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기동전은 순조로웠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검을 아래 로 찔러 박았다.
퍼억. 울컥.
지면을 기고 있던 연방군 병사의 목을 꿰뚫은 내 장검.
"끄륵…."
녀석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절명해버렸다.
벌써 연방의 네 개 작전군을 전 멸시켰다.
제10군, 7군, 6군, 그리고 이번에 상대한 9군까지.
도합 40여만의 적 전력을 제거한 것이다.
고작 30만의 병력으로, 100만의 적이 기동하는 영역에서, 적병 40만 토벌이라는 큰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이쪽 피해도 적진 않았다.
"우리군 또한 벌써 5만의 손실을 냈네. 한지훈 사령관."
저 멀리서 보병대를 이끌고 확인 사살 작업을 하던 오스카가 다가와 하는 말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지."
여태까지는 잘 해냈다.
내 기동전은 나름대로 완성도 높은 전략이었으며, 엘프와 요정족은 정보와 병참으로 보조했고, 휘하 병력들은 충분히 정예였다.
그렇기에 고작 5만의 손실로 40만의 적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5만의 손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제국군의 총 전력은 28만 정도인가."
본디 33만에 달했던 제국군 전력 이었으나, 이어진 기동전과 다수의 대규모 전투로 인해 조금씩 피해가 누적되었다.
분명 이룬 전공에 비해 극히 미 미한 피해다. 하지만 이쪽의 덩치는 작고, 그렇기에 5만이란 적은 피해 도 무겁게 느껴진다.
더해 문제는 단순히 수적인 손실 로만 끝나지 않았다.
"한지훈. 보다시피 병사들의 피로 가상당하다. 이제는 정말 한계야. 재정비가 필요한 것 같네만."
오스카가 고개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그에 나 또한 시선을 돌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주 시했다.
오스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일반 병사들이었다.
전투가 끝나 진한 혈향이 넓게 퍼져있는 대지.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적병들을 확인사살하고 있는 보병대 병사들의 모습.
병사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췌했다.
얼굴에는 피로감이 그득했고, 움직임 또한 너무나도 굼떴다.
아무리 전투 직후인 상태라 지쳤 다 한들, 저들의 움직임은 그 누가 보아도 승리한 군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확실히 한계야."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2주 동안 행군했고, 추가로 2주 가 넘는 시간 동안 산과 강을 넘나 들며 무려 네 번의 대규모 전투를 경험했다.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정예로 단련된 병사들이라 한들, 너무나도 가혹한 일정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정예였기에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봐야겠지.
확실히 이젠 한계다.
이 이상적의 영역을 휘젓고 다 니기에는 일반 병사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
'이른바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린 거지.'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슬슬 회군해야겠어."
이미 이번 기동전의 목표는 달성했다.
적의 측면 붕괴, 후방 병참선의 교란, 그리고 이를 통한 적의 진군 속도 저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이상, 무리해가며 더 이상의 전공을 욕심낼 필요는 없겠지.'
나는 통신수정구를 집어 들고 지시했다.
"전군 전장정리가 끝나는 대로 군영을 펼쳐 휴식을 취한다.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후회군하겠다."
- 회군…. 전투를 그만두고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래."
- 드디어…!
수정구 너머에서 참모의 안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나는 픽 웃었다.
참모 녀석들 또한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병사들처럼 전장을 뛰어다니지 않더라도, 극도의 긴장 상태로 장시 간 행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 었겠지.
- 그럼 사령관 각하의 명령을 전 파하겠습니다.
"그래."
통신이 끊어진다. 나는 통신수정 구를 다시금 품속에 넣어 갈무리했다.
"드디어 복귀인가."
바로 앞에 떠올라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본다. 홀로그램에 떠오른 것은, 언제나 그렇듯 미니맵이었다.
미니맵 위에는 드넓은 중앙대륙 동부 전역의 지도가 펼쳐져있다. 100만 연방군의 대규모 진군으로 인해 전장이 몹시 넓어졌기에, 그에 맞추어 미니맵 또한 그 크기를 늘 린 것이다.
나는 지도 위에 떠오른 붉은색 점들의 무리, 연방 원정군의 행군대 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이상해.'
놈들은 여전히 10만 단위로 나뉘 어져 서쪽으로 행군해가고 있었다.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놈들의 4개 작전군, 도합 40만의 병력을 이쪽에서 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응당 놈들이 무언가 반응을 보여 야 할 터다.
하지만 놈들의 행군대열은 여전히 평소와 같았다.
다수의 작전군을 병합하거나, 행 군하는 작전군 사이의 간격을 좁히 거나, 혹은 대규모 척후전을 펼치거 나 하던 시도는 초반에만 있었을 뿐.
정작 피해가 누적된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고 그저 서쪽으로, 대륙의 중앙에 있을 세계수를 향해 진격해가고 있는 것 인다.
나는 지도를 바라보며 고민한다.
'설마. 포기했나?'
이쪽이 압도적인 정보력을 지니 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 한 시라도 빨리 세계수에 도달해 병력 으로 찍어 누를 심산일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적은 수도 아니고, 무려 40만에 달하는 병력이 이쪽의 기동전으로 인해 각개격파 당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받은 피해를 되갚아주기 위해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자 할 터인데.
정작 적의 움직임은 평소와도 같 으니 .
꺼림칙한 위화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한동안 생각하던 나는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단서가 부족해."
적이 무언가 꾸미고 있을 것 같 지만, 이쪽에서 추리할 별다른 단서 가 없다.
도대체 연방놈들은 무얼 꾸미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생각을 털 어내 버렸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고민을 지속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니까.
일단은,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시켜야 할 때다.
나는 아직도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오스카를 향해 말했다.
"오스카. 적의 보급품에서 빼앗은 술과 고기들이 꽤 많았지?"
"그렇지."
"그거 모조리 풀지. 어차피 다 가지고 돌아가지도 못할 거, 그동안 고생했던 병사들을 위로해줘야겠 어."
"회군한다는 소식과 함께 연회를 베푼다면… 사기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겠지. 알겠네. 그리하지. 자네는 쉬고 있게나."
제국군의 기동전이 끝나고, 그들 이 세계수를 향해 회군한다.
이제는 기동전이 아닌, 방어전을 준비할 때다.
"이제 돌아오시는거군요."
- 그래. 세계수로 가는 중이지. 앞으로 이주일정도 걸릴거야.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한지훈 씨."
중앙대륙의 중심지에 있는 엘프 의 숲. 그곳에서조차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 세계수의 앞.
그곳에서 니디아는 녹색 수정구 를 들고는 누군가와 통신했다. 한지훈이었다.
수정구에서 한지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그쪽은 어때? 방어전 준비는 잘 되어가나?
"네.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니디아는 그리 말하고는 시선을 들어 올려 저 멀리, 꽤나 떨어져있는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원체 멀리 떨어져있기에 너무나 도 작게 보였지만, 그녀는 엘프 여왕이자 이전에는 엘븐 가디언이었 던 강자 중의 강자였다.
그렇기에 시력을 강화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요새 건설은 순조로워요."
그녀가 바라보는 광경은 다름 아닌 요새 건설작업 현장이었다.
수천에 달하는 드워프들이 달려 들어, 어떤 요새를 짓고 있는 광경.
"드워프들이 협조적으로 움직여 주는 덕분에 말이에요."
- 중앙대륙이 통째로 흑마법사에 게 넘어갈 판이니까. 잠자코 있던 드워프들도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드워프들은 저희 엘프와 사이가 안 좋지만, 그래도 함께 중앙대륙에서 살고 있는 종족이니까요. 이런 위기에서는 악감정을 버리고 서로 힘을 합쳐야겠죠."
그녀가 한동안 요새 건설작업을 지켜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성형요새라고 하셨나요? 꽤나 특이하게 생긴 요새네 요."
드워프들이 짓고 있는 것은 평범한 요새가 아니었다.
성형요새 (星形要寒).
문자 그대로, 별 모양의 다중구 조로 성벽이 이루어진 요새였다.
한지훈의 말이 이어진다.
- 내가 알고 있는 요새들 중 가장 방어능력이 높은 요새야. 성벽끼 리 마주보게 되어 서로 엄호할 수도 있고, 더해 푹 들어간 부분 덕분에 적에게 축차투입을 강요할 수도 있지.
"성벽의 면적이 넓어진 만큼, 적 이사다리로 오를 공간도 넓어지지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만. 반대로 성벽의 면적이 넓어진 만큼 그만큼 많은 병력을 욱여넣을 수 있어. 보다 적은 면적으로, 더 많은 화력을 발휘 할 수 있는거지.
"흐음…."
니디아는 한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형요새. 당연히 이 판타지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 요새 형식이었다. 성형요새란 지구에서도 화약 과 대포가 발전하던 15세기에나 등장했던 요새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엘프와 드워프들은 그런 성형요새를 여러 전략적 요충 지에 다수 축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지훈이 그리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계시던 세상에서 쓰였던 요새 형식이라 하셨죠?"
- 그래. 이미 역사에서 그 효율 성이 증명된 요새 형식이다. 분명 큰 도움이 될거야.
니디아도, 엘리스도, 그리고 다른 엘븐 가디언들도 이미 한지훈이 이 세상이 아닌 상위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한지훈이 이런 성형요 새라는 것의 개념을 알려주고, 제대로 설계해 축성하기를 지시했을 때. 그녀는 호기심을 보일지언정 놀라 지는 않았다.
다른 세상의 지식이라 그려러니 할 뿐.
- 이쪽의 사정에 맞춰서 몇몇 요 소를 변경하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 한 요새들보다는 방어능력이 월등 할거다.
물론 한지훈은 본래 지구에 있던 성형요새 그대로를 가져오지 않았다.
지구에서의 성형요새란 포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벽이 낮고, 경사져 있어 보병의 등반에 비교적 취약했다. 더해 요새 주위에 언덕 등을 만들어 대포의 직사를 막는 엄폐물을 설치하기도했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쓸데없는 요소들이었다.
이 세상에는 아직 화약이라는 물건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한지훈은 기존 성형요 새의 형식을 현지 사정에 맞춰 다소 수정했다.
성벽을 수직으로 세웠고, 성벽의 높이 또한 높일 수 있는 최대한으로 높였다. 규모도 더욱 키웠다. 요새라기보단 성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크기를 늘린 것이다.
그리하여 한지훈은 자신했다.
- 연방놈들이 성형요새를 함락시키려면, 최소한 방어군 열 배의 병력은 필요할거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자신감은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드높은 성벽, 효율적인 화력투사 를 가능케 하는 별모양 구조, 다중 으로 이루어진 성벽. 더해 성벽 위에 설치될 드워프제 발리스타들까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 그런 요새 열 개를 각 방면에 설치해 방위라인을 형성한다면, 연 방군 놈들 똥줄좀 타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런 대형 성형요 새를 무려 열 개나 축성 중인 상황 이었다.
도합 만 단위에 달하는 드워프들 이 요새 건설작업에 투입되어서 가능한 방어전 준비 작업이었다.
만약 중앙대륙에 있던 드워프들 이 나서지 않았다면, 요새 건설작업은 제시간 안에 절대 불가능한 일 이었다.
엘프들의 건축술과 공업능력은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한지훈이 말한다.
- 니디아. 곧 연방군 놈들이 그곳까지 진출할거야.
그의 말에 니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지도를 바라 본다. 역시나 엘프들이 만든 마법지 도였다.
지도에서는 거침없이 서진하고 있는 연방군 병력이 보인다.
여섯 개로 나뉘어 계속해 진군하고 있는 그들의 수는 약 60만.
한지훈의 기동전에 의해 본래 100만에 달하던 대군에서 많이 줄 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제국과 엘프 연합을 압도하는 수였다.
- 놈들을 막아야 해.
그리고 제국과 엘프측은 저 무지 막지한 규모의 대군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요새 열 개로 이루어진 방어선. 저곳이 뚫린다면 바로 세계수다.
그리고 그곳이 함락된다면, 중앙 대륙은 완전히 연방과 흑마법사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것만은 반드시 저지해야 할 터.
니디아가 나직이, 하지만 사명이 깃든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놈들을 막아야겠지요."
니디아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배 후, 전 대륙의 마나와 자연력을 순 환시는 거대한 영물-세계수를 바라 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니디아가 이어 말했다.
"반드시 막을거예요.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요."
그녀의 녹안이 결의의 빛이 일렁인다.
기동전을 펼쳤던 제국군이 세계수를 향해 회군하고, 엘프와 드워프는 요새를 축성해 방어전을 준비한다.
60만 연방 원정군이 차근차근 세계수를 향해 진군해오고 있다.
세계수 방어전이 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