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나는 슈베츠 왕궁의 알현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기다란 레드카펫.
카펫의 좌우로는 견고한 대리석 기둥이 천정을 떠받치고 있다.
고개를 올려 천정을 바라봤다.
천정에는 불 꺼진 샹들리에가 달려있을 뿐, 아무런 조명이 없었다.
하지만 조명이 없음에도,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밤에 이르러 해가 완전히 저버렸음에도.
이곳 알현실은 너무나도 환했다.
천장에 커다란 지붕창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지붕창의 유리 너머 드넓은 밤하늘이 보인다. 그 가운데에 커다랗게 떠올라있는 초승달. 은은한 달빛이 내려와 어둑한 알현실의 음영을 지 워나갔다.
슈베츠 왕궁의 알현실. 퍽 신비 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다.
여타 다른 국가의 알현실들과는 다르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웅장 하지도 않지만. 그이상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마이사 슈베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붕창 너머 밤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연방 자치령."
바로 어제까지 이 국가의 이름이었다.
동부대륙 연방에게 집어 삼켜진 식민지. 놈들의 총독이 다스리는 국가.
하지만 오늘부로 국명이 바뀌게 될 것이다.
"슈베츠 왕국."
본래 이름. 슈베츠 왕가가 다스 릴 때의 국명이다.
슈베츠 왕국은 비로소 해방되었다.
연방의 군대를 격파했고, 놈들의 원정군 또한 궤멸시켰다. 전쟁에서 승리했다. 연방놈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마이사에게 옥좌를 넘기기 만 한다면, 마이사는 여왕이 되어 슈베츠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선왕이었던 아르고안 덴버 슈베츠가 그러했듯 이 말이다.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그 마이사가 여왕이 라…."
과거 마이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본다.
공국군의 요새 포트 갈레이.
그녀는 그곳의 소년병이었다.
남자 행새를 하기 위해 짧게 깎 은 머리카락, 제대로 씻지 못해 땟 국물이 흐르는 안면부. 넝마 같은 연방군 군복차림.
당시 거지꼴에 불과했던 마이사 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랬던 애송이가 어느덧 여왕이 라 불리게 되었다니.
"전혀 상상이 안되는데 ."
머릿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다.
그렇게 내가 알현실 안쪽에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덜컹.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린다. 누군가가 알현실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왔구나. 마이사."
마침내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가 되었다.
마이사는 알현실 문을 열고 들어 간 뒤, 천천히 내부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왕궁 알현실의 모습이 시야에 자리해있다.
드넓은 공간. 긴 레드카펫 너머, 알현실에 자리해있는 황금색 옥좌.
옥좌 옆에는 한 명의 인물이 우 두커니 서 있었다.
"한지훈…"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알현실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당당한 발걸음이었지만 저벅거리는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푹신한 카펫이 발걸음의 소음을 온전히 흡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녀가 옥좌의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마이사."
한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에 마 이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 보아왔던 검은색 눈동자가 보인다.
일견 무뚝뚝한, 허나 한없이 믿음직한 한지훈의 눈빛.
그가 이어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슈베츠 왕국의 여왕이 될거다."
한지훈이 옥좌 위에 놓여있던 왕 관과 도장을 집어들었다.
왕관은 슈베츠 왕가의 그것이었고, 도장 또한 슈베츠 국왕의 옥새였다.
분명 그녀의 기억속에 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니 .
왕국이 멸망한 뒤로도 어찌어찌 잘 보관되어 있던 것 같다.
그것들을 한지훈이 들이밀었다.
"받아라. 이제는 네 것이다."
마이사는 천천히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아주 소중한 물건들을 다루는 듯 그녀의 손길은 너무나도 조심스러 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아르고안 덴버 슈베츠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이었 으니 .
마이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알현실.'
슈베츠 왕국의 알현실.
어릴 적, 이곳에서 보았던 장면 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 전하! 어서 대피를….
- 나는 내버려두고, 마이사를 대 피시켜라. 이 몸은 끝까지 이자리 를 지키겠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마이사는 다시금 시선을 내려, 두 손에 쥐어져있는 물건들을 지그 시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 항상 하늘에서 지켜보마. 자랑 스러운 나의 딸아.
- 몸 건강하려무나. 마이사.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아버지. 아르고아는 목숨을 잃었다.
문짝을 박차고 쳐들어오는 연방 의 기사들.
푸른색 궤적이 그어질 때마다 퍽 튀어 오르는 붉은색 피보라.
심장에 검날이 박히고, 각혈하며 비틀거리는 아르고아.
으득.
마이사는 이를 꽉 악물고는, 손 안에 들린 왕관과 옥새를 소중히 감싸안았다.
"아버님……"
왕관과 옥새는 아르고아가 수십 년에 걸쳐 사용한 그의 유품이기도했다.
마이사가 나직이 한숨쉬었다.
'길었지.'
왕국이 멸망한 뒤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넘어왔던가.
가족을 잃고 방황하며, 때로는 심부름꾼으로, 때로는 소동으로. 심 지어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전장에서 구르기도했다.
그러던 와중 한지훈을 만났다.
그가 왕국을 탈환해주겠노라 했을 때, 마이사는 사실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일개 백인장이 왕국을 탈환하는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었다.
허나 한지훈은 비로소 해냈다.
"약속은 지켰다. 마이사."
마이사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설마 정말 약속을 지키게 되리 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 한지훈."
"나는 한다면 하는 남자라."
"허풍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가."
"그래."
마이사는 자신의 복장을 살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제국군 장교 정복이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복장이 달라 지게 될 것이다.
머리 위에는 정모 대신 왕관을. 손아귀에는 지휘봉 대신 옥새를.
이 칙칙한 회색 제복을 벗어 던 지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을 터다.
아마 이 칙칙한 제국군 장교용 제복을 입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리라.
그녀가 여왕 자리를 받아들인다 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지훈. 나는 아직 여왕이 될 생각이 없다. 이건 되돌려주지."
여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왕관과 옥새를 내민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이사."
전혀 의외의 소리다.
그에 나는 그녀가 내밀었던 왕관 과 옥새를 받으며 되물었다.
"여왕이 될 생각이 없다니."
당연히 기쁜 표정을 지으며 여왕 자리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슈베츠 왕국의 해방, 그리고 신분의 복원. 왕가의 부활. 그녀가 줄곧 품고 있었던 숙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이사는 여왕자리를 포기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이 되는 것을 미루었다. 분명 그녀는 '아직' 여왕이 될 생각이 없다 했으 니까.
어째서 그녀는 여왕이 되는 것을 미루려 하는 것인가?
마이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지훈. 그대는 처음 나와 만났을 때, 내게 군략의 재능이 있다 했었지. 그리하여 그대는 내 재능을 높게 사 나를 동료로 받아들였었 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시나리오의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지니 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사 라이젠. 연합군 중앙군의 최고사령관이자, 나의 대적자.
나는 그녀의 재능이 탐이 났다.
그녀는 시대의 영웅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내 아래에 두 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이사를 동료로 영입했다. 가진 재능을 개화시켰다.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한 일이 많이 없다. 그대에게 도움 된 일이 거의 없었단 말이다."
그녀는 내 예상보다도 활약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된 까닭이었다.
마이사가 사관학교에서 가진 재능을 개화할 때까지 꽤나 긴 시간 이 걸렸고. 이제 막 하급 참모로서 임관한 상황.
그녀가 겪은 전쟁은 아직까진 자치령 전쟁밖에 없다.
비록 우월한 지휘능력을 선보이고, 왕궁과 이어진 비밀통로를 알려 줬다곤 하나.
고작 그 정도의 도움으로 왕위를 얻었으니 .
"한지훈. 나도 염치란 것이 있다. 그저 동화 속 공주처럼 앉아서 무 언가를 받기만 하고 싶진 않아."
"받기만 하고 싶진 않다니. 그 말은?"
"받은 만큼의 대가를 치를거란 말이다."
그녀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내가 해준 것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그리 여기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륙에서의 전쟁. 꽤나 치열 하겠지. 믿음직한 군관과 참모들이 많이 필요할거다."
"설마."
"나는 계속해 너를 보좌하겠다.
그리고 제국군을 승리하도록 이끌 것이야. 그 정도쯤 되어야 빚을 갚 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내 마음의 빚을 온전히 갚은 뒤에나 왕 위를 계승할 것이다."
"허."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 예상보다도 양심적인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여왕이 되는 것을 미루면서까지 내게 진 빚을 갚으려 하고 있다.
대견한 한편 미련스러워 보이기 도 하다.
그런 내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던 것일까.
마이사가 픽 웃으며 이어 말했다.
"물론, 내가 네 곁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건가."
"자아실현. 그리고 복수다."
언뜻 듣기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자 그녀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전에 네가 말했지. 군을 다루는 것이 재밌지 않냐고. 나도 그렇다. 군대를 움직이고, 전장을 이끄는 것이 재밌다."
"적성에 맞으니까. 재미를 느낄 수밖에."
"그래. 군을 지휘하는 건 내적성에 맞다. 절로 즐거움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대전 쟁. 지금 와서 빠지기에는 아깝구나."
사관학교에서, 그리고 이번에 치 러진 자치령 전쟁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은 마이사였다.
그녀는 군을 지휘하는 것에 재미 를 느꼈고. 그렇기에 굳이 여왕 자리를 미뤄가면서까지 군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이쪽으로, 정확히는 내 뒤, 옥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복수할 것이다."
"복수라… 누구에게?"
"연방에게."
저벅, 저벅.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마이사.
그녀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는, 옥좌마저 지나. 옥좌 뒤 배후공 간까지 나아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연방기가 걸려있었다.
아직 이곳 왕궁을 완전 점령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미처 치우지 못했던 물건.
마이사가 연방기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연방놈들은 내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 슈베츠 왕국을 멸망시켰지. 그저 왕국을 되찾기만 해서는 이쪽의 분함이 풀리지 않는다."
스르릉.
마이사가 검집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뽑아든 단검은 하급 참모용 단검이었다.
"나는 연방에 복수할거다."
단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작 달만한 검날.
그녀가 단검을 휘두른다.
"놈들의 군대를 쓸어버리고, 동부 대륙 본토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 녀석들의 수도를 불태워버릴거다. 이전에 연방놈들이 그러했듯이."
서걱. 하고 울리는 미약한 절삭음. 옥좌 뒤 자리해있던 커다란 연 방기가 사선으로 주욱 베어졌다.
"네게 받은 은혜도, 연방놈들의 원한도. 나는 받은 만큼 되돌려줄거 란 말이다."
그녀는 단 한번으로 멈추지 않고, 여러 번이나 단검을 휘둘러댔다.
서걱. 서걱. 후드득.
계속해 찢어지는 연방기. 그녀의 검날에 의해 연방의 국기를 완전히 난자되어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하하."
작게 웃었다.
마이사의 말을 들은 지금. 비로소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비로소 떠올렸기 때문에.
[마이사 슈베츠]
[연합군 중앙군 최고사령관.]
이전 시나리오의 마이사 또한 자신의 국가를 되찾았음에도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었다.
숙원을 이루는 것과는 별개로 군을 지휘하는 것에, 그리고 복수하는 것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시나리오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씩 웃었다.
"기특한 녀석."
가진 재능을 썩히지 않고 계속해 내게 조력하고자 하다니.
기특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마이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트리며 이어 말했다.
"그래. 네가 여왕이 되기 전까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직 마이사는 가진 재능을 완전히 개화시키지 못했다.
실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제국군에 남아있는다면 실전을 쌓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중앙대륙에서의 엘프 지원, 동부 대륙 연방과의 전면전, 그리고 흑마법사의 전쟁까지.
그녀가 활약할 곳이 많다.
다수의 전투를 끝내고 하나 이상 의 전쟁을 종결짓는다면.
그녀는 이전에 내가 보았던 그 마이사 슈베츠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가 기대되었다.
마이사가 제국군에 잔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