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이름 없는 별…. 그이명을 누구에게 들은건가요?"
"타냐에게 들었다. 한지훈은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위기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그리 말하던데."
"타냐 그 아이도 참. 입조심을 하지 않고…."
"이름 없는 별이란 건 도대체 뭐지?"
니디아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 지만, 마이사는 굴하지 않고 집요하 게 물어봤다.
최근 그녀는 한지훈이 무언가 다른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일개 군인이 몇 년 사이 야전군 사령관 직위에 올랐고, 공작 작위를 얻어 세력을 일구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놀랄 일 인데.
지금은 저 괴물마저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만한 무력까지 지니게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 단기간에 이토록 성장할 수 있는 것인가?
마이사는 의문을 가졌고.
"엘프. 너희들은 한지훈이 성장하 리란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거다. 그렇지 않다면 최근 몇 년 동안 너희 엘프들의 행적이 이해되지 않 아."
그 답을 엘프들이 알고 있으리라 여기고 있다.
엘프는 한지훈이 아직 두각을 드 러내지 않았을 적부터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막대한 재물, 자원, 인력 지원은 물론.
위기에 빠진 그를 도우며 몇 번 이나 한지훈의 생명을 구해냈다.
본래 고립주의를 자처하는 엘프 가 어째서 한지훈을 지원했는가.
마이사는 엘프가 한지훈의 성장을 예견했으리라 보았고.
그녀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네. 맞아요. 저희 엘프는 한지훈 씨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지요. 저희 엘프는 세계수의 힘을 빌려 별을 읽으니까요."
"… 역시."
"한지훈 씨의 정체. 원래라면 알려줄 수 없지만…."
니디아는 잠시 마이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니디아의 시야에 단호하고도 굳 센 마이사의 눈빛이 보였다.
반드시 들어야한다는 결심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깊게 일렁이고 있다.
푹 한숨 쉬는 니디아.
"어떻게 해서든지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이군요."
"나는 반드시 알아야겠어."
"네. 어차피 그리 머지않아 알게 될 일. 조금 이르게 안다 해서 각본이 틀어질 염려는 없겠지요. 좋아 요! 설명해줄게요."
부스럭. 니디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덧 하늘은 노을마저 저물어 어둑해지고 있는 상황. 별빛이 하나 둘 반짝이며 밤하늘에 자리해있다.
니디아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별이란 곧 운명. 이 세상의 영웅적인 존재들에게는 모두 자신을 상징하는 운명의 별을 지니고 있어 요. 별을 읽는다면 개개인의 운명을 읽어낼 수 있지요."
"별을 읽는다라…. 마법사들의 점 성술을 말하는건가?"
"점성술 같은 하찮은 것과 비교 해서는 곤란해요."
별을 읽는 것은 무한의 장막을 걷어내고 운명을, 미래를, 그리고 세상의 각본을 살피는 것.
오직 고위의 격을 지닌 이들만이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엘프여왕인 니디아 또한 고위의 격을 달성한 존재.
전대 엘프여왕인 엘리스만큼 정 확하게 읽을 수는 없더라도, 다소 조잡하게나마 별을 읽을 수 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밤하늘에 떠올라있는 별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저기, 남쪽에서 밝게 빛나는 황금색 별은 정복의 별. 제국 황제의 별이지요. 동쪽에서 타오르는 은회 색 별은 지배의 별, 연방 통령의 것이고요."
마이사 또한 고개를 들어 올려 밤하늘을 바라봤다. 허나 그녀는 곧 눈가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별들이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사는 시나리오의 존재였으나 그녀의 격은 일개 지성체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니디아가 볼 수 있는 것을 마이사는 볼 수 없었고, 니디 아가 읽는 세계의 각본을 마이사는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니디아는 설명을 계속했다.
"푸르게 타오르는 별은 마나의 별. 제 수하인 엘븐 가디언 마게브 의 것이에요. 붉게 타오르는 것은 화염의 별. 제피르의 것. 저 녹색 별은 제 것이네요. 수호의 별이지 요."
마이사는 고개를 내려 설명하고 있는 니디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황금빛으로 번들거 리고 있다.
그제야 마이사는 깨달을 수 있었다.
니디아는 단순한 시력으로 밤하늘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권능을 운용해 밤하늘의 장막을 꿰뚫어 운명을 읽고 있다.
지금 니디아가 바라보고 있는 형 형색색의 별들을, 마이사는 결코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저기 보이는 붉은 달은 광기의 천체. 흑마법사 크라함을 의미하고. 저기, 청회색으로 반짝이는 별은 전쟁의 별. 당신의 별이네요."
"전쟁의 별…."
순간 마이사는 한지훈과 처음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신분을 숨겼던 자신을 대뜸 찾아 내, 부관겸 잡일꾼으로 영입했던 한지훈.
그는 마이사에게 군략의 재능이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리고 눈앞의 니디아 또한 자신 에게 전쟁의 별을 지니고 있다 한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저기 보이는, 누구보다도 밝고 환하게 빛나는 별. 저것이 바로 '이름 없는 별'. 한지훈 씨가 지닌 별이에요."
니디아의 말에 마이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이사. 본래라면 일반격에 불과 한 당신은 별을 살필 수 없지만, 한지훈 씨의 각성으로 별이 활성화 되었어요. 덕분에 격이 모자란 당신 도 살필 수 있을거예요. 한번 찾아 보세요."
확실히, 보였다.
그녀의 정수리 위. 밤하늘 가장 드높은 곳에서 가장 환한 빛을 흩 뿌리는 별 하나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마이사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저것이, 이름 없는 별…."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고위의 격을 지닌 별."
확실히, 시야에 보이는 모든 별 들 중에서도 가장 밝은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드높은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유일하게 시나리오의 항상성에서 벗어난 존재. 이 세상의 주인공. 발전과 진화를 거듭해 언젠가는 신 이 될 존재. 그것이 바로 이름 없는 별이지요."
"신이라니…."
가만히 니디아의 말을 듣고 있던 마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이라니?
생뚱맞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마이사의 탐탁지 않은 기색을 느낀 것일까. 니디아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믿을 수 없겠지요. 한지훈 씨가 언젠가 신이 된다니."
"당연하지. 일개 인간이 신이 된 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야."
더불어 마이사 그녀는 신의 존재 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무신론자다.
니디아가 환하게 미소 짓고는 이어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한지훈 씨는 본래 이 세계 태생이 아니에요. 상 위차원의 존재였지요."
"상위차원? 그건 또 뭔…."
"이름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도 훨씬 상위에 존재하는 차원이지요."
물론 상위 차원이라 한들, 저쪽 세상이 더욱 우월한 세상이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위치의 차이였다.
상류의 작은 물살이 하류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상위차원의 존재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하위차원에 거대한 영향을 끼 칠 수 있다.
그리고 한지훈은 상위차원에서 건너온 존재.
이 세상의 그 어떤 지성체보다도 거대한 영향력과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한지훈 씨가 이름 없는 별이에요. 유일하게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존재. 이 세상의 주인공. 오직 한지훈 씨만이 예정된 멸망을 막아낼 수 있지요."
세상의 모든 지성체들에겐 정해 진 운명과 미래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시나리오.
하지만 한지훈은 본디 상위차원 의 존재. 완성된 시나리오에 속해있 지 않다.
그렇기에 오직 한지훈만이 유일 하게 시나리오를 개변시킬 수 있다.
마이사가 눈가를 찌푸린다.
"상위차원, 세계의 각본, 운명, 이름 없는 별…. 그리고 세계의 멸망이라."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니디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이사는 당장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오직 그만이 신이 되어 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니.
제정신으로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평소 종교를 비이성적이라 여겨 신뢰하지 않던 마이사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니디아의 이야기는 믿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마이사. 한지훈 씨는 각성했어 요."
문득 니디아가 그리 말했다. 마 이사는 니디아의 말에 다시금 집중 한다.
"가진 격의 일부를 해방했고, 고 대 환상종의 힘을 일부나마 다루는데 성공했지요. 덕분에 세계의 항상 성을 거스를 수 있게 되었지요."
"세계의 항상성이란 뭐지?"
"이 세상이 본래 정해진 각본대 로 흘러가도록 강제하는 힘이에요."
세계는 본래 정해진 흐름이 있다.
세계의 과거와 미래는 이미 완벽 하게 정해진 것.
예정된 미래를 바꾸려 시도한다 면 세계의 항상성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한지훈이 각성해 상위차 원의 격 일부를 드러내게 되었으니 , 세계의 항상성에 적극적으로 저항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나리오는 개변되어 가고 있으니 .
"이제부터는 시나리오가 크게 뒤 틀어질 거예요. 지금까지 일어났던 변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거대한 변화가 일겠죠."
니디아는 그리 읊조리고는 고개 숙였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침울해 보였다.
"많은 지성체가 죽게 될거에요."
각본의 변화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녀는 앞으로 무수히 많은 생명 이 스러질 것을 알고 있기에, 차마 표정을 필수 없었다.
니디아가 고개를 들어올려, 마이 사와 눈빛을 마주하며 고한다.
"마이사. 한지훈 씨를… 이름 없는 별을 도우세요. 그는 예정된 멸망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 그를 도와 '유물'을 수집하고 '대적 자'에 저항하세요."
"……."
"해야 할 말은 모두 했어요. 자, 그럼…."
그녀는 시선을 돌려 동쪽을 바라 봤다.
어느새 흙먼지가 가라앉아 확 트 인 시야. 부서진 성벽 너머로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한지훈과 마이사를 찾기 위한 제국 병사들일 터다.
니디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한지훈 씨를 안전한 곳으로 옮 길까요. 일단 환자니까요. 언제까지 이런 폐허에 방치할 수는 없지요."
"… 그건 동감이야."
마이사는 통신수정구를 집어들어 병사들을 호출했다.
연방 통령의 집무실. 무수히 많은 고위 군관들과 관료들이 도열해 있는 공간.
그곳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 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새끼들."
연방의 최고 권력자, 러셀 통령 이분노해 살기를 진하게 피워 올 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들어올려 지도를 노 려봤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이루어 진 중앙대륙 원정 과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중앙대륙의 동부해안에 상륙한 원정군. 그들은 엘프의 연안요새를 완전제압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숲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무려 백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 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멸이라니."
연방 원정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백만에 달하는 병사, 수만에 달 하는 기사들, 그리고 수천의 전투마법사가, 단 한번의 전쟁으로 모조리 죽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까드득.
러셀이 이를 갈며 읊조린다.
"어째서 실패한 것인가. 분명 원정은 성공했어야 할 터인데."
적을 압도하는 대군,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조력.
러셀은 원정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그만큼 연방의 국력은 강력했고, 원정에 투입된 인력과 자원은 너무나도 거대했으니까.
하지만 원정은 결국 실패했고, 이는 연방의 뼈아픈 손실로 되돌아 왔다.
이제는 손실을 감당 할 차례.
군관과 관료들이 하나둘 입을 열어 고한다.
"… 통령 각하. 서부 해안지방 일부에서 반란의 기색이 있습니다. 속히 군을 보내 진압해야 합니다."
"국고가 고갈 직전입니다. 너무 많은 전비를 소모하여 당장 내년 예산집행에 차질이 우려됩니다. 당장 세금을 추가로 걷어 들여야 합니다."
"패전으로 군 내부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감찰관들을 보내 내부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만…"
"너무 많은 병력이 소모되어 병력 공백지대가 생겨났습니다. 추가 로 병력을 충당해야 합니다. 통령 각하, 징집령을 내려주십시오."
원정실패의 여파로 지금 연방의 상태는 결코 좋지 않았다.
경제가 휘청이고, 군의 기강이 흔들리며, 지방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래서야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도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
후욱.
통령이 짜증어린 한숨을 내쉬며 지시한다.
"병력 공백지대에서 병사를 징집 하고, 긴급 증세조치를 발동한다. 세금과 병력을 충당해 국가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정화시켜라. 그리고, 지방에서 반란의 기색이 있다고?"
"그렇사옵니다. 통령 각하."
"진압하라. 연방에 따르지 않는 놈들에게 베풀어줄 자비는 없다. 해군과 지상군을 동원해 일거에 소탕 한다. 반란의 불씨는 초기에 진압해 야한다."
"명령을 따릅니다, 통령 각하!"
지시받은 군관과 관료들이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러셀 통령은 쯧 혀를 차고는 읊조렸다.
"이번 원정 실패의 책임은 흑마법사들도 피해갈 수 없다."
통령은 원하는 것이 있어 흑마법사들을 지원해왔고, 그들의 세력을 급격히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이번 중앙대륙 전쟁에서 그들을 유용하게 사용하고자 했 건만.
"놈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였 다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터."
정작 기대했던 흑마법사는 아군 병력과 반목했고, 전장에서는 제대로 된 힘을 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군 병력 수십만을 헛되이 소모해 쓸모없는 생체병기 를 만들기도했다.
'정리해야겠군.'
통령은 흑마법사가 예상외로 효 용성이 없자 쳐내고자 한다.
'놈들이 약속한 영생과 신격이 아깝지만. 놈들을 더 이상 믿을 수는 없다.'
그동안 지원한 자금과 물자가 아 가웠지만, 지금은 일단 모든 예산을 국가의 정상화로 돌려야 할 때.
그는 흑마법사들을 정리할 결심을 세웠다.
통령이 지시했다.
"전쟁국, 그리고 정보국 국장은 듣거라."
"예! 통령 각하. 하명하십시오."
"흑마법사를 축출하겠다."
그가 지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흑마법사들의 완전 축출작업.
통령의 말이 이어진다.
"쓸모없는 밥버러지 놈들은 더 이상 키울 의미가 없다. 놈들의 연구소와 마탑을 급습하고, 모든 흑마법사를 척살하라. 놈들의 수장 크라 함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대광장에서 처형하겠다."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철그럭, 철컥.
정보국 국장과 전쟁국 국장이 집무실에서 빠져나간다. 통령은 그들 이 그리 머지않아 모든 흑마법사들을 청소하고 임무를 완료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통령은 몰랐다.
이미 흑마법사들은 연방을 제압 할 준비를 끝내둔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당하는 것은 크라함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연방이라는 국가가 소멸할 때가 가까워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