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제국군이 행군을 시작했다.
오스카가 이끄는 제1군과 마이사 가 이끄는 제2군이 나아간다.
그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병사들이 행군하고, 보급마차가 그 들를 뒤따른다. 기수들이 치켜든 제국기가 바람에 펄럭거린다.
나는 앞서 나아가는 군대의 행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군을 나눈건 정답이었어."
35만에 달하는 군대다. 당연히 행군을 하는데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뭉쳐서 다녔다면, 출발하는 데만 삼일이 걸리지 않았을까.
그나마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었 기에 하루만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군의 행군을 멀찍이 서 바라보고 있을 때.
"여기 계셨네요. 한지훈 씨."
누군가가 다가오며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고개 돌려 확인해보니 니 디아였다.
그녀가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 더니, 군의 행렬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장관이네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수십만의 대군이 대열을 이루고 행군하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웅장 한 맛이 있는 법이다.
한참이나 군의 행군 대열을 바라 보던 니디아.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부럽네요."
"부럽다니. 무엇이?"
"인간의 발전이요."
다소 뜬금없는 소리다.
인간의 발전이 부럽다니.
내 의아한 기색을 알아차린 것일 까. 그녀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지훈 씨도 알다시피 저희 엘프의 수는 많이 적죠. 인간에 비해 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드워프와 함께 소수종이었다.
인간에 비해 엘프는 드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반면 그만큼 번식이 힘들었던 것이다.
아마, 모든 엘프의 수를 다 합쳐 도 수십만에 불과할 것이다.
"엘프는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어요. 계속 중앙대륙에 머물며 세계수만을 지킬 뿐이지요."
니디아의 말이 길게 이어진다.
"반면 인간은 여러 대륙으로 진출했고, 발전을 거듭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가장 오랜 지성체인 엘프마 저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커졌 고요."
니디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두 종족의 차이였다.
처음부터 완벽에 가까웠던 엘프.
하자투성이였지만, 끝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인간.
그리고 인간은 충분히 발전했고, 세력을 키워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엘프를 위협할 정도로 크게 팽창하게 되었으니 .
"지금 와서 간간이 생각하게 되 네요. 엘프와 인간 중, 누가 더 우 월한 종족인지."
니디아가 그리 말하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이 더 우 월하게 느껴지더군요/
"… 농담이 과한데. 니디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지성체들 중 가장 완벽에 근접한 종족이 바로 엘프다.
한데 인간이 더욱 우월하다라.
쉽사리 수긍하기 힘들다.
그런 내부정적인 기색에, 니디 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뭘 생각하시는지는 알고 있어요. 확실히 인간은 나약하죠. 저희 엘프 들보다 가진 수명, 잠재력. 그리고 마나 감응도와 자연력 친화까지. 전반적인 능력치가 모조리 뒤떨어지 죠. 개개인의 능력만 따지자면 엘프가 훨씬 우수할 거예요….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이어 말 해왔다.
"종 정체로 본다면 어떨까요?"
그녀가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며 읊는다.
"지금 상황을 보세요."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수십만의 병력이 진군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엘프를 치려는 것도 인간, 엘프 를 구원하려 하는 것도 인간이에요. 저희 엘프라는 종족은 거대한 두 개의 인간국가 사이에 끼어 흔들리 고 있을 뿐."
"… 확실히."
이번 전쟁이 일어난 장소는 엘프 의 영역인 중앙대륙이었으나, 전쟁 의 주역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된 것이 바로 연방이었고, 그다음이 우리 제국이었으니 .
엘프는 그저 중간에 끼인 것이나 다름없다.
"한때 저희 엘프가 문자와 마법 의지식을 전수해주었던 나약한 종족이 스승인 엘프를 뒤흔들 정도로 큰 세력을 일군 것이지요."
피식.
니디아가 미소짓는다.
평소의 상냥한 미소가 아닌, 엘프 여왕으로서의 자조 섞인 미소였다.
"인간이 종으로서 더욱 우월하기에 지금처럼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 아닐까요?"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 뭔가를 논의하기 위한 대화 가 아니었기에.
그녀 또한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잡담이 길었네요. 본래 할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
니디아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한지훈 씨. 혹시 '유물'은 가져 오셨나요?"
"유물? 환상종의 핵을 말하는건가?"
"네. 맞아요. 혹시 가지고 오셨다 면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인물의 요청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다름 아닌 니디아의 요청 이다.
나는 거리낌 없이 품속에 넣어놨 던 주먹만한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쥐어들자 시야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리바이어던의 핵]
수정구 내부에서, 차마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코르자카 공화국 지하도시에서 얻은 환상종의 핵.
바네사가 잘 정제해두었다.
나는 그것을 니디아에게 내밀고, 니디아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엘리스 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그녀가 손에 들린 수정구를 천천히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름 없는 별… 그러니까 한지훈 씨가, 이번 중앙대륙 전쟁에서 자신의 격을 각성하게 될 것이라 하시네요."
"격의 각성이라… 그게 정확히 뭐지?"
"저도 잘은 몰라요. 아마도 엘리 스님만이 아시고 계실거예요."
'격'이란 건 내가 포인트를 수집 하고, 가진 능력치를 상향시킬수록 상승한다는 것. 이전에 엘리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격이 점차 상승하는 것을 넘어, 각성하게 된다니.
격의 각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중에 엘리스와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물어봐야겠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한지훈 씨의 각성에는 저 유물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아요. 그만큼 고격의 힘을 품고 있는 물건이 니까요."
니디아는 그리 말하고는 내게 핵을 넘겼다. 나는 그것을 받아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항상 유물을 가지고 계세요. 언제 어디서 격의 각성이 이루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런 말하지 않아도 항상 잘 지니고 다닌단다."
잘 때도 품속에 넣고 잘 정도로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주억인다.
"… 네.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네요. 그럼, 한지훈 씨."
니디아가 그리 말한 직후.
부우우우-.
긴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군 의 행군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직후 우수수 들려오는 신호기들.
내가 지휘하는 제3군이 출병할때 가 되었다.
니디아가 이어 말했다.
"부디, 저희 엘프를 구원해주세 요."
"그래."
"몸 조심하시고요."
"오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의 통신수정구를 꺼내 지시했다.
"한지훈 라이젠이다. 예정대로 행 군을 시작한다. 11번 군단부터 차례로 출발해."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앙대륙은 유일하게 세계수가 있는 대륙이다.
그렇기에 타 대륙보다 훨씬 자연력이 농밀했고, 농밀한 자연력은 모든 식물이 보다 쉽게 생장할 수 있도록했다.
때문에 중앙대륙은 어디에도 나무가 많았다.
정말 많았다.
덕분에 행군길은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길이 너무 좁은데."
나는 행군대열의 선두를 걸으며 그리 읊조렸다.
빽빽하게 자라있는 나무들.
우거져있는 수풀 무더기.
엘프들이 다니던 길이나 있긴 했지만, 마차 두 개가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에 불과했다.
더해 노면상태는 최악.
서스펜션 따위가 달려있지 않은 마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흙길 위를 움직이느니, 차라리 걷는 것이 편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 나는 지휘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는 와중이었다.
"벌써부터 남부대륙이 그리워지 는걸. 이런 불편한 행군길이 앞으로 일주일이나 남았다니."
그리 내가 불평하자,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 불평하지 마, 한지훈. 그나마 편한 길로 안내하는 거니까.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내 어깨 옆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존재들이었다.
주먹만한 덩치에, 등 뒤로 나와 있는 날개들.
내게 말을 건 이는 다름 아닌 요정족이었다. 엘프들이 길 안내를 맡 기기 위해 내게 붙여두었다.
요정이 이어 말한다.
- 이쪽 길이 그나마 편한길이라 고. 그보다 조심해. 가면 갈수록 혹 마나의 잔향이 느껴져. 이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을수도 있어.
"흑마법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을 이끌고 행군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난 상태였다.
우리는 중앙대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상태였고, 그렇기에 긴장해 야했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 니까.
비록 십수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 끌고 있지만, 그럼에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병력의 손실은 언제나 최소 화하는 것이 옳으니까.
나는 걸어 이동하며 생각한다.
'크라함.'
이 대륙 어딘가에 있을 적의 존재를.
'놈은 만만치 않아.'
녀석은 이곳 중앙대륙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놈은 강하다.
전생에서도 무시무시한 능력을 뽐내던 흑마법사 학파, 볼라바아의 종주였다.
그리고 놈은 이제 이전생의 기억 에, 연방의 지원이 합쳐져, 이전보 다도 훨씬 위험한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 분명할 터.
비록 내 능력이 막대해졌다만 진실로 놈을 이길 수 있을지는 확신 할 수 없다.
이전 시나리오를 아는 것은 놈 도, 나도 똑같으니까.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강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나는 가슴팍을 더듬었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유물이 제복 너머로 잡 힌다.
가만히 고민해보았다.
'격의 각성이란 걸 한다면. 놈을 제압할 수 있을까.'
나는 놈과 마주해 전투하며 내 격을 각성하게 될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강자와의 전투에서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해 왔었으니까.
과거 한스 요한바르첸과의 전투 가 그러했고, 크라함과의 전투가 그러했으며, 광인과의 전투가 그랬다.
강자와의 전투 중 위기를 극복하 기 위해 새로운 힘을 깨우쳐 왔었다.
그러니, 내가 각성하게 된다면.
그 시기는 크라함과 전투할 때가 될 것이다.
'각성하는데 유물이 필요할거라했지.'
내가 품고 있는 유물에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힘이 담겨있다.
내가 격의 각성이란 걸 한다면.
'이유물 내부에 있는 힘을 내가 유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초월적인 힘을 얻을 것이고. 크라함이든 뭐든 이길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게 나는 유물과 각성에 대해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요정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군의 선두에서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 사령관 각하!
품속에 넣어두었던 또 다른 수정구, 통신 수정구에서 다급한 목소리 가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곧장 통신수정구를 꺼내들 어 응답했다.
"11번 군단장. 무슨 일이지?"
- 괴생물체가 나타났습니다!
내 표정이 찌푸려진다.
괴생물체라니. 너무나도 생뚱맞은 이야기다.
그에게 물어본다.
"괴생물체라니. 그게 뭐지? 마물 인가? 정확하게 설명하라. 11번 군단장."
- 그, 그것이….
내 물음에 말끝을 흐리는 11번 군단장.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당혹이 어 려 있었다.
녀석도 군단장 자리에 앉은 만큼 꽤나 긴 짬밥을 먹었을 텐데, 저토록 당황스러워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 설명하기 힘듭니다! 직접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지금 가지."
나는 허리춤을 매만졌다.
철그럭, 하고 울리는 쇳소리. 내 애검 가르강은 언제나처럼 왼쪽 허리에 잘 패용되어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콰앙!
큰소리가 울리며 앞으로 쏘아지는 나의 신체.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 뺨을 스쳐지나간다. 주변에 도열해 행군중이던 병사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훅 뒤로 흘러갔다.
나는 행군대열의 최선두를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볼 수 있었다.
- 키아아아아아아!
나무 위에 올라서, 괴성을 질러 대는 괴생물체의 모습을.
쯧. 절로 혀가 차진다.
"군단장 녀석이 왜 설명하기 함 들었는지 알것같은데."
저 모습을 어찌 입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행군대열의 최선두에 등장한 것은 엘프였다.
다만 멀쩡한 엘프는 아니었다.
놈은 불길하고도 기괴한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몸 전체가 온통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으며, 몸 곳곳에는 마치 마나회 로처럼 붉은색 문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녀석의 팔은 네 개였고, 반면 눈 은 없었다. 두 눈이 있었을 자리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핏빛 광채 가 일렁일 뿐이다.
놈의 저 불쾌한 외양을 본 순간 녀석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키메라 엘프.'
그것이 놈이 정체였다.
아무래도 이쪽을 정찰하기 위해 흑마법사 놈들이 보내놓은 것 같다.
재료는 아마도 연안요새에서 사 로잡았던 엘프 포로들이었겠지.
스르릉.
나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금방 편하게 해주마."
평범한 기사도 아닌, 엘프 전사 를 소재로 만든 키메라다.
분명 암흑기사따위보다 수 배에 달하는 강함을 지니고 있을 터.
일반 병사나 기사들로는 놈을 상대할 수 없다.
만약 놈을 병사들로 제압하고자 한다면, 많은 목숨이 희생당 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니 내가 직접 놈을 처리하고 자 한다.
콰앙!
나는 지면을 박차고, 나무 위에 자리해있는 놈을 향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