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사령관 각하. 제국의 초계함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다르벤테는 휘하 참모의 말에 갑 판 너머 해상을 바라봤다.
그러자 저 멀리 자리해 있던 제국군 초계함들이 하나둘 돛을 돌리 고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참모가 이어 물었다.
"추격하시겠습니까? 이쪽의 초계 함들을 전진시킨다면 놈들을 섬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격섬멸할 것인지 묻는 질문. 다르벤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초계함으로 적 초계함을 잡아봤자 이쪽의 정보가 빠져나갔 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 우군 초계함들을 더욱 전진시켜 정찰시킴이 마땅하겠지."
"알겠습니다. 아군 초계함들을 전 진시키겠습니다."
"적 주력함대의 위치, 그리고 주변 조류를 정찰하라."
다르벤테는 제국의 초계함들을 놓아주는 대신, 정찰임무를 명했다.
그가 나직이 읊조린다.
"우군 초계함의 경계망을 뚫고 이쪽을 정찰하다니. 확실히 놈들의 앞바다라는 건가."
개도 자기 집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 한다.
이곳은 엄연히 제국 권역인 남부 대륙의 해역이었으며, 제국 해군은 근방의 지형과 조류를 충분히 파악 해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제국 초계함들은 미리 전진시켜둔 연방의 초계함들에게 저지당하지 않고 파고들어, 정찰 후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다.
허나 아군의 정보가 빠져나갔음 에도, 그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래봤자다. 전력의 차이가 압도 적인 이상 놈들은 결코 승기를 잡지 못할 것이니."
연방 해군의 정확한 전력은 전투 함 305척. 반면 제국 해군은 전투 함 200여 척에 불과하다.
게다가 승무원의 숙련도와 축적 된 경험 또한 연방군이 압도적.
그렇기에 초반 정찰 따위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각하는 다르벤테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이 타고 있는 기함의 돛을 바라봤다. 돛은 배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 껏 받아 빵빵하게 부풀어있다.
다르벤테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순풍이로군."
바람은 연방 함대의 편이었다. 지금 불어오는 북동풍 바람이 함대 의 배후를 부드럽게 밀어주고 있다.
덕분에 더더욱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으니 .
돌격에 최적이다.
다르벤테는 가만히 생각했다.
'제국놈들은 분명 수비적으로 대 처할 터.'
제국 해군전력은 이쪽에 비해 열 세였다. 그리고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는 보통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 기마련.
더해 제국 해군의 초계함조차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바로 뒤로 빠졌다. 그 말인즉 더 이상의 정찰은 필요 없다는 소리였고, 정찰 이 필요 없다는 소리는 놈들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제국놈들은 역풍에 마주 한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대응은 자리에서 수비를 굳히는 것이었으니 .
다르벤테는 확신했다.
"제국놈들은 단종진을 펼치고 이쪽을 기다리려 할 것이다."
단종진. 함선들을 측면으로 기다 랗게 이어 최대한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진형. 이 시대 해상전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형이었다.
피식. 그가 작게 웃었다.
"단종진을 부수는 건 내 전문이지."
해전에서 화력투사에 가장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진형, 단종진.
다르벤테는 그러한 단종진을 수도 없이 파훼했던 노련한 해군 사령관이었다.
그의 특기는 방어나 화력전이 아닌, 돌격과 난투전이 었으니까.
다르벤테가 지시했다.
"각 함. 대열을 전환하라. 이열종 대 돌격진이다. 함대는 대열을 유지 하며 서남 220방향으로 전속 항행 한다."
"명령을 따릅니다!"
"좋아. 제국놈들을 단숨에 찢어버 리자고."
연방의 함대가 빠른 속도로 나아 간다.
* * *
"연방놈들이 일제히 속도를 높였습니다!"
"놈들이 순풍을 탔습니다.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적 초계함이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옵니다! 한 시간 안에 이쪽의 위치가 노출될 것입니다!"
함대 참모들이 보고해온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내 바로 앞에 떠올라 있는 미니 맵을 바라봤다.
미니맵에 표시된 붉은색 점의 무리들.
이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어 오고 있다.
보고가 이어진다.
"적의 진형을 파악했습니다. 이열 종대 돌격진형입니다!"
"아무래도 근접전을 노려 이쪽을 분열시키려는 생각 같습니다!"
보고는 사실이었다. 미니맵에 떠올라있는 붉은색 점들은 이열종대였다.
"이쪽의 수비를 부숴버리겠다는 건가…."
쯧.
나는 혀를 찼다.
'지가 무슨 넬슨인 줄 알아.'
영국의 넬슨 사령관이 즐겨쓰던 전법이 저것이었다.
단종진을 펼친 적 함대에 2열 내지 3열종대로 들이받아 난투전으로 각개격파하는 것.
단종진은 화력투사에는 으뜸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확실한 장점만큼 단점 또한 명확했다.
전열이 얇기 때문에 근접하게 되 면 손쉽게 진형이 붕괴되어 단절되 며, 일단 형성된 단종진을 다른 진형으로 변환하는 것이 너무나도 느렸다. 진형이 길게 늘어져 있는 까닭이었다.
화력투사에 관해서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일단 난전상황에 진입하 게 된다면 손쉽게 망가지는 진형인 것이다.
그런 단종진을 향해 2열종대로 돌격하는 것. 확실히 정석이라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그렇기에 이자리에서는 단종진을 지양하고, 비교적 난전 대응능력 이 보장되어있는 복종진이나 윤형 진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단종진을 펼쳐야겠군."
단종진을 펼칠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버넬리를 비롯, 휘하 참모들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사령관 각하! 단종진이라니요?! 적은 돌격진을 꾸리고 이쪽으로 돌 격중입니다!"
"단종진은 돌진에 너무나도 취약합니다. 일단 놈들이 돌진에 성공하 기만 한다면 이쪽의 전력이 조각나 각개격파 당할 것입니다."
"놈들이 이쪽에 도달하기 전에 화력으로 완전히 녹여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적함의 수가 이쪽을 훨씬 상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복종진을 펼쳐, 난전을 대비해야 함이 옮습니다."
급하게 쏟아내는 참모들의 말.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단종진을 펼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단종진을 펼친 건 적을 유인하 기 위함이다."
"그게 무슨…?"
"지도 줘봐."
해군참모 하나가 서둘러 지도를 건넸다. 초계함들의 정찰로 갱신된 주변 해역의 지도였다.
주변 해역에 바닷물만이 자리해 있는 건 아니었다.
항해를 시작한 지 불과 하루. 때문에 우리는 남부대륙에서 그리 멀 지 않은 해역에 있었고, 덕분에 크고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자리해 있었다.
나는 지도에 위치한 우리 함대의 후방, 얼마 전 지나친 작은 무인도 를 짚으며 말했다.
"함대를 두 개로 나눌거다. 211척의 전투함 중 절반은 이곳에서 단종진을 펼쳐 적을 유인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 무인도 뒤에서 매복 해 있는다."
"매복이라니… 그 말씀은."
"신나서 돌진해오는 놈들을 슬슬 유인한 다음, 옆구리를 깊숙이 찔러 준다는거지. 성공하기만 한다면 놈들을 완전히 유린할 수 있다."
"… 으음."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염려되는 것일까.
내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버넬리 임시부관. 그가 나직이 입을 열어 말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큰 성과를 보일 터이지만… 도박수입니다. 만약 놈들이 유인당하지 않거나 이쪽 의 매복을 눈치 챈다면, 오히려 더욱 심하게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여 그의 말에 긍정했다.
유인과 급습이라. 확실히 도박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략이었다.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을 경우 적 에게 제대로 역공당해 극악한 피해 를 입을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밀어붙였다.
"버넬리. 그나마 승산이 있는 건 이 방법밖에 없어."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력차가 너무 많이 나잖아."
버넬리를 향해 이어 말했다.
"참모들의 주장대로 복종진이나 윤형진을 펼친다면, 그대들의 말대로 좀 더 수월하게 난전을 진행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승산 은 미미하다."
211척의 전투함으로 300척이 넘는 연방 전투함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해 각함의 화력은 간신히 동급에 맞춘 수준에 불과하며, 승무원 개개인의 숙련도는 연방군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으니 .
란체스터 법칙 따위를 들먹이지 않아도, '평범하게' 싸워서는 반드시 패배하리란 걸 이자리의 모두 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쪽은 결코 평범하게 싸워서는 안된다.
다소의 도박수를 던지더라도 이 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평범하게 싸워서 반드시 질 전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의 도 박수를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 를 노릴 것인가. 선택해야 해."
여기서 후자를 선택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음의 기회는 없으니까.
우리가 이곳에서 패배한다면 제국의 중앙대륙 상륙이 지연되고 만다.
중앙대륙에서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기세가 꺽이고 마는 것이다.
이번 해전에서 반드시 승기를 거 머쥐어야했다.
"나를 믿어라. 그렇다면 연방놈들 함대가 가라앉는 꼴을 제대로 보여주지."
내 말에, 버넬리는 한참이나 이쪽을 바라봤다.
꽤나 대답하기 망설이는 모양새.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지금 이자리에서 내지휘가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 지휘권을 회수 해갈지.
혹은 다소 도박성이 짙은 작전이 라 한들 한번 믿고 맡겨볼지 말이다.
버넬리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맡기겠습니다. 한지훈 사령관 각하. 연방놈들을 모조리 물리쳐주 십시오."
"그래. 믿고 맡겨봐라."
나는 버넬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 리고는, 크게 외쳤다.
"함대! 절반으로 나뉘어 기동이 다! 106척은 단종진을 형성! 105척 은 무인도 뒤에 매복이다!"
연방놈들을 위한 함정을 판다.
솨아아. 철썩.
야심한 밤, 어느덧 저녁에 접어 들어 어둑한 밤바다 위. 연방군의 전투 함대가 해수면을 가르며 나아 간다.
무려 305척의 연방 전투함들.
그것들이 연방 해군기를 펄럭이 며 항해하는 모습은 웅장하고도 위풍당당했다.
연방 해군 참모들이 하나둘 소리 쳐 알렸다.
"적영 발견! 전방에 제국군 함대 입니다!"
"놈들이 단종진을 펼친 채 도열 해 있습니다!"
그들이 알려오는 소식은 다름 아닌 제국군 함대와의 조우.
그에 갑판에서서 우두커니 앞을 바라보던 인물, 다르벤테 1함대 사령관이 대답한다.
"그래. 확실히 보이는군."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나를 운용해 시각을 강화했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너머, 길게 늘어져있는 적의 함선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드높게 솟아있는 마스트와 돛.
그 위로 펄럭이는 제국기와 제국 해군기.
씨익. 다르벤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오른다.
"제국 해군놈들. 역시나 단종진을 펼치고 있었군."
다르벤테의 추측이 적중했다.
제국군은 벌써 단종진을 펼쳐 최대한의 화력을 투사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예상이 맞았으니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그가 더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어 읊조렸다.
"놈들의 함선이 불타는 걸 상상 하니,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각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더는 볼 것도 없다."
마나를 회수해 시력의 강화를 푼 다르벤테.
그가 커다란 목소리로 지시했다.
"돌격! 돌격이다! 전함 전속전진! 적의 전열을 분단시켜라!"
"명령을 받듭니다!"
"노를 세게 저어라! 최고속도다!"
부우우우-.
뿔피리가 울리고, 신호기가 우수수 올라갔다. 전투에 대비해 쉬고 있던 노꾼들이 일제히 거세게 노를 저어댔다. 돛을 밀어주는 순풍과 노 의 추진력에 맞춰 전투함들의 속도 가 일제히 빨라졌다.
다르벤테가 읊조린다.
"놈들이 가라앉기까지 그리 머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상황 이 선명히 그려졌다.
단종진을 이루고 있는 제국 함대에 격돌한 연방군의 2열종진.
제국군 함대는 두 조각, 세 조각 으로 철저히 분열될 것이고, 놈들은 손쉽게 각개격파 당해 침몰할 것이었다.
오랜 해군생활동안 수도 없이 보 아왔던 광경이었으니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사령관 각하! 적함들이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있습니다!"
"…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제국 해군의 반웅은 다르벤테가 예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단종진을 펼쳐 주욱 늘어져있던 제국의 전투함들이, 일제히 선회해 단횡진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것도 함미를 이쪽에 내민 방향 으로 말이다.
다르벤테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 이어린다.
"하! 겁쟁이 제국놈들. 설마 도주 할 심산인가."
그가 그리 읊조리는 것과 거의 동시.
부우우우--.
적함에서 기다란 뿔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후방을 향해 일제히 나아가는 제국군 함대.
"사령관 각하! 놈들이 도주합니다!"
"예상보다도 놈들이 너무나도 겁 쟁이었군. 버러지 같은 놈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참모들이 묻는다.
다르벤테가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볼 것도 없다! 놈들을 추격하라! 겁에 질려 도망치는 제국놈들의 등 짝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는거다!"
"명령을 따릅니다!"
연방의 전투함대가 후퇴하는 제국군 함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점차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빨라지는 연방의 함대.
제국놈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다르벤테가 미소지었다.
"쉬운 전투가 되겠군."
그는 승리를 확신했었고, 심지어 적이 도주하는 것까지 목격한 지금 그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허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한지훈이 파놓은 함정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을.
해가 지고, 점차 어둠이 짙어져 가는 저녁 무렵의 밤바다.
연방의 전투함대가 사지를 향해 기어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