수준의 지략과 강렬 한 카리스마를 지닌 녀석이다. 이 녀석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 것 또한 잘 해낼 수 있겠지.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한지훈. 그대의 영지 루벤과 내 슈베츠 왕국은 몹시 나 가깝지."
"뭐 그렇지. 사실상 국경이 맞닿 아 있으니까."
"앞으로도 자주 볼일이 많을 것 같구나."
마이사가 미소짓는다. 자신이 다 스릴 국가인 슈베츠와 내 영지 루 벤이 가깝다는 것이 썩 기꺼운 모양.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는 군인이 아닌 외교사 절로서 만나게 되겠구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한지훈."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그래, 마이사. 앞으로도 잘 부탁 한다."
나와 마이사가 탑승한 수송선이 남부대륙으로 향한다.
전쟁이 끝났다.
중앙대륙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백만에 달하는 연방군 병력이 모조리 전멸했다.
압도적인 승리.
그에 지금 제국에서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축제를 열어라! 시민들에게 술 과 고기를 나누어주어라! 승전을 기념해 기뻐하고 즐기는거다!"
제국 수도에서 승전기념 축제가 열렸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 며 축제를 즐겼다. 도시민들이 왁자하게 떠들고 즐기며, 웃음소리가 밤 늦게까지 도시를 울렸다. 제국민들 이 축제를 즐긴다.
그런 제국의 들뜬 분위기는 황궁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궁 부지 한켠에 마련되어있는 커다란 연회장. 그곳에서는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황궁 시녀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했고, 술과 음식을 날라왔다. 황궁악단이 곧 있을 연회에 맞춰 음악을 준비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연회의 준비가 점차 완성 되어간다.
"연회 준비는 순조롭군."
그런 연회준비의 모습을 바라보 던 제국의 황제,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그는 연회장 2층 테라스에서 중얼거렸다.
"정말 전쟁이 끝난건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황궁 밖에서 들려오는 축제 소리. 그리고 황궁 내부에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승전기념 연회.
이번 승전을 기점으로 한동안은 평화의 시대가 있으리라. 백성을 아 끼는 그로선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 그렇게 아르테니아가 연회 준비 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기뻐 보이시는군요. 황제 폐하."
"국방성 장관."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황제가 시선을 돌려 살펴봤다. 제국의 국방 성장관,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 공작이었다.
서슴없이 곁에 다가온 데이비드 가 황제의 바로 옆에 선다. 황제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기쁠 수밖에 없지. 원정이 성공했으니 말이다."
"성공할 가능성이 한없이 없던 중앙대륙 원정입니다. 그것을 기어 코 성공시키다니. 한지훈의 능력이 놀랍군요."
"그렇지. 한지훈. 매번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내야. 그자가 우리 제국에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하 는지 모르네."
이번 원정의 성공, 사실상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고작 30만이 넘는 병력으로 무려 100만의 연방군을 이겨낸 것이다.
그 어떤 위인도 불가능한 업적. 한지훈은 해내보였다. 덕분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황제와 데이비 드였다.
데이비드는 잠시 침묵하더니, 문득 제안했다.
"폐하. 한지훈 공작에게 무언가 포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제안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지훈에 대한 포상. 데이비드는 황제에게 건의해 한지훈의 포상을 챙 겨줄 심산이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인다.
"포상이라… 그렇지. 그에게 포상을 내려야 하지.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작게 고개를 젓는다.
"한지훈에게 무얼 내려준단 말인 가?"
그렇다. 지금 황제는 한지훈에게 내려주기 마땅한 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지훈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네."
그만큼 한지훈이 가진 것이 많았 으므로.
한지훈은 제국 공작. 최고위 작위를 지니고 있다.
더해 그가 다스리는 루벤 영지는 제국에서 제국수도 다음으로, 아니, 제국수도와 비견될 정도로 성세했 으며 발전했다.
게다가 한지훈이 축적한 재물 또한 막대한 수준.
비록 이번 원정으로 대단한 전비 를 소모했다 하나, 그럼에도 그의 재산은 아직도 상당수 남아있다.
거기에 영지의 기반이 온전히 보존된 만큼 소모된 전비 또한 그리 머지않아 복구될 것이다.
"재물도, 영토도, 작위도. 그 무엇조차 만족스러운 포상이 될 수 없지. 그러니 고민일세. 그자에게 무얼 내려줘야 할지 말이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전쟁이나 국가의 쇠락으로 고민 하는 것이 아닌, 대단한 공을 세운 부하를 어떻게 치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라니.
이런 고민이라면 매일이라도 할 수 있는 황제였다.
"재물도, 영토도, 작위도 마땅치 않다면…."
황제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데이 비드.
그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렇다면… 혹, 황가로의 편입은 어떻겠습니까?"
"황가로의 편입이라. 공주와의 결혼을 말하는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데이비드는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공을 세운 한지훈을 공주와 결혼시켜, 황가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 모든 귀족들에게 더 이상 없을 영예였다.
그런데이비드의 제안에 픽 웃는 아르테니아 황제.
"그 생각을 자네만 해본 것이 아니라네. 나 또한 그자를 황가로 편 입시키려 했었지."
"벌써 결혼을 제안하셨던 겁니까?!"
"그래. 한지훈과 인연이 있는 신 시아와의 결혼을 제의했었지. 몇년 전부터 말이다."
황제의 말에 데이비드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고위귀족이자 국방성 장관인 그조차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가문, 황가. 그리고 제국의 영웅인 한지훈 이 혈연으로 묶이게 되는 이야기다.
만약 서로 간에 혼담이 오고 갔 다면 소문이 안 퍼질래야 안 퍼질 수 없는데 .
그 누구도 관련된 소문을 접하지 못했다.
그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처음 들을수 밖에 없지. 혼담이 오고갔다는건 비밀이었으니 말이다. 거절당한 혼담을 자랑스레 떠벌리 고 다닐 순 없지 않나."
"…설마. 한지훈 공작이 결혼을 거절했던 겁니까?!"
한지훈이 거절했었기 때문에.
"한지훈 공작이 말하길. 자신은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다는군."
"허어. 이해가 안 가는군요. 황가 와인연을 맺는 것만큼 영광인 일 이 없는데 . 그걸 굳이 거절하다 니…."
"한지훈이 이미 마음에 든 사람 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나는 전 허 괘념치 않는다네."
한지훈 공작이 황가의 혼담을 거절한 것.
사실 엄청난 무례나 다름없는 짓 이었다.
본래였다면 괘씸해서라도 유무형 의 처벌이 가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제국에 공헌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굳이 그가 원치 않는 걸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래서 고민이라네. 한지훈에게 어떤 포상을 내려야 만족스 러워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렇게 황제는 계속해 고민했다.
한지훈에게 어떤 보상을 내려줘 야 할지. 무얼 받아야 그가 만족할 지 말이다.
그렇게 온화한 분위기 속, 황제가 행복한 고민에 심취해 있을 때.
그때였다.
"황제 폐하!"
덜컹!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병사가 달 려들어왔다. 황궁 내 통신과 전령역 할을 맡은 병사였다.
병사가 부복하며 외쳤다.
"급보입니다! 폐하!"
"급보라. 그래. 북부군이 드디어 귀환했나?"
"아닙니다. 황제 폐하!"
황제는 시선을 내려 부복한 병사를 바라본다.
급하게 뛰어온 것일까. 병사는 숨에 차 헐떡이고 있었다.
더해 그의 안색.
꽤나 심상치 않은 소식을 지니고 온 것인지, 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다.
"뭔가 일이 생겼군."
황제는 그리 직감했고.
"…폐하. 방금 전, 동부대륙, 크 루거 연방이."
병사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제 스스로도 믿기지 않다는 듯 경악 어린 목소리.
병사는 가쁜 숨을 억지로 집어삼 키며, 또박또박 황제에게 알려왔다.
"크루거 연방이 소멸했습니다!
폐하!"
"?.?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