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크아아악!"
기플랫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그가 핏물을 흩 뿌리며 지면을 구른다.
쿠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쿨럭, 커헉!"
기플랫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지면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그러자 그는 자신이 입은 부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기다란 붉은색 자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피가 쉼 없이 울컥이며 흘러나온다.
기플랫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홈 쳐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치명상이군."
지금 당장 포션을 섭취하지 않는 다면 그리 머지않아 과다출혈로 절 명할 만한 치명상이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기플랫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체념은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 믿는 한수가 있다는 듯,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또렷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
비척.
기플랫이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그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지면을 짚 고 일어섰다. 그러자.
"보기보다 제법 하는데 그래, 기 플랫. 그 찰나의 순간에 내 검격을 막아 즉사를 피해내다니 말이야."
저벅, 저벅.
마치 이쪽을 압박하는 듯. 묵직하고도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기플랫은 고개를 들어 올려 소음 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역시나.
다가오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한지훈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너는 패배했다. 기플랫."
철그럭.
한지훈이 기플랫의 지척까지 다 가오고는, 장검을 드높게 치켜들었다.
"유언은 없나?"
마치 처형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하긴. 처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긴했다.
기플랫은 치명상을 입고 제대로 된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반면 한지훈은 그 어떠한 부상조차 없이 멀쩡했으니 .
그가 장검을 휘두르는 순간, 기 플랫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지 도 못하고 목이 달아날 터였다.
허나 여전히, 기플랫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자리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여유롭기까지 했으니 .
피식. 그가 웃는다.
"한지훈. 승리를 확신하는군 그래."
"그럼. 이미 네놈은 무력화 되었 으니 네 목을 취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
"과연 그럴까."
그가 질척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와 동시에 일렁이는, 붉은색으로 물 들어가는 기플랫의 안광.
한지훈의 얼굴이 굳는다.
"네놈. 설마."
나는 바로 앞의 기플랫을 바라봤다.
놈은 치명상을 입었다.
입가에서는 붉은색 핏물이 질척 하게 흐르고 있고, 내 검날에 베인 가슴팍의 제복은 붉게 물들어 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들어 올려 놈의 눈동자를 본다면.
무언가 이변이 일어났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붉은색.'
그렇다. 기플랫의 눈동자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해 희미하게 느껴지는 광기.
나는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방금 먹었던 포션, 흑마법사 놈 들의 정수였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파공성을 일으키며 공기를 가르는 검날.
청색 궤적이 그어짐과 동시, 핏물이 퍽 튀어 올랐다. 놈의 모가지 가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검은색 핏줄기가 퍽 튀어 올랐다.
그렇다. 검은색이었다.
놈의 피는 어느새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화해있었던 것이다.
나는 쯧 혀를 찼다.
"벌써 정수를 완성하다니."
시선을 내려 떨어져있는 기플랫 의 목을 바라봤다.
놈의 모가지에서는 검은색 핏물 이 푸슉거리며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떨어져있는 놈의 목.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목이 떨어지는 건 이런 느낌이 로군. 신기한 느낌이로다."
방금 전 목이 떨어졌음에도.
기플랫은 죽지 않았다.
목 없는 놈의 몸이 천천히 움직여, 바닥에 굴러다니던 자신의 머리 를 주워들었다.
목 위에 올렸다.
그러자 검은색 기운이 피어오르 며 녀석의 목과 머리가 다시금 접 합했다.
기플랫은 다시금 멀쩡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겉보기로만 멀쩡했지만.
"다시 태어난 것만 같군."
기플랫은 지금 타락했다.
놈이 아까 전 섭취했던 검은색 포션. 다름 아닌 흑마법사 놈들이 녀석에게 넘겼던 흑마나의 정수였다.
대량의 흑마나를 때려 박아 복용 자의 영혼을 타락시고, 사상과 이성, 그리고 신체까지 극한으로 변조 시키는.
흑마법 연금술사들의 작품.
으득. 이를 갈았다.
'본래는 지금 나와서는 안 되는 물건인데.'
흑마법사의 정수.
원래였다면 시나리오의 최후반부에서나 나오던 물건이었다.
섭취한다면 죽지 않게 된다.
팔다리를 잘라도, 내부 장기를 진탕내도, 목을 잘라내도.
생명활동이 정지하지 않는다.
대량의 흑마나에 잠식돼, 영혼과 이성의 타락을 대가로 목숨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헌데 그 흑마나의 정수가, 대전 말기에나 나왔던 물건이 지금 등장했다.
분명 너무나도 막대한 흑마나가 소모되기에 쉽사리 만들 수 없는 물건일 터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이른 시점에 등장하게 된 것인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연방놈들의 지원이 꽤나 빵빵했 나본데."
배후에는 연방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크라함은 흑마법학파 볼라바아의 세력을 크게 늘렸을 것 이고. 그리하여 이제는 정수까지 만들 정도의 여력을 얻었을 터.
기존에 세워놨던 계획을 수정해 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계획보다는, 눈앞 의 이 기괴한 적을 처치하는 것이 먼저.
나는 시선을 돌려 내 뒤를 바라 봤다.
"… 맙소사. 저게 무슨."
"방금 전 목이 떨어졌는데…."
"저건 뭐야?!"
그곳에는 경악한 얼굴의 제국 기사와 병사들이 자리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방금 전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기플랫의 목이 떨어졌고, 그가 다시 제목을 붙이는 기괴한 광경. 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후퇴해라."
"각하?"
"뒈지기 싫으면, 당장 물러나란 말이다!"
내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과 동시.
화르르르륵!
검은색 불길이 가열차게 타오르 기 시작했다.
- 오, 오, 오오오오!
화르르르르륵.
기플랫의 전신에서 검은색 불길 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흑마법사의 그것처럼 기괴하 게 변조되었다.
그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 힘이 끓어오르는구나!
기플랫은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강대한 기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이 공허해져갔다. 마치 자리해있던 영혼이 사라지는 것 처럼, 무언가가 사라지고 허무해진 기분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공허함은 잠깐이었다.
가슴속 뻥 뚫렸던 공백에 무언가 가 메꿔져갔다.
너무나도 막대한 양의, 기플랫 그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힘.
대량의 흑마나가 가슴속 깊숙한 곳을 메워갔다.
기플랫은 확신했다.
- 이길 수 있다!
허공을 바라보며 포효하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정면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적이 있었다.
한지훈. 그리고 놈의 배후에서 있는 제국의 기사와 병사들.
기플랫의 시선이 한지훈에게로 향한다.
- 한지훈 라이젠.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이 길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굳건한 태산처럼 웅장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허나 그가 포션을 섭취한 직후부터.
- 버러지 같은 놈.
놈이 그다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닥을 기는 버러 지처럼 하찮게 보였으니 .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밟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찬 이형의 힘, 대량의 흑마나로 인한 체감의 변화였다.
철그럭.
기플랫이 지면에 굴러다니던 장검을 주워들었다.
자신이 평소 애용하던 장검은 아니었다.
난전상황에서 죽어 나자빠진 연 방군 병사가 흘린, 흔하디흔한 군용 보급 장검이었다.
자신 같은 고위 군관이 사용하기에 심히 조잡한 물건.
허나 전혀 상관없었다.
- 죽여주겠다.
이토록 강대한 힘을 얻은 그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던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 .
그가 장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르릉!
검은색 궤적이 허공을 휩쓸고, 제국의 기사와 병사들 수십이 단번에 쓸려나갔다.
콰르르르르릉!
기플랫이 검을 휘둘렀다.
수평 베기.
기다란 검은색 궤적이 거대한 반 원을 그리며 공간을 절삭했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낮춰 놈의 검격을 피했다.
사각, 머리카락 몇 을이 검날에 잘려 흩어졌다. 놈의 검격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뒤에서있던 병사와 기사들은 고작 머리카락 몇을 잘 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
"아악! 아아악!"
수십의 기사와 병사들이 놈의 검격에 절삭되었다.
그들이 반토막이 되어 , 혹은 깊은 자상을 입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보라가 튀었다.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염병, 그러게 당장 도망치라니까!"
방금 전 나는 저들에게 후퇴를 지시했었다.
흑마나의 정수를 섭취한 적의 힘 이 얼마나 강대한지, 이전 시나리오에서 자주 보았기에.
그들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당황하는 와중 물러날 시기를 놓쳤고.
"도망, 도망쳐!"
"괴물이다! 어서 물러나!"
"후퇴하라!"
지금에서야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놔둘 기플랫이 아니었다.
- 어딜 도망치느냐!
놈이 장검을 광폭하게 휘둘렀다.
콰콰콰쾅! 콰르르르릉!
검은색 궤적이 그어질 때마다 수십의 기사와 병사들이 쓸려나갔다.
피보라가 쉼 없이 뿌려지고, 붉은색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비릿한 혈향이 너무나도 진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역겨워 토할 것만 같다.
놈은 기사와 병사들만을 노리지 않았다.
- 한지후우운!
녀석의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내 고막을 때렸다.
직후 높게 치켜들어지는 녀석의 장검.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바닥을 굴렀다.
콰콰콰콰쾅!
직후 내가 서있던 지면에 검은색 궤적이 격돌한다. 바닥에 금이 가면서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단번에 석제 바닥까지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
겨우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놈 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 한지훈! 죽어라! 죽어!
기플랫의 붉은색 안광이 점차 진 해지고, 그와 함께 놈의 전신을 휘 감았던 검은색 불길 또한 더욱 격 하게 타오른다.
녀석의 광기가 보다 진해지고.
발현하는 힘은 점차 강해져갔다.
콰쾅! 콰르르르룽!
장검이 계속해 이쪽을 노린다. 나는 그때마다 바닥을 기고, 지면을 구르며 놈의 검격을 피해냈다.
기플랫의 패도적인 힘은 오직 제국군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퍼버버벅. 수십의 인간이 베이거 나 토막 나고, 피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
"끄아아아악!"
"사령관 각하! 저희는 아군…."
"아아아악!"
녀석은 나를 죽일 생각에 가득 차 오직 장검을 휘두를 뿐이었고.
놈?의 장검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도망치는 제국의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멍하니 기플랫 옆에서있던 연방의 기사들.
그들이 놈의 장검에 의해 무차별 하게 죽어나갔다.
후욱.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검격을 회피하는 와중.
나는 생각했다.
'놈을 죽일 방법.'
흑마나의 정수를 섭취한 인물, 광인이라고 불렀다. 정수를 섭취한 직후 모든 이성이 날아가 폭주하기 때문이었다.
이전 시나리오에서 광인을 죽이는 방법은 퍽 단순했다.
'다시 살아나지 않을 때까지, 죽이고 죽이면 됐었지.'
말 그대로 죽이고 죽이면 됐다.
연합군이 광인을 상대하는 유일 하고, 확실한 해답이었다.
이전 시나리오에서 주로 동원했 던 것은 전투마법단이었다.
원거리에서, 공격마법을 한없이 투사한다. 광인이 재생에 재생을 거듭해 내제된 흑마나를 모조리 소모 할 때까지 죽이고 죽였다.
이게 그나마 안전한 방법이었다.
기사나 병사들을 투입해 근접 교 전한다면 병력손실이 막대하지만, 원거리 공격의 집중이라면 놈의 공격에 당할 염려 없이 안전하게 죽 여버릴 수 있으니까.
허나 지금은 근접상황이었으며.
- 죽어어어어어!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였다.
기플랫의 붉은색 안광이 바쁘게 회피하고 있는 내 뒷모습을 끝까지 ?아왔다.
콰르르르릉.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지면이, 벽 이 무너져 내렸다. 주변의 기사와 병사들이 휘말려 피안개를 쏟으며 쓸려나갔다.
언제까지나 도망만 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결심했다.
'내가 상대해야 한다.'
한두 번 죽이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개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열 번, 어쩌면 수십 번을 반복해 놈을 죽여야만 녀석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당연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
반면 이쪽은 단 한번의 치명타 만 허용해도 그대로 절명해버리는 상황.
- 언제까지 도망만 칠 작정이냐, 한지훈! 당당히 내게 맞서라!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놈에게 맞서는 것 대신 도주하는 것을 택하겠지.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나라면 할 수 있다."
자신이 있었기에.
물론 대량의 흑마나가 일렁이는 저장검은 패도적이고, 놈의 몸 또한 예사롭지 않다.
너무나 막대한 양의 흑마나를 섭 취했기에 녀석의 신체가 극한으로 강화된 것이다.
그야말로 혼자서 수십, 수백의 기사와 병사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래봤자다.
"강화는 네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포인트는 충분히 모아 놨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