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연방 원정군의 최고사령부 막사.
"제국놈들이 회군하는군."
헤르베르트 방겐하임 원정군 사령관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 에는 제국군의 예상 경로가 표기되어 있었다.
기동전을 펼쳐 무려 4개 작전군을 전멸시킨 제국의 군세. 그들이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한 채 서쪽 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명백한 회군이었다.
쯧. 헤르베르트가 혀를 찬다.
"건방진 놈들. 더 이상 이쪽의 정찰조를 사냥하지 않는군. 어차피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건가."
제국군의 회군을 알아낼 수 있었 던 이유.
그들이 더 이상 연방측의 척후병을 사냥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동안 연방군은 제국군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경로를 그리며 기 동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보냈던 척후병들이 족족 사냥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국군이 연방측 척후를 가만히 방치하고 있었다.
다만 회군하는 행군 속도를 높여 보다 빠르게 귀환하고자 할 뿐.
어차피 인접한 작전군을 모조리 섬멸해버렸기에.
그리하여 위치가 노출된다 한들, 자신을 칠 적의 병력이 근방에 없음을 확신하고 있기에.
굳이 품을 들여 연방의 척후조를 사냥하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행군 속도를 높여 신속하게 복귀하고자 하는 것이다.
"망할."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게 귀환하고 있는 제국군. 그들을 바라보는 헤르베르트의 가슴속에 진한 패배 감이 차올랐다.
완벽한 패배였다.
제국군의 기동전에 의해 4개 작 전군, 4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 이 증발했다.
반면 제국놈들의 손실은 기껏해야 5만여 명으로 추정될 뿐.
후우우.
헤르베르트가 답답한 심정에 긴 한숨을 내쉰다.
"전대 가주들을 볼 낯이 없군."
헤르베르트 방겐하임.
방겐하임 공작가의 가주이자, 연 방 원정군 100만을 이끄는 대장군.
그는 연방 군부의 핵심인사였다.
한때 전쟁국의 차기 국장으로 거 론될 정도로 실력과 공훈을 인정받 았으며, 명문 공작가의 가주라는 정치적 기반 또한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는 전쟁국 국장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중앙대륙 원정군 사령관에 자원했다.
이번 중앙대륙 원정을 성공시키 기만 한다면 '중앙대륙 정복'이라 는,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세워 자신의 가문을 드높일 수 있다 여 겼기 때문이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원정군 사령관 자리를 맡지 않았을 터인데."
그는 전쟁국 국장자리를 걷어차고, 원정군 사령관직에 자원한 과거 의자신을 저주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100만이라는 대군이 동원된 전쟁 이다.
더해 그 구성원들 또한 연방의 정규군으로서 충분히 단련되어 있으며, 동원된 물자와 예산 또한 압 도적.
당시 그 누구도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헤르베르트가 사령부 막사 내에 자리한 장교와 참모들의 표정을 읽 어본다.
'패색이 돌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최고사령부에 위치한 저들 장교 와 참모들의 표정은 꺼멓게 죽어가 고 있었다.
이어진 패전과 막대한 병력의 손실로 인해, 사기가 진창 아래까지 처박힌 것이다.
이곳 최고사령부 내에 자리한 장 교와 참모들은 자신의 측근들이다.
그런 측근들이 최고 지휘관인 자신의 앞에서조차 저런 표정을 보이 고 있는데, 일반 장교들은 어떠할 까.
아무리 입단속을 단단히 한들, 참모와 장교들의 우울한 분위기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원정군 전체에 패색이 감돌고 있을 것이리라.
중간 장교부터 시작해 말단 병사들까지, 이번 전쟁의 패전을 하나둘 입에 올리고 있겠지.
'어찌해야 하는가.'
총체적 난국이었다.
막대한 병력의 손실. 추락하는 사기. 느려지는 진군 속도. 하루하 루 지연되는 전쟁 계획.
헤르베르트는 이번 원정전쟁이 벌써부터 삐거덕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스 치고 지나간다.
- 네 같잖은 군대의 일부를 내게 바쳐라. 그리한다면 제국군 따위, 순식간에 없애주지.
불길한 흑마법사, 크라함이 자신 에게 했던 말.
군대의 일부를 자신에게 바친다 면 제국군을 물리쳐주겠다는 그의 제안.
'안된다!'
몰아치는 번뇌에 헤르베르트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라함의 제안은 악마의 유혹이었다.
흑마법사와 협력한 이들 중 좋은 결말을 맞이한 이는 결코 없다.
하지만.
'결국 원정을 실패할 바에는….'
그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패배하느니, 차라리 흑마법사의 힘을 빌려서라도 승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
고민하는 헤르베르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의 고뇌가 길게 이어졌다.
중부대륙 어딘가에 자리해있는 깊숙한 지하 동굴 속. 흑마법사들의 거점.
크라함이 입을 열어 물었다.
- 놈들이 거절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종주 이시여."
크라함의 물음에, 그를 보좌하는 최상급 흑마법사 테르본이 대답했다.
테르본의 말이 이어진다.
"헤르베르트 사령관이 저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세계수 공략은 자신들 군의 힘만으로 진행한다는 군요."
- 클클. 멍청한 놈이로군.
테르본의 대답을 들은 크라함이 낮게 비웃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헤르베르 트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보였다.
- 상대는 다름 아닌 그 한지훈이다. 헤르베르트 그놈이 얼마나 많은 대군을 이끌고 왔든 상관없어. 한지훈은 승리할 것이다.
크라함은 한지훈이라는 인물을 잘 알고 있다.
전생에 자신이 보좌하던 인물이 었으니 .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한지훈은 명실상부 전쟁의 지배자였다.
그가 참여하는 전쟁은 반드시 그 의 승리로 끝난다.
상위차원의 격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시나리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름 없는 별'의 힘을 지 니고 있기에.
별의 힘과 한지훈의 격을 파훼할 수 있는 흑마법사들의 조력이 없다 면, 이번에도 제국과 엘프가 승리를 거머쥘 터다.
그렇기에 크라함은 헤르베르트의 고집을 어리석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시나리오의 조연에 불과한 놈이,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겠 다고 발악하는 꼴이란.'
그렇게 크라함이 헤르베르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을 때.
문득 테르본이 요청해왔다.
"우리의 주인이시여. 연방군을 향 한 뒷공작을 지시해 주십시오. 저희가 나선다면 놈들을 의도대로 움직 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작'이란 다름 아닌, 흑마법을 운용한 주변인들의 세 뇌와 조종.
흑마법사들은 인간의 정신방벽을 파훼하고 그들의 정식을 침식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다.
이는 동맹인 연방군 소속 장성과 참모들이라 한들 예외가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이 참모와 장교들을 세뇌시켜 조종한다면, 헤르베르트를 설득하거나 압박해 볼라바아와의 협력을 종용할 수 있는 것이다.
쉽고 확실한 방법.
허나 그런 테르본의 요청에 크라 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 굳이 그럴필요는 없다.
그가 굳이 쉬운 방법을 마다하는 이유.
다름이 아니었다.
- 어차피 헤르베르트에게는 사명 도, 인류애도 없다. 그저 자신의 명 성과 지위를 신경 쓸 뿐.
"그렇다면."
- 이번 원정의 실패가 확정되었을 때. 놈은 내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거다.
후드의 음영 속, 어렴풋이 드러 난 크라함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린다.
- 제발 도와달라고. 휘하 병력은 얼마든지 바칠테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달라고. 그리 말하며 도움을 구걸하겠지.
크라함은 상상한다.
흑마법사를 배척하고 도외시하던 헤르베르트가, 자신의 발치에 엎드 려 구걸하는 모습을.
그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더더욱 진해진다.
- 그 꼴을 볼 수 있을 터이니. 알아서 선택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욱 재밌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크라함이시여. 그렇다면 연방군 쪽은 방치하겠습니다."
- 그리하라. 그리고….
잠시 말꼬리를 늘리며 주제를 돌 리는 크라함.
그가 테르본에게 묻는다.
- '대계'의 준비는 어찌되어가고 있지?
크라함과 볼라바아 학파가 준비 중인 '대계'.
그들은 몇 년에 걸쳐, 어떤 거대한 흑마법을 동부대륙에서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대계는…."
크라함의 물음에, 테르본이 잠시 주저하고는 길게 대답해왔다.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방의 지원이 급격히 증가했다 하나, 아시 다시피 놈들의 예산을 빼돌려 비밀 리에 준비하는 것이라… 진행이 더 딜 수밖에 없습니다."
- 변명은 되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유물의 연구와 결합은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법진의 축성이 완료되지 않았 기에. 약 세 달의 시간이 더 필요 합니다."
- 세 달이라.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는 있겠군.
대계의 준비 작업은 방대했다.
동부대륙 연방의 영토 곳곳에 있는 대도시에 거대한 마법진을 하나 둘 은밀하게 새겨 넣고, 유물을 이용해 힘을 끌어올렸다. 많은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다.
연방과 손을 잡은 이후, 그들의 지원을 유용해 차근차근 준비해왔 던 대마법.
세 달 뒤 완성된다.
그들의 대마법이 발동될 그때 연 방은 소멸할 것이요, 볼라바아와 크 라함이 원하는 무언가가 이 세상에 등장할 수 있으리라.
크라함이 비식 웃으며 말한다.
- 연방의 통령도 참 어리석군. 놈의 지원에 의해 자신의 나라가 소멸할 터이니 말이다.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연방은 그저 좀 커다란 제물에 불과했다.
애시 당초 크라함은 연방 통령에 게 진심으로 협조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그가 지니고 있는 자원을 노렸을 뿐.
크라함이 지시한다.
- 예정대로다. 중앙대륙 전쟁을 진행함과 동시에, 동부대륙의 대계 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여라. 모든 일이 끝난 후, 이 세상은 우리 흑마법사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우리 의 주인이시여."
화르르륵.
테르본의 전신이 검은색 불길에 뒤덮이고,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위치 전이 마법을 운용해 크라함의 명을 수행하러 간 것이다.
그러자 진하게 내리깔린 적막.
크라함이 붉은색 안광을 빛내며 나직이 읊조린다.
-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다가온다.
어둑한 지하 동굴 속, 그의 질척 하고도 메마른 목소리가 은은히 울린다.
흑마법사는 웅크리고 기회를 기다린다.
* * *
약 2주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군은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 세계수가 보인다."
"…여기가 엘프의 숲이로군요."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본거지, 엘프의 숲에.
철그럭, 철컥, 저벅, 저벅.
기사와 병사들이 나아간다. 그들 이제국기가 그려진 깃발을 드높이 치켜들었다. 마차가 뒤따랐다. 기다란 행렬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다시금 마주할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한지훈 씨. 무사히 귀환하셨네요."
"니 디아."
엘프여왕 니디아와 말이다.
엘프의 숲 초입에 니디아와 엘프 전사들이 나와 제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고작 2주 안본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엄청 오랜만인 것 같단 말이지."
"전장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 가니까요."
"저게 요새인가?"
나는 시선을 돌려, 엘프의 숲 외 곽을 둘러치듯 설치되어있는 구조 물들을 바라보며 그리 물었다.
니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한지훈 씨가 알려주 신 성형요새 축성이 거의 다 완성 되어가요."
"음… 훌륭해."
나는 감탄해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된 성형요새의 모습이 썩 만족스럽다.
요새 하나당 일만 정도의 병력이 넉넉히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
위에서 바라보면 별모양으로 뾰 족뾰족하게 나와 있는 다중성벽과, 그 위에 설치되어 있는 발리스타들.
성벽은 두꺼웠고, 높기까지했다. 가장 외벽의 높이가 무려 15미터에 달했다.
말이 15미터지, 사실 꽤나 높은 높이였다. 5층 건물높이에 달하니 말이다.
그런 성벽이 다중으로 이루어져 있어, 공략하는 연방군 입장에서는 마치 철벽처럼 느껴지리라.
"역시 드워프야. 벌써 요새 축성작업이 저토록 진척되다니 말이야."
본래라면 연단위로 걸릴 요새 축 성작업을 고작 한 달 좀 넘는 시간 만에 해낸 이들이 바로 드워프들이었다.
과연, 건축과 제작에 있어서는 최고라 불리우는 종족이다.
나는 한동안 요새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연방군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는 대충 일주일정도 남았어."
나직이 운을 땠다.
그러자 니디아가 대답한다.
"일주일이라… 그 정도의 여유시간이라면, 지금 짓고 있는 요새 10개가 모두 완공될 수 있어요."
"다행이군 그래. 그럼 방어전 준비 상태는?"
"완벽해요. 이미 완성된 요새들에는 물자와 식량을 옮겨 비축하고 있고, 저희 엘프들 또한 전사 지원자를 받아 전력을 2만으로 증강했어요. 드워프도 전투에 나설 지원자 1만을 뽑았고요."
"그렇다면, 우리 제국군 28만에. 드워프와 엘프 3만. 도합 31만인 가."
많은 전력이다.
아직 연방에게는 60만의 병사와 3만에 달하는 기사가 있다.
약 2배에 달하는 적의 전력.
허나 이쪽에는 무려 10개에 달하는 요새가 있다. 그것도 성형 요새 라는, 기존의 요새보다도 훨씬 진보 된 요새가.
나는 확신했다.
"연방새끼들은 여기서 지옥을 볼 거다."
연방 놈들이 갈려지기까지 일주일 남았다.
세계수 방어전은 제국군의 압도 적 승리로 끝날 것이다.
나는 엘프의 숲에서 적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