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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285화 (285/390)

285화.

기플랫은 검을 휘둘렀다.

번뜩이는 푸른색 검광.

그의 검날이 지나간 곳에서 붉은 색 핏물이 푸확 튀어 올랐다. 두셋 의 제국 기사가 피안개를 흩뿌리며 주저앉는다.

그는 희열에 차 외쳤다.

"덤벼라, 한지훈! 이 몸은 비겁하게 숨지 않는다!"

기플랫은 한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지훈이라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직접 전투에 참여할 것이다.

이렇게 기사들이 줄줄이 죽어나 가고 있는 상황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콰아아앙!

그가 재차 장검을 휘둘렀다.

번뜩이는 검광.

파공성과 함께 핏물이 치솟고, 두셋의 기사들이 베어 나자빠졌다.

놈들이 비명 지르며 바닥을 나뒹 굴었다.

기플랫은 지면에 쓰러진 기사의 목덜미에 검날을 박아 넣으며, 다시 금 외쳤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작정이냐! 한지훈!"

지금까지 그가 처치한 제국 기사 들의 수가 몇이나 될까.

대략 스무 명쯤은 되었을 터다. 그 혼자서 무려 두 개 편대를 궤멸 시켜버린 것이다.

기플랫의 무력은 강대했다.

스스로 기사단장급의 무위를 지니고 있다 자부하는 것이 바로 기 플랫이라는 인간인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실력은 참으로 뛰어 나서, 이런 난전 상황에서 기사 스무 명쯤 처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기플랫은 하찮은 평기사 놈 들만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퍼억! 콰직.

그가 또 다른 제국기사들을 베어 넘기고는 이어 외쳤다.

"내 무력을 보고는 겁이라도 집 어먹은 것이냐?! 당장 나와라! 한지훈!"

한지훈을 처치할 것이다.

그를 처치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제국의 악마를 죽였다는 압도적인 명성, 제국의 원정군을 돈좌시켰 다는 드높은 전공, 그리고 그의 상관인 연방 통령 러셀의 신임까지.

그렇기에 기플랫은 제국 기사들을 죽여 가며 한지훈을 도발하고 있었다.

놈이 이곳까지 직접 행차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그의 도발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나대지 마라. 기플랫."

목소리가 들려온다.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마나가 실려 있는 것일까. 목소리는 난전 상황인 주변의 혼란스러 운 소음을 뚫고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나대지 않아도, 진작 죽 여주려 했었으니까."

기플랫이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에 어떤 인물이 이쪽으로 걸 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걸어오고 있는 인물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대단했다.

저벅, 저벅.

분명 주변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아야 할 그의 발걸음 소리가, 이 토록 또렷히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기플랫이 작게 중얼거린다.

"네놈이… 한지훈."

소문에 들려오던 외양과 너무나 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눈빛은 이쪽을 꿰뚫듯 날카로웠 으며, 주변을 휘감은 분위기는 위압 적이었다. 장검에 일렁이고 있는 오 러의 광휘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의 손짓과 발걸음, 그리고 무 형의 시선까지.

그 하나하나에 묵직한 존재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침내 한지훈을 목도한 기플랫 은 직감했다.

'강하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던가 하던가.

기플랫은 강자였다.

연방의 기사단장급 무관들과 겨 루어도 패배해본 적이 없었다. 다수 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무력으로서 자신을 압도했던 적을 단 한번도 마주해본 적이 없었 기에. 그 어떤 적도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감에 차 있었다.

허나 한지훈이란 인물을 실제로 목도한 순간.

기플랫은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좁았는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한지훈은 압도적인 강자였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든.

'놈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기플랫의 머리 한켠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보험을 사용해야 하나.'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플랫이 입술을 짓씹는다.

나는 기플랫을 바라보았다.

안대를 착용한, 눈가에 기다란 상흔이나 있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군관.

놈은 나름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녀석의 주변을 훑었다. 놈의 주변 바닥에는 제국 기사들 다수가 피를 질질 흘리며 쓰 러져 있었다.

기플랫 혼자서 벌인 일이었다.

쯧, 혀를 찼다.

"개같은 놈'."

기플랫은 볼로냐 기사단의 기사 다수를 처치했다.

비록 전사한 이들은 기사들 중 가장 낮은 평기사와, 중간 지휘관인 편대장급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볼로냐 기사단의 기사 들이었다.

하나하나가 황실 기사단과 비교 해 꿀리지 않는 베테랑 기사들.

그런 그들이 무려 이십이나 전사 해버렸다.

아까운 전력을 잃었으니 .

철그럭.

나는 장검을 들어올렸다.

"바로 죽여주마. 기플랫."

돌진 자세를 취했다.

검날은 비스듬하게 뒤로, 어깨를 낮추고, 다리 간격을 벌린다.

언제든지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해갈 수 있도록, 하체를 단단히 긴장시켰다.

내가 돌진해올 것을 눈치 챈 것 일까.

기플랫이 장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놈의 대응은 방어 자세를 다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 기사들! 놈을 막아라!"

연방의 기사들을 불러들인다.

그에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던 연 방측 기사들이 녀석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피식. 절로 비웃음이 나온다.

"자, 이제 누가 정말 비겁자지?"

내가 등장하기 전만 하더라도 한창 이쪽을 향해 비겁자니, 겁쟁이 니, 온갖 도발을 해오던 기플랫이었다.

헌데 막상 내가 모습을 드러내니 놈은 쫄아서 기사들 뒤에 숨으려 한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하지만 놈이 기사들 뒤에 숨어 봤자다.

"죽이는데 아무런 문제없어."

놈이 내세운 기사들을 제거하고, 그 뒤에 숨어있는 기플랫놈마저 처 치해버리면 되니까.

나는 지면을 박찼다.

콰앙!

박찬 지면의 타일이 깨져나가고, 내 몸뚱아리가 앞으로 쇄도해갔다. 적의 기사와 기플랫놈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든다.

가공할만한 속도. 압도적인 민첩 능력치 덕분에 발현된 돌파능력이다.

그에 기플랫은 기겁해서 외쳤다.

"놈을 막아!"

철그럭, 철컥!

기플랫을 보호하려는 듯, 기사놈 들이 검을 쥐어들었다. 녀석들이 장검을 휘두른다.

부우우웅.

허공을 가르며 쇄도해오는 다수 의 검날.

당연하게도, 검날 하나하나에는 나름의 오러가 가미되어 있다. 푸른색 불꽃이 타오른다.

만약 저 검날에 베인다면.

아무리 나라 한들, 나름의 부상을 입을 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민첩 능력치에 비해 내구 능력치는 훨씬 낮으니 .

하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이지.'

- 띠링!

언제나 그렇듯, 스킬이 활성화 되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사고가 극한으로 가속되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체감시간이 늘 어난다.

마치 시간 그 자체가 느려진 듯.

보이는 모든 것들이 느리게 흘러 갔다.

적 기사들의 휘두르는 검날 또한, 굼뱅이가 기어가는 듯 느리다.

피하지 못할 리 없으니 .

나는 달려가는 와중, 고개를 비틀어 적 기사의 검격을 회피해냈다.

서걱.

아슬아슬하게 어깨의 옷자락을 스쳐지나가는 적의 검날.

베인 것은 옷뿐이다. 놈의 검날 은 내 피부에 닿지 않았다.

그대로 파고들어, 기사의 측면을 통과.

놈을 스쳐지나가며 장검으로 옆구리를 긁었다.

퍼 억.

튀어나오는 핏물.

"끄아아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주저앉는다.

놈이 나자빠지는 것 또한, 집중 스킬 덕분에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녀석의 몸뚱아리가 지면에 닿기 전, 나는 검날의 경로를 반전.

내 뒤에서 등을 노리던 다른 적 기사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푸욱. 우득.

장검이 놈의 성대 안쪽으로 파고 든다. 목뼈가 부서지는 감각이 장검손잡이를 타고 느껴졌다.

검날을 비틀어 뽑아버린다.

콰드드득.

또 다른 기사의 목숨을 앗았다. 녀석 또한 목덜미에서 피거품을 쏟 으며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 이쪽으로 달려드는 기사들은 몇 명 더 있다. 그쪽을 바라보았다.

"네놈! 감히!"

"제기랄! 복수다! 동료의 복수 를.."

내가 순식간에 기사 둘을 처치해 버리자,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진형 없이, 무 작정 달려드는 적은 제일 처치하기 쉬운 적이다.

하물며 집중 스킬이 발현되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도합 다섯의 검격이 이쪽을 노리고 쇄도해왔다.

어떤 것은 목덜미, 어떤 것은 왼 팔, 어떤 것은 옆구리, 어떤 것은 어깨.

다양한 부위를 노리고 놈들의 검 날이 짖쳐 들어온다.

그 모든 공격을 간파하고 파훼했 으며.

반격했다.

파앙!

내 목덜미를 노리고 들이닥쳐온 장검.

허리를 낮춰 피해냈다.

직후 검날을 위로 찔러 올려, 기사놈의 아래턱에 박아 넣었다.

퍼억, 후드득.

비산하는 핏물.

검날을 빼내자 놈이 힘없이 털썩 무너진다.

다음으로, 내 왼팔 노리고 들어오는 수평 베기.

피하지 않고 쳐냈다.

채앵!

반발력에 녀석의 몸이 흔들린다.

그 빈틈을 노리고 놈의 목을 베 어버렸다.

서걱! 절삭음.

"컥, 쿨럭…!"

녀석이 피거품을 쏟으며 뒤로 넘어간다.

계속해 기사들을 죽여 나갔다.

놈들의 공격을 피하거나 쳐내고, 반격하면서. 적을 차례로 무찔렀다.

내 주변에 놈들의 시체가 하나둘 쌓여나간다.

그렇게 내가 적 기사 편대를 세 개쯤 박살냈을 때.

"염병할 놈들."

파앙!

장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 연방 기사놈들은 이쪽으로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달려드는 기사놈들을 족족 베어넘기니,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좀 더 먼 곳을 바라본다. 그러자 노리고 있는 목표 가 보였다.

"기플랫."

기플랫 랜드바론. 내게 호기롭게 도발을 걸어왔던 인물.

놈은 기사들을 먹잇감으로 내던 지고는,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대략 백보 정도 거리까지 도망친 녀석은 긴장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쯧. 혀를 찼다.

"귀찮게 하기는."

이미 연방 기사놈들의 기선제압은 확실하게 해놨다. 이제 놈들은 이쪽으로 덤벼들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 .

그 말인 즉, 기플랫 놈을 지켜줄 고기방패가 더는 없다는 말이다.

후욱.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만 죽을 때다. 기플랫."

녀석을 더 이상 살려줄 이유가 없다.

나는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해갔다.

"괴물 같은 놈…!"

기플랫은 멀찍이서 한지훈이 전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놈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차례로 기사 스무 명을 처치하는 것. 자신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것. 물론 가능했다.

기플랫은 나름의 무력이 있었으 니까.

하지만 한지훈은 달랐다.

그의 무력은 자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최소한의 오러만을 운용하며 효율적으로 전투했다.

기사들의 전신갑주 장갑판과 장갑판 사이, 혹은 맨살이 드러낸 목덜미 등.

노리기 어렵고 치명적인 곳에 쉼 없이 장검을 박아 넣었다. 순식간에 협공하는 기사들을 쓸어버렸다.

헌데도 한지훈은 여유가 넘쳤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연방의 기사들을 몹시 짧은 시간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기플랫의 시선이 한지훈의 장검 으로 향한다.

"…마나량이 도대체 어찌 되먹은 건지."

그의 장검에는 여전히 푸른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불꽃이다.

자신도, 그리고 연방의 그 어떤 기사들조차 결코 발현할 수 없는 찬란한 광휘.

무려 기사 삼십을 처치했음에도 저토록 강한 오러광이라니.

그것은 즉, 아직도 한지훈이 보 유한 마나량은 막대하다는 뜻이었다.

기플랫이 작게 중얼거렸다.

"… 보험."

그가 손에 들린 유리병을 바라봤다.

역시나 예전에 보았던, 흑마법사 가 넘겼던 포션이었다.

질척한 검은색 액체가 유리병 속에서 흔들린다.

기플랫의 읊조림이 이어진다.

"정말 사용하기는 싫지만."

연방과 협력 중인 흑마법사들이, 꼭 필요할 때 사용하라고 자신에게 넘겼던 물건이다.

기플랫은 아무리 위기에 몰렸다 한들, 이 물건을 가급적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고고한 자존심이, 그리고 사용 후 있을 부작용의 존재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 기분나 쁜 물건을 사용하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허나.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괴물이 오고 있기 때문에.

콰앙!

한지훈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무려 백보에 달하는 이 먼 거리 를 쏜살같이 돌파해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 눈 깜짝 할 사이에 한지훈 은 그의 지척까지 도달할 것이고. 순식간에 기플랫의 목을 떨어지게 만드리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기플랫이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

"제기랄."

기플랫은 욕지거리를 뇌까리며 코르크 마개를 빼냈다.

포옹.

울리는 공기 빠지는 소리.

그는 포션을 입가에 가져다 대어 마셨다. 꿀꺽이며 그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기플랫이 막 포션의 검은 액체를 집어삼켰을 때.

콰르르릉!

한지훈의 장검이 공기를 찢고 쇄 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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