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나는 바로 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엑스트라 스킬 : 몰입' 이 활성화 됩니다.]
'몰입'.
'민첩'을 200을 넘겨 지성체가 가질 수 있는 격 이상의 능력치를 얻은 순간, 다른 엑스트라 스킬 '집중'과 반응하여 치환된 스킬.
스킬이 시전된 상태에서 천천히, 눈동자만을 굴려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의 세상이 회색 빛깔에 물든 채 멈춰있었다.
물론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충격에 튕겨나간 건물파편이나 , 시야를 가리며 일렁이는 먼지구덩 이, 내 장검 검날에서 타오르고 있는 오러의 불꽃까지.
시야 속 모든 것들이 아주 느릿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느릿하다는 것은 어디까지 나 내 체감상의 이야기.
실제 속도는 일반 병사나 기사들 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몹시 빠를 터.
내 사고가 극도로 가속되어 있기 에, 저토록 느리게 보이고 있는 것 이다.
그만큼 지금 발현되어 있는 사고 가속은 극한에 닿아있는 수준이었 으니 .
헌데 이상하다.
'그리 큰 부담이 없어.'
이토록 극한의 사고 가속이다.
본래라면 내가 지닌 대부분의 감각이 소실되고, 머리가 짓이겨질 듯 한 고통을 부담하고 있을 터인데.
너무나도 편안했다.
그저 변화라고는 시각의 대부분 이 회색으로 물들고,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뿐.
대부분의 감각은 건재했다.
장검 손잡이의 까끌한 촉각도, 역겨운 피안개의 혈향도, 입가에서 비릿하게 느껴지는 미각도.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 이다.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몰입 스킬의 성능.'
과거 '집중' 스킬도 굉장히 강대 한 효과를 자랑했다.
민첩 능력치를 키울수록, 그리고 '집중'할수록. 나는 내 감각을 잃는 대신 사고를 극도로 가속해 체감시 간을 늘릴 수 있었다.
집중스킬 덕분에 얼마나 많은 강 적을 해치우고, 얼마나 많은 역경과 고난을 돌파했던가.
하지만 '몰입'은 그이상이었다.
고작 색감의 일부와 청각을 포기 하는 것만으로 이토록 막대한 가속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니.
눈동자를 굴려, 적의 얼굴을 확인해본다.
'기플랫 랜드바론.'
놈은 막 이쪽을 향해 검은색 장검을 내뻗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뒤, 놈의 암흑색 검신은 공기 를 찢고 내 목을 난자하려고 하리라.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느리게 보인다.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는 것 처럼. 아주 느리게, 멈춘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피식. 절로 흡족한 웃음이 흘러 나온다.
'이게 바로 능력치 200이후의 세상인가.'
사실, 지금까진 게임 시나리오 난이도의 조절을 위해 능력치 상승을 최대한 지양했다.
모든 능력치가 일정 이상 올라가 버리면, 예측 불가의 수준으로 난이 도가 증가한다는 걸 이미 경험해보았기에, 가급적 능력치 상승을 미루 고 포인트를 아껴왔던 것이다.
허나 이렇듯 민첩 200, 그리고 '엑스트라 스킬 : 몰입' 의 세상을 경험하니.
그동안 능력치 상승을 두려워했 던 게 바보처럼 느껴진다.
능력치의 앞자리가 달라졌다고 이토록 강해지다니?
인생 절반 손해 본 기분이다.
고작 민첩 단일 200돌파가 이럴 진데.
다른 능력치까지 모두 200을 돌파하면 어떻게 될까?
포인트를 아껴야 한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도, 앞으로 내가 겪 게 될 새로운 경지에 심장이 두근 거려 전투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새로운 스킬의 효과에 취해, 사고가속에 의지에 너무 긴 잡생각을 해버렸다.
다시 눈을 뜨고, 눈동자를 굴려 전방을 바라본다. 그곳에 예의 검은색 장검이 자리해 있었다.
체감상 달팽이 기어가던 속도로 쇄도해오던 기플랫의 장검이 드디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지겨웠다, 기플랫.
이제 딴청 피우지 않고 널 제거해주마.
나는 확신한다.
너를 죽이고 이번 전투에서 승리 를 거머쥐리란 것을.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한없이 가속된 세상 속.
나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죽어어어어!
기플랫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장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일고, 지면이 무 너졌다. 건물 파편과 먼지가 비산해 시야를 가렸다.
직후 퍼억 하고 들려오는, 살덩 이가 터져나가는 소리. 비릿한 혈향 이 그의 후각을 자극한다.
기플랫은 확신했다.
'잡았다!'
자신이 마침내 한지훈을 처치했 다고 말이다.
그만큼 한지훈은 회피에 전념하 느라 몸이 느려지고 있었고, 그에 반해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호 조를 유지하며 그를 몰아넣고 있었다.
더해 방금 전 검격은 그의 회심 의 일격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그리고 보다 묵직하게.
지쳐 굼떠진 한지훈 따위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을 터.
- 크하하하하하!
기플랫은 기쁨의 광소를 터트리 며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커다란 암흑색 반월궤적을 그리는 그의 검날. 무언가를 참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시야를 가리는 이거추장스러운 먼지 들을 치우기 위함이었을 뿐.
후우욱.
풍압에 의해 먼지들이 쓸려나간다. 직후 깔끔해진 시야. 기플랫은 목이 잘린 채 바닥에 쓰러져있을 한지훈의 시체를 기대하며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없다?'
자리에 한지훈의 시체는 없었다.
아니. 시체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놈은 기플랫의 검날에 베어 치명상을 입었을 터. 부상을 입은 채 몸을 피했다면 적어도 흘린 핏 자국이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 조차 없었다.
그렇게 기플랫이 의아한 눈을 하고 있을 때.
"멍청한 놈'."
그의 배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기플랫은 곧장 고개 돌려 뒤 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인물이 서있었다.
- 한지훈….
한지훈 라이젠. 방금 전자신이 죽였으리라 확신했던 적이.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네놈의 느려터진 공격에 당할 것 같나?"
기플랫의 눈동자에 어린 의아함 이 더더욱 진해졌다.
한지훈의 겉모습은 너무나도 멀 쩡했고, 그에게는 아무런 상처 따위 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중상자 특유의 힘겨운 안색 따위도 자리해 있지 않았다.
한지훈은 광인이 된 기플랫의 검격을, 아주 찰나의 순간 피해버렸던 것이다.
광인 기플랫, 그조차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의 민첩함으로.
기플랫이 으득 이를 간다.
'분명 베었을 터인데.'
베는 감각이 다소 희미했음은 인 정하나.
분명 퍼억, 하고 살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고, 후각을 자극하는 비릿한 혈향이 아직도 남아있건만.
이 농밀한 혈향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기플랫. 네 목을 봐라."
철그럭. 장검을 들어 올려 기플 랫의 목을 겨누는 한지훈. 그에 기 플랫은 비어있는 왼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목덜미를 훑었다.
질척.
그의 손바닥에 검은색 핏물이 묻 어나온다.
-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이 느려터진 놈아."
한지훈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그리 맞받았다.
그 직후.
퍼어어억! 울컥! 울컥!
기플랫의 모가지에서 검은색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심장이 맥동하는 것에 맞추어 석유처럼 질척한 액체가 허공에 뿌려진다.
"목이 베인 건 내가 아니라 너다. 기플랫."
어느새 반절이나 잘려있던 그의 목 혈관이 마침내 파열해, 본격적으로 피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플랫의 전신에서 힘이, 그리고 흑마나가 점차 빠져나갔다.
쿠웅.
무릎을 바닥에 찧는 기플랫.
그가 헐떡이며 시선을 지면에 처 박는다. 자신의 목에서 빠져나온 암흑색 피가 석제바닥을 적셔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느려. 네 허접한 검격도, 자기가 베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도."
- 말, 말도 안….
어떻게 저토록 빠르게 움직였던 것인가.
분명 방금 전까지,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점차 느려지고 있었는데 . 반면 자신은 시종일관 놈을 몰아넣 고 확실한 일격을 가했는데 .
광인인 자신의 속도를 초월해 치명적인 반격을 입힌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강화란 거. 네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니까."
광인인 자신조차 이길 수 있도록, 그 찰나의 순간에 본인을 강화 시키다니.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가.
기플랫의 머릿속에 여러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자신처럼 특별한 약물을 복용했 나? 특수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 아니면 엘프의 축복을 받았나? 설마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 나?
떠오르는 의혹들은 다양했지만, 심도 있게 추리할 수 없었다.
"계속해 베고, 베고, 베어주마. 네놈이 부활하고 부활해, 그 엿같은 혹마나를 모조리 소모할 때까지. 네 놈이 생명활동을 완전히 멈출 때까 지. 계속!"
-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한지훈! 죽는 건 네놈이 될 것이니!
그는 크게 흉성을 터트리며 발악 할 뿐이다.
쿠르르르르르…!
그가 가슴속에 일렁이는 농밀한 혹마나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복원되어 가는 잘린 목. 검은색 피가 멎었다. 검신에 일 렁이는 암흑색 오러가 더욱 진하게 타오른다.
기플랫의 기세가 다시금 만전의 상태로 화해간다.
하지만 그의 기세가 드높아지는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퍼어어억!
한지훈의 검날이 움직임과 동시에 기플랫의 옆구리 살이 퍽 터져 나갔으므로.
"이제 두 번. 아니, 처음 목을 베 었을 때까지 포함하면 세 번째인 가."
검은색 피안개가 일고, 그의 갈비뻐와 내부 장기들이 순식간에 난 자되었다.
기플랫은 다시금 균형을 잃고 휘 청거렸다. 마치 수도꼭지를 튼 듯, 검은색 피가 콸콸 흘러나와 피로 난자된 바닥을 덧칠해갔다.
한지훈의 우묵한 귓가를 때렸다.
목소리가 그의
"너는 나에게 세 번 죽었다, 기 플랫."
타락해 대부분의 지성이 사라졌 던 기플랫. 그조차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죽여야 더 이상 부활 하지 않는지. 한번 봐보자고."
자신의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것 으한지훈의 장검이 재차 공기를 가 르고 쇄도해왔다.
* * *
"제기랄! 광인이 나타났다고?!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단장 각하! 지금은 한지훈 라이젠 사령관 각하께서 교 전중입니다만…."
"망할!"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적의 지원부대를 상대하고, 후방을 확보하기 위해 반절의 병력과 함께 일 층에 남아있던 베르겐이 급하게 계단으로 향했다.
'광인이라니!'
과거 정복전쟁 시절, 아직 베르 겐이 전대장 자리에 머물고 있었을 적, 그는 광인을 목격했었다.
'어째서 광인이 다시 나타난 건가?! 흑마법사 놈들은 광인육성을 완전히 포기했을 터인데!'
과거 대륙 곳곳에 있던 흑마법사들의 잔당 소탕작전에 제국 각지의 기사단이 동원되었다. 제국령 이곳저곳, 온갖 험지와 음지에서 놈들과 의 전투가 일었다.
그 와중 베르겐과 여러 기사단들은 놈들의 시행착오를 목격할 수 있었고, 광인도 그중 하나였다.
광인은 확실히 강력한 병기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
'그 비효율적인 놈을 만들다니. 어째서….'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병기였기 때문이었다.
흑마나의 정수를 만들어 광인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흑마법사 전투 단 두 개를 더 꾸릴 정도의 흑마나 가 소모된다.
얼마나 가성비가 구린지 알 수 있는 부분.
더해 다루기도 힘들었다.
폭주하기 시작한다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파괴하니, 필연적 으로 아군의 손실이 뒤따랐던 것이다.
테러 용도라면 그럭저럭 쓸 만하 나, 본격적인 전쟁에서 써먹기엔 여러모로 난해한 병기.
그렇기에 광인은 실제로 도태되었다. 제국은 정복전쟁 이후 그 어느 곳에서도 광인이라는 존재를 목 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등장했다.
베르겐의 발걸음이 더더욱 다급 해진다.
'한지훈이 위험하다…!'
광인을 제압하기 위해선 전투마법사의 원거리 마나포격이 필수.
일대일 근접 전투로는 이기기 어 렵고, 제아무리 대륙 제일이라 여겨 지는 한지훈이라 한들 당해내기 어 려울 터.
이에 베르겐은 서둘러 상층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휘하 볼로냐 기사들 또한 달려갔다.
이 정도 규모의 지원병력이면 광인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처럼 키운 휘하 기사 들이 대량으로 죽어갈 것이다.
수백 명이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베르겐은 달렸다.
'한지훈을 지켜야 한다. 우리 볼 로냐 기사단이 전멸하더라도. 아니, 설사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는 제국의 영웅이다.
자신과 볼로냐 기사단이 전멸한 다면 하나의 기사단이 소멸하는 것에 그치지만, 한지훈이 죽는다면 제국 그 자체가 기울 것이다.
그렇기에 볼로냐 기사단과 자신 의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지훈을 구해내고자 하는 베르겐 이었다.
허나 막상 현장에 도착한 베르겐 으
"…허."
헛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예상하던 광경과는 너무나 도 다른 모습이 펼쳐져있었기 때문에.
번쩍!
푸른색 검광이 번뜩인다. 기사단 장인 베르겐조차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
퍼억! 후드드득.
직후 터져 나오는 암흑색 피안 개. 오염된 장기와 핏물 등이 비산했다. 검은 불길을 휘감은 인영이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는 것은 광인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광인을… 압도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라 여겼던 한지훈은, 광인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베르겐의 허탈한 시선이 한지훈 에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