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전부라니! 내 휘하 병사 모두를 실험체로 삼겠다는 소리인가?! 크 라함!"
- 그렇다. 헤르베르트.
"그게 무슨…!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이전에는 분명 병력의 일부만을 받겠다 했던 크라함이었다.
헌데 이제 와서 남은 병력의 모두를 내놓으라니.
그것도 실험체로서.
헤르베르트의 얼굴 표정이 절로 험악해진다.
'수락할 수 없다!'
아직도 연방군에게는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남아있다.
그들 중 일부라면 몰라도, 전부 를 흑마법사의 실험체로 넘기는 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헤르베르 트였다.
"빌어먹을! 역시 흑마법사 놈들은 믿을 수 없다. 네놈의 도움은 없는 걸로 하지. 전군! 철수하라! 잔여 병력을 추슬러 동쪽으로 회군 한다!"
헤르베르트는 크라함의 제안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거절하려했다.
하지만 그가 막 입에 회군이라는 단어를 담음과 거의 동시에.
-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크라함이 가볍게 손을 휘젓는다.
직후 검은색 불길이 사령부 막사 전체에 몰아쳤다.
화르르르르륵!
검은색 불꽃이 참모들을 순식간에 태워 증발시킨다.
막사 내부에 자리해있던 참모와 군관들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 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무슨 짓을 하는거냐! 크라함!"
그 모습에 헤르베르트는 당혹성을 내질렀다.
크라함이 클클 웃는다.
- 실험체 수십만을 가질 기회다. 그런 기회를 내가 놓칠 것 같나?
크라함이 재차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직후 이변이 일었다.
쿠드득, 우드드득….
소멸하였던 사령부 막사 내 참모 와 지휘관들이 다시금 소생하기 시작했다.
지면에서 뼈가 생성되더니, 직후 내장과 피육이 재생되어 붙어갔다.
아주 잠깐 사이, 참모와 지휘관 들은 방금 전 일은 아무것도 아니 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되살아난 참모와 지휘관 들의 얼굴을 본 직후.
헤르베르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소생이 아니다. 이건 복제야!'
되살아난 참모들의 얼굴은 확실히 자신이 알던 그들이 맞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지와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극장에서 사용되는 꼭두각 시인형처럼, 무표정한 표정만이 자리해있는 것이다.
헤르베르트가 크라함을 향해 노 호성을 내지른다.
"네놈! 우리 원정군을 네놈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내 참모들을 복 제하는건가!"
- 머리가 비진 않았군. 맞다. 군대란 참다루기 쉬운 집단이지. 상 위자 몇 명만 꼭두각시로 만들어둔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니 말이야.
"크라하아아암!"
부웅!
헤르베르트가 시퍼런 오러가 이글거리는 장검을 휘두르며 크라함 에게 돌진한다.
물론 그의 저항은 무력했다.
쩌엉!
허공에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나 가는 헤르베르트. 그 꼴을 바라본 크라함이 쯧쯧 혀를 찬다.
- 쓸데없는 곳에 힘을 빼는군. 네놈의 격으로는 나를 결코 어찌할 수 없다.
아예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것 일까. 크라함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이어 말했다.
- 네놈은 그곳에서 지켜봐라. 네 병사들이 어떻게 재활용되는지를. 꽤 재밌는 볼거리일거다.
크라함이 손짓하고, 꼭두각시로 변한 참모와 군관들이 비콘을 운용 해 병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헤르베르트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운다.
*
"연방군 병력이 물러간다!"
"와아아아아아!"
요새를 지키고 있던 제국군 병사 와 지휘관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나는 성벽 위에서 요새 내부의 모습과 주변 경관을 살폈다.
연방군이 회군하고 있다.
- 부우우우우우우.
길게 울리는 뿔피리 소리. 연방 군 기수들이 깃발을 치켜든다. 깃발 의 색은 검은색. 패배했으니 전투지 역에서 가능한 한 빠르게 후퇴하라는 뜻의 신호기였다.
연방군이 퇴각을 시작했다.
요새 내부에서 전투하던 병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요새 밖에서 교전 중이던 적들 또한 본 진이 위치해 있는 동쪽 방향으로 물러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어찌 이겼네."
"네. 이겼어요. 한지훈 씨."
누군가가 걸어오며 내 혼잣말에 맞장구친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렸고,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 입가에 픽 웃음이 어린다.
"니디아, 언제 온거야?"
"방금 전이요. 타냐가 지휘하는 엘프 전사들과 함께 요새 내 전투 를 지원했지요."
니디아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 옆에 섰다. 그녀가 나직이 이어 말한다.
"승리했네요."
"그래. 승리했어."
"저 연방군 병사들. 어찌하실건가 요?"
니디아가 후퇴하고 있는 연방측 병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작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야지."
군이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을 때는 바로 도망칠 때다.
그리고 지금 연방군은 패배로 인 해 아무런 대열조차 이루지 않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상황.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통신수정구를 집어 들고 지시했다.
"전군. 대열을 정비하라. 후퇴하는 적의 잔당을 섬멸한다. 오스카는 보병대를 재정비하고, 베르겐은 기사단의 충격돌진 진형을 꾸린다."
- 알았다. 한지훈.
- 추격섬멸인가. 내가 가장 좋아 하는 전투지.
"마이사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퇴각로를 차단한다. 할 수 있겠나?"
- 가능할 것 같은데. 한번 해보 겠어.
"제피르. 마나포션의 보급은 어떻 지?"
- 지원군이 대량의 마나포션을 전달해줬다. 지금은 마나를 회복 중 이다. 약간의 휴식시간만 있다면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겠군.
"좋아. 니디아. 너는 타냐와 함께 엘프전사들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렇게 할게요. 한지훈 씨."
지금 전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다.
기나긴 요새 공략으로인 해 지칠 대로 지친 연방군.
놈들은 급속 퇴각 중이지만 지쳐 있기에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 으며, 진형 또한 완전히 무너져있다.
반면 막 전장에 도착한 제국군 병사들은 힘이 차고 넘치는 상황이 었으니 .
그리 어렵지 않게 놈들을 추격해 모조리 갈아버릴 수 있다.
'그동안 당한 만큼 복수해준다.'
그렇게 내가 후퇴하는 연방군의 추적섬멸을 준비하고 있을 때.
- 사령관 각하! 적진에 이상이 있습니다!
다급한 휘하 장교의 보고가 통신 망을 울린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상이 있다라. 그게 무슨 소리 이지?"
- …적들이, 서로를 죽여 없애고 있습니다.
"뭐?"
이게 뭔 개소리야.
나는 시선을 돌려 적진을 바라보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암흑색 기운이 하나둘 일렁이고 있는 연방군 본영.
직감했다.
'크라함.'
놈이 움직인 것이다.
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연방 군 본진을 주시한다.
무언가 이변이 일기 시작한다.
* * *
- 좋아. '재료'들이 얼추 모였군.
크라함은 연방군 본영 상공에 오연히 떠올라, 나직이 읊조렸다. 그 의 붉은색 안광이 지상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 이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가까스로 전투에서 빠져나온 연방군 병력이었다.
그들을 잠시 주시하던 크라함.
그가 읊조린다.
- 이 정도로 많은 재료라면 꽤 괜찮은 병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이지.
크라함이 품속에서 작은 구슬 몇 개를 꺼내 지상으로 내던졌다.
검은색 구슬은 하강할수록 진한 기운을 발하더니, 막 지상에 당도할 무렵.
퍼억! 화아아아악!
터져나갔다. 검은색 기운이 흩어 지며 숨을 고르고 있던 병사들을 덮쳐갔다.
"크아아아아!"
"이 검은 연기는 뭐야!"
"콜록! 콜록!"
검은 연기를 흡입한 수천의 병사들이 기침하며 바닥에 쓰러지고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라함이 흐 뭇한 미소를 짓는다.
- 쓰레기도 많은 수가 모인다면 그 힘은 거대해지지.
이후 연기를 흡입했던 병사들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쓰러져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지면에서 비척비척 일어선다. 일어선 병사들의 눈빛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크라함이 지시한다.
- 서로 죽고 죽여, 힘을 빼앗아라.
그가 지시한 직후.
"크아아아아아!"
수천에 달하는 변이 병사들이 제 아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장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박으 며, 서로가 서로를 죽여나간다.
붉은색 핏물이 쉼 없이 튀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아아아악!"
변이한 병사들의 힘은 이상하게 도 강력했다.
장검을 휘두르면 갑주와 몸통을 함께 절삭해버렸으며, 반대로 멀쩡 한 병사들이 내지른 창칼은 변이한 병사의 피부를 꿰뚫지 못했다.
퍼억, 콰직! 우드드득.
변이한 수백의 병사가 제 아군들을 계속해 죽여나간다.
그들이 아군을 죽이면 죽일수록 그들의 몸집이 커지고, 가진 기세는 흉포해졌다.
마치 자신이 죽인 아군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 크아아아아아!
수천의 변이병사들은 모든 멀쩡한 병사들을 죽여 없앴고, 포효를 내질렀다.
그들의 몸뚱이는 몹시나 거대해 져 있었다. 그 크기는 2층 건물과 맞먹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크라함이 클클 웃는다.
- 과연. 예상대로군. 평범한 지성 체는 '그릇'의 크기가 너무나도 작 으니 , 가진 육신을 크게 변이해 빼 앗은 힘을 억지로 축적하는 것인가.
이제는 거인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라함은 멈추 지 않는다.
- 계속해 서로를 죽여라. 가진 힘을 하나로 응집시켜라.
- 크아아아아아!
크라함의 지시에, 그들이 또다시 서로를 도륙해갔다.
2층 건물에 달하는 거인들이 지면을 울리며 상대방을 죽여 없앴다. 바위처럼 커다란 팔다리가 비산하고, 핏물이 하늘을 뒤덮을 듯 치솟 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를 도륙하던 거인들 대다수 가죽어나가고, 오직 단 하나의 개 체만이 오연히 서 있게 되었다.
크라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 덕인다.
- 역시 괜찮은 병기가 만들어졌 군.
이제는 단순한 거인을 넘어, 오우거조차 뛰어넘는 크기를 지닌 무 언가가 만들어져있는 상태였다.
3층 건물에 달할 정도로 무지막 지한 거체를 지닌 괴물.
외피는 어느새 검은빛으로 물들 었으며, 눈가에는 붉은색 기운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격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이 맥동했다.
사악한 암흑색 기운이 그의 주변을 맴돈다.
-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의 첫 번째 '포식자'.
크라함이 손을 들어 올려 서쪽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요새와, 인근에서 한창 대열을 정비 중이던 제국군의 군집 단이 자리해있다.
물론 제국군의 그 누구도 움직이 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이상현상에 얼어붙은 채 그저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
크라함이 포식자에게 지시한다.
- 저 잡졸들을 죽여 없애고, '이름 없는 별'을 잡아 내게 가져와라.
- 크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쿵!
거인이 그 육중한 덩치를 움직여, 제국군의 전열을 향해 달려갔다.
지면이 뒤흔들린다.
"미친."
내 옆에서 있던 니디아가 나직 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나 또한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나는 저 괴물의 정체를 알 고 있다.
'포식자.'
이전 시나리오의 극후반, 대전 말기. 크라함이 내게 생산을 제의했 던 키메라병기 중 하나였다.
[크라함]
[혹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한지훈 제국 황제 폐하. '포식 자'의 생산을 허락해 주십시오. 고작 수십만의 인명만 소모한다면 썩 괜찮은 전쟁병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육신으로 성벽을 부수고, 요새를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공할 만한 마법저항력에, 오우거를 압도하는 강력한 힘!"]
["다수의 포식자만 운용한다면 북부대륙 정복은 몹시 쉬워질 것입 니다."]
당연히, 당시의 나는 크라함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수십만의 인명을 희생해 고작 하나의 개체를 만든다니. 그 효율이 너무나도 극악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크라함은 연방군 잔당 병사 수십 만의 목숨을 희생해, 한 개체의 포 식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확신했다.
'크라함은 이전 시나리오의 경지 를 이미 온전히 회복했다.'
아니. 어쩌면 이전 시나리오의 경지, 그이상일 수도 있다.
인간의 완전한 소생, 광인의 등장, 그리고 저기 보이는 포식자의 연성까지.
녀석은 어느새 이전 시나리오의 경지를 회복하는 걸 넘어서, 그이상의 영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연방의 지원 덕분에 가능 했던 일이겠지.
문득 옆에서 있던 니디아가 묻 는다.
"저거.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하냐니. 그야…."
나는 통신수정구를 쥐어들었다.
"처리해야지."
상황은 변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같다.
적의 완전한 섬멸.
섬멸해야 할 적이 수십만 연방군 패잔병이 아닌, 흑마법사의 생체병 기로 바뀌었을 뿐.
나는 통신수정구를 통해 지시했다.
"제피르. 그리고 마게브. 가능한 한 최대의 화력을 저 괴물새끼에게 퍼붓는다."
그 즉시 하늘 높이, 다수의 광역 마법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