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군기가 펄럭이고, 신호기가 우수수 올라온다.
신호기의 색은 붉은색. 전진을 의미하는 색깔이다.
헤르베르트가 크게 소리쳤다.
- 진격! 진격하라!
헤르베르트의 목소라가 드넓은 전장 전역을 울렸다.
오러가 가미된 웅혼한 목소리.
헤르베르트는 최상급의 마나를 지닌 고위 기사였으며, 그렇기에 그 의 목소리는 수십만에 달하는 연방 대군측이들을 수 있도록 드넓게 퍼졌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는 금세 묻혀버리고 만다.
와아아아아아-!
진군 명령에 함성을 내지르는 연 방의 병사들. 그들의 함성소리가 천 지를 뒤흔든다.
연방군 병사들의 수는 무려 60만에 달했고, 제아무리 고위기사의 목소리라도 그거대한 함성에 금세 묻혀버릴 만했다.
병사들이 발걸음을 옮긴다.
쿵 쿵 쿵 쿵!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가 한데 뭉쳐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기 시작 한다.
군 훈련에서 가장 처음 하는 것 이 바로 제식훈련.
행군에서 발을 맞추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더구나 여기 있는 연방 원정군은 모조리 정규군 소속이다. 이자리에서 발맞춰 걷지 못하는 머저리는 없다.
그렇게 60만에 달하는 대군이 발 맞춰 걷는다.
그들의 발구름 소리가 땅을 울리고, 먼지를 일으켰다. 연방의 군세 가 그 육중한 덩치를 이끌고 점차 기동을 시작한다.
물론 움직이는 것은 보병대뿐만 이 아니었다.
쿠르르르르….
바퀴가 거친 지면을 밀고 둔탁한 소음을 울려댔다.
투석기, 발리스타 같은 투사형 공성병기부터.
원거리 공격을 막는 방벽차.
성 위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공성탑과 사다리차.
그리고 성문을 부수고 내부로의 길을 뚫는 충차까지.
공성병기 도합 수천여 개가 보병대와 함께 움직이며 나아간다.
수십만의 병력과 수천의 공성병 기가 일제히 움직이며 나아가는, 그 압도적인 장면이란!
관측탑 위에서 휘하 병력을 지켜 보고 있던 헤르베르트.
'승리할 수 있다.'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헤르베르트의 날카로운 눈빛이 진군해가는 연방군 병력들을 ?는다.
'사기는 회복했고.'
병사들의 표정은 요 며칠 전에 비해 확연히 나아진 상태였다.
고작 며칠이라 하나 군영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거대한 집단이 하나로 뭉쳐 이쪽의 수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더해 가진 보급품에서 결코 적지 않은 고기를 풀어 잘 먹이기까지 했으니 . 사기가 올라가지 않을 이유 가 없다.
그가 시선을 돌려 요새 방향을 바라본다.
'적은 위축되었다.'
꽤나 먼 거리였으나, 고위 기사 인 그였기에 요새 위에 올라서있는 적들의 표정이 보인다.
요새 위를 지키고 있는 제국군 병사들의 표정에는 아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평선을 이루고 있던 거대하고 도 웅장한 대규모 군세가 그들을 향해 몰려가고 있으니 , 압도당 할 수 밖에 없다.
저 60만 대군을 지휘하는 헤르베 르트 그 자신조차 가슴이 뛸 정도인데, 요새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적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만약 그들의 정예도가 조금이라 도 뒤떨어졌다면 지금 당장 탈주하 거나 항복해 전투를 포기하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투항하지는 않는군.'
제국군 병력의 정예도가 상당한 것인지, 혹은 충분히 정신무장을 다 져놓은 것인지.
그들은 백기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설치되어 있는 발리스타 를 하나둘 장전하며 전투의지를 내 비칠 뿐.
내심 적이 공포에 휩싸여 순순히 항복하는 것을 바란 헤르베르트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미 이쪽의 승기는 명백.
저런 기괴한 요새 따위, 금세 함락시킬 자신이 있는 헤르베르트였다.
그가 다시금 크게 외친다.
"적의 요새를 쳐라! 제국놈들을 쓸어버리고, 우리 연방의 위대함을 보이는거다!"
와아아아아아? !
연방군의 우레와도 같은 함성소리가 엘프의 숲을 울린다.
연방 원정군이 전진해간다.
- 연방군이 3번 요새를 노리고 기동하고 있습니다!
- 놈들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시간!
- 어서 빨리 오셔야 합니다!
"가는 중이야!"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전투마를 타고 달린다. 내 몸이 크게 흔들리고,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욱, 숨을 고르며 생각해본다.
'3번 요새라. 북쪽 방면이로군.'
이쪽이 축성한 성형요새는 도합 10개로, 엘프의 숲 동쪽 방면을 울타리로 빙 둘러치듯 설치되어있다.
최북단 제1요새부터.
최남단의 제10요새까지.
그중 제3요새는 비교적 북쪽지역에 속한다.
나는 새로운 통신을 연결했다.
"마이사!"
- 보고는 이미 받았다. 연방군이 3번 요새를 향해 오고 있다는데 . 지금 그리로 가고 있는 건가, 한지훈?
"그래."
나는 평상시 5번 요새에서 대기 중이었다. 연방군이 움직인다면 바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위치가 다름 아닌 5번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방군은 3번 요새를 노리고 쳐들어오고 있으며, 나는 해당 요새를 지휘하기 위해 그쪽으로 달 려가고 있는 와중인 것.
마이사의 대답이 들려온다.
- 그래. 우리 주력군도 방금 군을 출병시켰다. 도합 18만 병력. 가능한 빠른 속도로 행군해가고 있는 중이야.
"도착 예정시간은?"
- 엘프에게 물어보니 기후가 변화할 예정은 없다는군. 이전에 예상 했던 대로 약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을거다.
"최대한 서둘러. 너희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지."
- …무운을 빌지. 죽지 마라 한지훈. 절대로.
"그래."
사실 나처럼 전투마를 타고 전력 질주한다면 대략 네 시간밖에 안 걸릴 거리였으나, 주력군 절대다수는 보병이다. 더해 함께 움직일 보급마차까지 딸려있으니 , 나만큼 빨리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이틀의 시간을 버텨야 할 상황이니.
'1만의 병력으로 60만 대군을 상대해야 한다.'
사실 미친 짓거리나 다름없다.
무려 60만.
방어의 이점이 있다 해도 병력차 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명심해야한다.
'이쪽의 목표는 적의 섬멸이 아니다. 지연이야.'
이틀 정도 방어하는 것뿐이라면.
충분히 할만하다.
그러니까, 이틀 동안 연방새끼들 의 진을 잔뜩 빼놓고. 그이후 아 군 주력군이 덮친다면 승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해내보일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는 전투마를 타고 3번 요새로 향한다.
"사령관 각하를 뵙습니다!"
"경례는 나중에.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었지?"
3번 요새에 도착한 직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요새를 맡은 지휘관에게 그리 물었다.
그에 그가 시선을 돌려, 요새 밖 동쪽 방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연방군이 모습을 드 러냈습니다. 지금은 공세 전 진형을 가다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방군 진형을 바라봤다.
그야말로 인간으로 이루어진 대 지가 저 요새 성벽 밖에 펼쳐져 있다.
마치 지평선을 이루듯 끝이 보이 지 않는 연방군의 군세.
놈들의 수는 턱없이 많았고, 녀석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와아아아아? !
크게 울려오는 함성소리. 천지를 뒤흔들 듯 전장 전역을 울린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제국군 병사들을 바라봤다.
"망할. 저게 다 인간이라니."
"죽지 않아. 나는 죽지 않아. 나는 죽지 않…."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거다. 개같은 연방 새끼들…!"
꽤나 의외라고 할까.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제국군 병사들의 표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양호했다.
'적의 숫자에 압도되어 모랄빵 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
정작 병사들은 발리스타를 장전 하거나, 하나둘 화살에 시위를 먹이는 등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예상 외의 모습.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사령관 각하. 말씀 한마디 올 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바로 옆에 있던 요새장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해보거라."
"각하께서는, 저희 일반 병사와 지휘관들이 나약하고 어리숙해 보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전장을 뒤흔 들 강력한 마법도, 적의 진형을 관통할 오러도 없이 그저 이하찮은 육체밖에 없으니까요."
"… 음."
솔직히 뜨끔했기에, 내 입가에서 절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나는 일반 병사들을 약하디 약한 잡졸로밖에 보지 않았었다.
말로는 내가 이끄는 북부군이 정 예군이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강군 이다 자부해왔지만.
그래봤자 일반병은 일반병.
아무리 많은 훈련과 실전 경험을 쌓더라도, 가진 무력과 정신력은 기사나 마법사들에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그리 생각하며 저들 일반병들을 내심 하찮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저희 보병대가 기사나 마법사보다 약하단 것은 사실입니다 만…."
허허 웃는 요새장.
그제야 요새장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년인의 얼굴. 과거 나를 이끌 어주던 그레드 천인장이 생각날 정도로, 인자하고도 강인한 얼굴이다.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이 요새장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 로. 아니, 기억은커녕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않을 정도로.
저 요새장이란 인물을 하찮게 보고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요새장뿐만이 아니다.
이자리에 있는 모든 병사들.
그들을 굳이 기억하거나 살피려 하지 않았다.
만약 살펴본다 한들, 사기나 무 장상태 등 직간접적으로 전투에 영향을 끼칠 만한 것들을 보았을 뿐.
저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하찮은 것을 대하는 것처럼.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온다.
'어느새 나는 병사들을 일개 게임 속 유닛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가진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일 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안일해진걸 까.
과거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를 플레이 할 때처럼, 어느새 저들을 모니터 너머 존재마냥 단순한 숫자로 취급했었다.
그저 저들을 반상위의 장기말로 보아왔다.
"저희 보병대 또한 제국의 충성 스러운 검이자 방패."
요새장은 그러한 내 태도를 눈치 채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 또한 제국의 군인.
"영웅이신 한지훈 사령관 각하께 서 보시기엔, 턱없이 약하고 못나 보이시겠지만. 저희 보병들을 믿어 주십시오."
하찮게 보지 마라고.
믿음을 달라고.
"각하. 저희는 죽음에 죽음을 쌓아 승리로 향하는 길을 기어코 만들어낼 것입니다."
반드시 승리하겠노라고 말이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
요새장이 그리 말하고는, 척 열 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가 두 눈을 감고 입을 연다.
"주제넘은 소리였다면 송구합니다, 각하.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것일까. 그가 마른침을 삼킨다.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오르내리는 목울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내가 미소 짓는 와중에도, 요새 장은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스스로 건방진 소리를 했다 여겨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 나에게 충언을 한 이다.
헌데 처벌이라니?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페르디난트 리히트호펜."
제복 명찰에 쓰여진 그의 이름이었다.
"…예! 각하."
"역시 리히트호펜가야. 수백 년 동안 제국 변경을 수호한 그대의 가문처럼, 그대 또한 기개 높구나."
"저의 가문을 알고계십니까? 제 가문은 변경백 아래에 붙어있는 일 개방계 남작가에 불과합니다만."
"당연히 알고 있지. 그대의 가주 를 본 적도 있는걸."
과거, 아직 귀족우월주의 파벌이 건재할 적. 저 가문의 가주를 본 적이 있다.
당시 리히트호펜 가주는 황제파 귀족들 중 하나로, 꽤 당차고 기개 있던 인물로 기억한다.
그런 인물의 후계다.
선대의 기질을 물려받아 똑같이 당당한 성격을 지녔고, 그렇기에 이 까마득한 계급 차에도 불구하고 내 게 충언을 해온 것이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기분이다. 내 오점을 수정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이니.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자네의 말이 맞다. 나는 보병대를 하찮게 보고 있었어. 어차 피 전장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거라고. 기껏해야 쪽수만 많은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의 헌신과 용기를 평가절하했지."
"… 각하."
"어리석은 일이야. 사실 평범한 그들의 용기야말로 , 그 어떤 강자의 용기보다도 대단하며 고귀할 것일 지언데. 병사출신으로 이자리까지 올라왔음에도 그것 하나 헤아리지 못하다니.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페르디난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처음에는 처벌받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더니, 이후로는 송구해했고, 다음으로는 감명 받은 듯 눈을 크 게 떴다.
자신의 직언에 의해 반성하는 까 마득히 높은 상관이라.
아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겠지.
나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 드려준 뒤, 성벽 위를 천천히 걸어 가며 읊조렸다.
"그럼. 전투 전에 사기를 한번 끌어올려 볼까."
나도 모르게 병사들을 하찮게 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 회하고자, 병사들에게 힘을 보태주 어 사기를 드높이려 한다.
쉽고 간단하게 사기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알고 있다.
폐부 가득 마나를 담아 크게 외쳤다.
- 제국의 건아들이여!
큰 전투 전 연설은 일종의 클리 셰다.
내 마나어린 웅혼한 목소리가 요새 전체를 쩌렁쩌렁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