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328화 (328/390)

328화.

나는 마이사와 함께 세계수로 향했다.

군영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가는 와중, 무수히 많은 수의 병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기에 본토인 남부대륙으로의 철수를 준비하는 군인들.

그들이 물자를 운송하고, 병장기 를 정리하며, 부상자를 추스르고 있내가 지나가자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척 경례한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살폈다.

병사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승리해냈다는 자부심과, 생존에 대한 기쁨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 며 읊조렸다.

"이겼네."

"맞아. 이겼어. 연방놈들에게서 우리가 승리를 거머쥔거다. 한지훈, 모두 그대 덕분이야."

이쪽의 중얼거림에 마이사가 대답했다.

막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만 하더 라도, 진정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이 차마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쁜 얼굴로 귀환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진정으로 승리했다는 것 이 체감되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력을 가진 초강대국. 동부대륙의 완전한 지배자.

크루거 연방.

놈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낸 것이다. 그것도 고작 30만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무려 백만에 달 하는 대군을 패퇴시켜서 말이다.

기쁠 수밖에 없는 일.

허나 마냥 그럴 수는 없었다.

"…마이사. 내가 누워있은 지 일주일은 지났으니 전후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이겠지?"

"전장정리 빼고는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다. 사실은 그대가 깨어나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만."

"그렇다면 피해보고서가 완성됐 겠네. 아군의 손실은 어떻게 되지?"

"… 아군의 손실은."

자랑스러워하던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진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마이사.

"15만. 3천. 2백."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여러 숫자들. 분명 좋은 것을 의미하는 숫자는 아닐 터다.

"사상자 수야. 병사는 15만. 기사는 3천. 전투마법사는 2백이 죽거 나다쳤어."

"… 그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가로지르는 군영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다.

빽빽이 쳐진 막사들 사이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병사들.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붉은 기도는 붕대 를 몸에 칭칭 감고 있었다.

그만큼 전투에 다친 부상자의 수 가 많은 것이다. 전사자 또한 몹시 많을 터.

아마도 전장에서는 사체수습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승리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건가."

역시 전쟁이란 미친 짓이다.

사람이 사람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죽여 없애려 한다.

패배하더라도, 그리고 승리하더라 도, 막대한 인명과 자원이 소모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 친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걸까.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하고도 어 리석은 존재다.

그런 상념에 빠지며 내가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퍽!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한지훈."

마이사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손이 꽤 맵다.

"슬퍼하는 건 나중에 하자. 지금은 승리를 기뻐하기만 하면 돼. 알 았지?"

"…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비록 희생된 이들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슬픔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

아직 전후처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넋을 기리는 건 본토로 귀환한 뒤 해도 늦지 않으리라.

"자, 가자. 네가 기대하는 보상을 받아야지."

마이사가 앞서 걸어간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세계수가 보인다.

* * *

세계수의 앞. 그거대한 나무의 전면에 자리해있는 커다란 원탁에 다수의 인물들이 착석해있다.

"어서오세요. 한지훈 씨. 몸은 괜 찮으신가요?"

엘프 여왕 니디아와, 그녀를 따르는 엘븐 가디언들. 그들이 미리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원탁에 착석하며 니디아의 말을 받았다.

"몸은 괜찮아. 아직 뻐근하긴 하지만."

"엘릭서를 섭취하셨어도 한동안 은 잘 움직일 수 없을거예요. 지성 체의 육체는 환상종의 힘을 담기에 너무나 부담되니까요. 조심하셔야 해요."

"엘릭서…. 그런 귀물을 내게 쓰다니, 고마워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

"뭘요. 저희 엘프의 은인인데 그 정도야."

니디아가 싱그러이 웃으며 그리 말했다.

하지만 별것 아니라는 그녀의 태도와 달리, 엘릭서는 너무나도 귀한 물건이다.

'수백 년에 한 병 만들까 말까 한 물건이니까.'

세계수의 크기는 구름에 닿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그곳에서 채취되는 수액은 극미량이다.

세계수에 쌓인 자연력과 마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섞이고, 극도로 농축된 것이 바로 세계수의 수액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계수의 수액을 아무런 희석 없이 원액상태로 보관한 것이 엘릭서.

아무리 세계수를 관리하는 엘프 들이라 한들 몇 병 보유하지 못한 귀물이다.

니디아는 그토록 귀한 물건을 나 를 살리기 위해 사용했다.

"오히려 한지훈 씨께서 저희 엘프를 구원해주시고 중앙대륙을 지켜주셨으니 , 저희가 감사해야 하는 걸요? 한지훈 씨는 엘릭서를 받을 가치, 그이상의 일을 해주셨어요."

물론 내가 해준 일이 있기에 기 꺼이 엘릭서를 사용했을 터지만.

아무튼 고마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니디아가 입을 열었다.

"한지훈 씨. 저희 엘프는 한지훈 씨의 공헌에 대한 감사로 선물을 드리려고 해요."

"선물이라."

"타냐. 준비했던 물건을 올려주세 요."

"알겠습니다, 여왕님."

니디아의 지시에 옆에 자리해있 던 타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한 나무상자를 들고 와 원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이것이 예의 보상이리라.

나는 천천히 상자의 모습을 살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상자다.

비록 쓰인 재료는 나무밖에 없었 지만, 상자의 나무는 기름진 광택이 흘렀으며, 달려있는 경첩에는 마법 적인 보안조치가 되어있다.

필시 귀중한 물건이 담겨있을 터.

"열어보세요."

니디아가 그리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자에 손을 뻗었다.

달칵. 하고 자동으로 잠금이 해 제되는 경첩. 천천히 열자 내부에서 황금색 광휘가 새어 나온다.

"… 이건."

그리고 내부를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보상이 꽤나 컸기 때문에.

내 반응이 썩 만족스러운 것일 까. 니디아가 히죽 웃었다.

"어때요? 만족스럽나요?"

"… 만족스러운 걸 넘어서,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상자 안에는 유리병 세 개와, 고급스러운 나뭇가지 한 개가 고급스 러운 천에 싸여 자리해있었다.

나는 먼저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완전한 세계수의 수액(엘릭서)]

유리병의 정체는 역시나 엘릭서였다. 내가 누누이 읊어댔던 그 귀 물이, 무려 세 개나 보상으로 주어 진 것이다.

나는 니디아를 바라보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지훈 씨는 예전부터 세계수의 수액을 좋아하셨지요. 그래서 엘릭서로 드려봤어요. 어때요?"

"솔직히 말해서 의외인걸. 엘릭서 하나만 돼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세 개나 주려는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내가 알기로 현재 엘프가 가진 엘릭서의 수량은 다섯 개에 불과하다.

니디아는 그중 하나를 나를 살리 기 위해 소모했고, 세 개를 내 보상으로 내놓았다.

즉, 엘프는 단 하나의 엘릭서를 남기고 모조리 나에게 넘긴 것이다.

솔직히 말해 과한 보상이다.

엘릭서 한 병이면 하나의 국가를 살 수 있다.

그런 것이 무려 세 병이라니.

내 떨떠름한 태도를 읽은 것일 까.

"부담스러우신가 보네요. 한지훈 씨. 한지훈 씨께서는 자신이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고 계시네요. 한지훈 씨께서 어떤 일을 해내신지 아시나요?"

니디아가 그리 물어온다. 나는 생각한 것도 없이 대답했다.

"엘프를 구하고, 세계수를 지켜냈 지."

"아니요. 틀렸어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지훈 씨. 한지훈 씨께서는 세계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성체 를 수호하신 것과 다름없어요."

"과장이 너무 심한데."

"아니요. 만약 저희 엘프가 멸족당하고, 흑마법사들에 의해 세계수 가 오염되었다면… 이 세상은 멸망 했을거예요. 세계수가 오염된다면 전 대륙이 그 영향을 받아 흑마나에 침식되니까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계수는 전 대륙에 마나와 자연력을 순환시키는 영물.

세계수가 없다면 이 세상은 천천히, 허나 확실하게 몰락한다.

"그러니 엘릭서 정도야 얼마든지 내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요. 다른 보상도 살펴보세 요."

"다른 보상이라."

그러고 보니 그녀가 준비한 보상 은 엘릭서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상자 안에 있던 다른 물건 또한 집어 들었다.

고급스러운 천에 싸인 나뭇가지.

그것을 집자 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무거운데.'

외형은 나뭇가지였으나 그 무게는 그 어떠한 금속보다도 무거웠다. 정말,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거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세계수의 가지]

그녀가 준비한 보상은 세계수의 가지였다. 니디아의 설명이 이어진다.

"세계수의 가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농밀한 자연력과 마나를 품고 있던 가지에요."

세계수의 가지라 한들 그 부위마 다 담긴 힘이 다르다. 가장 오래 묵은 가지일수록 더욱 단단하고 많은 힘을 품고 있다.

니디아는 그러한 세계수의 가지 중에서 상등품을 고르고 골라 내게 선물로 준비한 것이다.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며, 그 어떤 물질보다도 많은 자연력과 마나를 담을 수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상위의 격을 담고 있는 물건이지 요."

니디아의 설명을 들으며 가지의 결을 쓰다듬었다.

분명 나무였으나, 확실히 단단하 고도 무거웠다. 더해 가지가 품고있는 마나와 자연력 또한 극도로 농 밀했으니 .

니디아가 묻는다.

"한지훈 씨. 제가 세계수의 가지 를 드린 이유, 알고 계세요?"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수 의 가지를 사용할 법한 용도는 지금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

나직이 대답했다.

"세계검을 만들라는거로군."

"네. 맞아요. 한지훈 씨, 세계검을 만드셔야 해요. 그걸 위해서 세계수의 가지를 드린 거예요."

세계검. 이 세상의 법칙마저 절삭할 수 있는 최고위의 아티팩트.

그녀는 내게 세계검을 만들라 청 하고 있다.

"… 한지훈 씨가 누워계시는 동안 상황이 변했어요."

니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정오에 달해 청명한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지훈 씨가 정신을 잃으신 직후. 별자리가 급변하기 시작했어 요."

"별자리라. 시나리오를 말하는건가?"

"네. 세계의 각본, 시나리오. 그 규칙성이 사라지고 별의 위치가 헝 클어졌어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시겠나요?"

"잘 모르겠는데 . 뭘 의미하지?"

"시나리오 그 자체가 사라졌어요. 세계의 항상성이 완전히 없어진 거예요.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는 아무 도 모르게 되었지요."

순간 나는 관리자의 공간에서 보았던 홀로그램을 떠올렸다.

[난이도가 변경됩니다.]

[적용 난이도 : 미지 (Unknown)]

[아무도 모르는 결말.]

'미지 난이도.' 난이도가 바뀌었다. 앞으로의 일 이 시스템 관리자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니디아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한지훈 씨. 드디어 우리는 기회 를 얻은 거예요. 예정된 멸망을 막 아낼 기회 말이에요."

본래 이 세상의 결말은 멸망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생에 내가 했던 게임은 결국 이 세상이 흑마법사들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기존 시나리오를 거슬러 진행했고, 결국 세계의 각본은 더 이상 기존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엘프의 목적은 멸망의 회 피.

그들은 나를 지원해 이 세상에 예정된 멸망을 막아내고자 한다.

"시나리오의 파훼로 인해 세상은 급변할 거예요. 우리는 변화에 대비해야 해요. 세계검을 완성하세요. 유물을 모으세요."

나는 그녀의 말을 새겨넣었다.

세계수의 완성. 그리고 유물의 수집.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들.

잠시 침묵하던 니디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지훈 씨. 동쪽에 큰일이 있을 거예요."

"큰일이라. 그게 뭐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시나리오가 완전히 파훼되어 저희 엘프는 더 이상 미래를 읽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별의 변화로 짐작은 할 수 있지요. 이전에 있던 그 어떤 일보다도 커다란 참화가 일 거예요."

그녀가 큰일이라고 말할 정도라 면. 분명 예삿일이 아닐 터다.

니디아가 여전히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읊었다.

"동쪽에 자리해있는 지배의 별이 빛을 잃어가고, 광기의 천체는 그 기운의 세기를 드높여가고 있어요."

지배의 별은 연방 통령을 의미하고, 광기의 천체는 흑마법사의 수장 크라함을 의미한다.

"어쩌면, 연방이 멸망하고 흑마법사가 동부대륙을 집어삼킬 수도 있겠네요."

"그 강대한 연방이 멸망한다니. 솔직히 믿기 힘든데."

"흑마법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어요. 그들은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이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그런 그들이 연방의 지원 덕분에 세력을 키웠으니 , 못할 일이 없을거예요."

니디아는 연방이 멸망한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죽었던 별이 다시금 빛을 되찾으려고 해요. 이미 퇴장했던 존재가 다시 되돌아오려 해요."

"죽었던 별이라. 그게 무슨 별이 지?"

나는 니디아에게 물었고.

"대적자의 별."

그녀는 그리 대답했다.

꿈틀.

절로 내 눈가가 찌푸려진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대적자의 별이라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놈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이 무색하게 도.

"한스 요한바르첸.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난 이."

그녀는 또박또박, 결코 듣기 싫 었던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와 지긋지긋한 악연으로 얽혀 있는 놈.

"그가 크라함의 힘을 빌어 다시 금 이 세상에 나타날거예요."

놈이 되살아나 내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니디아가 예언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