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 드디어….
공중에 떠올라있던 크라함이 희 번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고개 돌려 서쪽을 바라본다. 요새가 있는 방향.
요새는 붕괴해가는 중이었다.
쿠르르르르….
성벽이 무너져내리고, 흑먼지가 치솟았다.
요새는 이내 흙먼지 세례에 완전히 삼켜지고 말았다.
뿌연 연기가 한지훈을, 그리고 그를 덮치기 위해 돌진했던 포식자 의 거체마저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게 된 상황.
하지만 크라함은 확신할 수 있었다.
- 드디어, 놈이 각성했다.
화르르르륵!
먼지구름 안쪽에서 푸른색 불꽃 이 타오른다. 마치 저까짓 흙먼지 따위로는 자신을 가릴 수 없다는 듯,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색 불꽃이었다.
그 어떤 마법이나 오러보다도 선 명한 광채.
크라함의 얼굴에 희열의 미소가 떠오른다.
- 이제 '그릇'은 완성되었다.
한지훈의 각성. 그리고 제대로 된 '격'의상승. 자신이 중앙대륙에서 노리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크라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황.
그가 나직이 자신의 수하를 호출한다.
- 테르본.
"부르셨습니까. 크라함, 나의 주인이시여."
화르륵.
크라함의 바로 옆에 불 길이 치솟고는, 직후 한 인영이 갑 작스레 등장한다. 그의 수하인 최상 급 흑마법사 테르본이었다.
크라함은 잠시간 요새방향을 바라보고는 지시했다.
- 모든 흑마법사를 돌려라. 이제 때가 그리 머지않았다. 동부대륙으로 귀환한다.
"귀환이십니까? 눈앞에 이름 없는 별의 신체가 있습니다. 놈의 신체를 확보한다면…."
- 아니. 놈의 신체를 확보하기엔 아직 이르다. 비록 각성해 그릇이 완성되었고, 각성 초기인 지금은 불안정하기에 쉽게 제압할 수 있으나,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았어. 계획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예정대로 진행 한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지켜보는 테르본은 눈치챌 수 있었다.
크라함 또한 아쉬워하고 있다.
바라던 한지훈의 신체를 얻을 기회를 지니게 되었음에도, 더더욱 완벽한 계획의 성공을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쯧. 크라함이 혀를 찬다.
- 조급함으로 계획을 망칠 정도 로 나는 무지하지 않다. 오랜 시간… 정말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상위차원의 신체다. 조금 더 기다리는 정도는 할 수 있지.
- 세계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만. 그건 나중에라도 차지할 수 있다. 굳이 지금 당장 얻을 필요는 없지. 이제 귀환 준비를 서둘 러라.
"알겠습니다. 우리의 주인, 위대 한 볼라바아의 종주이시여. 종주의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화르륵.
테르본이 사라지고, 크라함은 잠시 흙먼지 너머에 있을 한지훈을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 진다.
- 신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검은색 불길이 일어나 크라함의 신체를 집 어삼켰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흑마법사의 세력이 중앙대륙에서 철수한다.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의 홀로그램 이 떠올라있는 상태였다.
전혀 생소한 안내창은 아니었다.
내가 이 세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 벌써 여러 번이나 보아왔던 안내창이 었으니까.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관리자의 개입 안내창.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내창을 노려보았다.
'관리자. 속셈이 뭐냐.'
시스템 관리자라는 존재는 명백한 적도, 확고한 아군도 아니었다.
놈은 아마도 중립.
시나리오의 초창기 때는 적을 강화시키고 아군을 약화시켜 내게 시 련을 부여하는가 하면, 중반 이후 위기상황에서는 내게 미력하게나마 도움을 주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시스템 관리자라는 놈이 다시금 개입해왔다.
과연 놈은 이번에 나를 도와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몰아넣으려 하는 것일까.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관리자의 긴급조치 발동.]
[시간을 동결합니다.]
"뭐?"
나는 떠오른 홀로그램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멈춰있다.
시간이 멈췄다는 것은 비유도, 무엇도 아니었다.
세상이 멈췄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흙먼지가 공간에 못박힌 듯 멈춰서있다.
이쪽을 바라보던 니디아의 얼굴 표정도 굳어져있다.
저기, 요새의 잔해에 반쯤 파묻 혀있는 포식자 또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사고가 극한 가속되어 체감시간 이 느려지는 것이 아닌, 시간 그 자체가 완전하게 멈춰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갑작스러운 이변에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 있을 때.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연속된 알림음이 귓가를 때린다. 그에 나는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 정면에는 홀로그램들이 주르륵 나타나고 있었다.
[유저의 리미터가 모두 해제되었 음을 확인.]
[2단계 '격'의 달성을 확인.]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유물'의사용권한을 습득했습니다.]
[소유 중인 유물 : '리바이어던의 핵'.]
화르르르르르륵!
"크윽…!"
가슴팍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 났다.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 어, 예의 그 격렬한 기운이 일렁이는 물건을 꺼내들었다.
기운이 이는 것은 푸른색 수정구였다.
내가 남부대륙에서 취하고 바네 사가 정제했던 물건. 유물-리바이 어던의 핵. 주먹만한 수정구로 가공 되어있는 그것이 푸른색 불꽃을 일 으키며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때.
- 나를 깨운 것이 네놈인가.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 인간종이라. 그 하찮은 종족이 용케 여태까지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있단 말인가.
나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신체를 움직이는 것은커녕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는 것도, 눈 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이 목소리에 완전히 압도당 한 것이다.
너무나도 장엄한 존재를 마주했 기에.
비록 모습을 보인 것도, 가진 힘을 온전히 드러낸 것도 아니었지만.
그 힘의 극히 일부인 목소리만으로도 나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다.
- 그래…, 지금 나는 일시적으로 해방된 상태로군. 나를 봉인했던 존재가 네놈을 돕길 원하고 있어. 강제력이 느껴진다.
중후한 목소리가 계속해 뇌리를 울린다.
내 영혼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 전 대양을 지배했던 이몸이, 고작 하찮은 인간종 따위를 도와야 한다니. 마음에 들지 않도다. 허 나…
목소리에 어렸던 짜증어린 기색 이 점차 사그라지고, 의욕이 어리기 시작했다.
- 인간종 주제에 지성체의 격을 깨고 초월의 영역에 이르렀는가. 기 특하도다. 덕분에 별로 수고스럽지는 않아보이는군. 조금만 도와주겠 다, 인간종 초월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를 도 와준다는 것 같다.
- 인간의 초월자여. 내 힘의 편 린이나마 맛보아 보거라.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시간동결조치가 해제됩니다.]
* * *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힘이 폭사되었다.
그 힘은 너무나도 장중하고도 격렬했으며, 극도로 폭력적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
웅혼한 충격파가 일어 사방의 모든 것을 밀어냈다. 일렁이는 모래먼 지가 밀려나 사라지고, 거대한 파장 이 그 존재감을 드넓게 퍼트려갔다. 푸른색 빛기둥이 하늘높이 치솟는다.
"맙소사…."
요새방향을 주시하고 있던 마이 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법을 다루지 못하고 오 러 또한 운용할 수 없다. 마나감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그녀조차도, 저 강대 한 기운을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일반 지성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저곳에서 뿜어져나 오는 기운이 너무나도 막대했던 것 이다.
"타냐! 저건, 저기운은 도대체 뭐야'?!"
마이사는 자신의 앞에 선 타냐를 향해 그리 물었다.
엘븐 가디언인 그녀는 엘프의 고위직이었고, 고위직인 그녀라면 저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고 있으리란 추측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냐는 마이사의 질문에 미처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아아…."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엘프로서 선천적인 마나감응력이 높은 타냐다.
그런 그녀는 저기운을 온전히 느껴버렸고, 완전히 제압되어 털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마이사의 얼굴에 놀람이 어린다.
'…엘븐 가디언인 타냐가, 이토록 공포에 질릴 정도라니.'
그녀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요새 방향을 바라본다. 하늘 높이 치솟았 던 빛기둥이 점차 잦아들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계속해 요새방향을 주시 한다.
강대한 기운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른다.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충 만감이 심상을 진탕내고, 무엇이라 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이 영혼을 뒤흔들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일렁이고, 낙하 하던 파편무더기 따위가 바닥에 곤 두박질쳤다. 흩어졌던 흙먼지가 다시금 이곳저곳에 흐른다.
세계가 다시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짧은 꿈을 꾼 것만 같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고, 이상한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
허나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 네 적은 어디 있지?
예의 목소리가 여전히 내 귓가를 울리고 있었으니까.
목소리가 나에게 물어온다.
- 뒤편에 쓰러져있는 저 엘프가 너의 적인가?
그에 나는 고개 돌려 내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니디아가 쓰러져 있다. 아무래도 방금 전 갑작스러운 기운의 폭사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것 같다.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저자리에서 충분히 쉰다면 금세 제정신을 차리리라.
- 아니면, 저 앞의 생체병기가 너의 적인가?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포식자가 요새 잔해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 크르르르르르….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인지. 놈이 요새 잔해를 걷어내며 일어섰다.
그 커다란 육신이 움직이며 모처럼 가라앉았던 흙먼지가 다시 일어 났다.
다시금 마주하게 된 적.
내 눈가에 절로 힘이 실린다.
그러자 피식, 가소롭다는 비웃음 이 들려온다.
- 저 조잡한 생체병기가 바로 너 의 적인가. 저런 가치없는 걸 처리 하기 위해 내 힘을 사용한다니. 우스운 일이로다.
조잡한 생체병기. 리바이어던의 핵은 포식자를 그리 평가했다.
수십만의 연방군 병사를 갈아넣 어 만든 강력한 생체병기가 조잡하 다니.
하긴, 아득한 먼 옛날 세상의 삼 분지 일을 지배했던 환상종이다.
그토록 강력한 존재에게 저 포식 자는 우스운 사냥감으로 보일 수밖 에.
나는 기대했다.
'이길 수 있을지도.'
지금 이 순간 심장에서 뿜어져나 오는 강대한 힘이 범상치 않다.
마나가 끝없이 축적되어 간다.
검날에서린 오러는 계속 그 밝 기가 강해지더니, 이윽고 완전한 백색으로 물들어갔다. 오러의 응집이 극에 달해 색깔마저 변화한 것이다.
극도의 전능감이 한없이 차오른다. 강해지는 희열과 쾌감이 척수를 타고 올랐다.
지금이라면 그 어떠한 적이라도 단칼에 베어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물며 눈앞의 포식자 따위. 이 힘이라면 금세 처리할 수 있을 터.
나는 장검을 들어올렸다.
쿠르르르르르르
* * *
고작 검을 들어올리는 행위에 불과함에도 장중한 파장이 대기를 진동케한다. 그만큼 지금 내 신체에 실린 힘은 실로 거대했다.
하지만 그때.
- 쯧. 어떻게 인간종이 초월자가 된지 의아했다만. 역시 네놈은 정상적으로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군.
목소리가 울려옴과 동시.
퍼억!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내 오른손. 방금 전 검을 쥐어올렸던 신체 부위였다. 그곳을 바라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내 손목에서 어깨까지, 모든 핏 줄이 터져나가 있었다.
이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터져나간 핏줄은 직후 다시 수복 되었다. 팔이 수복됨과 동시 파괴되었다. 오른팔이 수복과 파괴를 반복 하며 점차 피폐해져간다.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 네놈은 나를 봉인시켰던 존재에 의해 강제로 강화된 상태다. 그것도 고작 몇 년만에. 때문에 영혼의 격은 초월이지만 신체의 격은 아직도 지성체의 영역이로군. 내 힘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것이 당 연.
즉, 지금 내 상태는 비닐봉투 안에 용암을 가득 채워 넣은 꼴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초월자로 각성해 유물의 힘을 운 용하게 되었으나, 그거대한 힘을 신체가 못 버티고 있는 것이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인 셈이다.
- 이래서야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네 신체가 터져 소멸하겠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으니-.
목소리는 나름의 해결방법을 알 고 있는 듯했다.
- 네놈의 육신을 조율하겠다. 영 광으로 여기도록 하거라. 초월자.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