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마이사는 눈을 감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야심한 밤.
아직 어렸던 마이사는, 높다란 왕궁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본래였다면 슈베츠 왕국 수도의 아름다운 야경이 자리해 있었어야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소의 그것이 아니었다.
- 적이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 연방놈들이 대로를 따라 진군 하고 있습니다! 예비대 출격…!
- 제기랄! 막을 수 없습니다! 적의 병력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 수도 가 함락된다면, 우리 슈베츠 왕국은 끝이란 말이다!
- 적이 광역마법을 무차별 난사 하고 있습니다!
- 아군 전투마법사들이 화력에서 밀립니다.
- 맙소사… 안돼…!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마법폭 격의 굉음.
혼란스럽게 메아리치는 여러 군 관과 기사들의 고함소리.
불길이 인다.
도시가 불타오르고, 붉은색 겁화 가수많은 건물을 집어삼켰다. 검은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 하늘을 가렸다.
연방의 군세가 대로를 따라 밀고 내려온다.
쿠구궁. 콰르르릉.
주변 공기를 진동시키고, 귓가를 때리는 광역마법의 위용.
충격파가 왕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정에 붙어있던 먼지들이 후드 득 떨어져 내려 마이사의 금색 머리카락 위에 쌓인다.
직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 국왕 전하!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곳 왕궁이 함락당하는 것 도시간문제입니다!
- 대피하셔야 합니다. 비밀통로 를 개방하겠습니다!
근위 기사들이 대피를 촉구하는 목소리였다.
이에 마이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메아리 친 알현실의 중앙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근위기사들과 마주하고 있는 자신의 아비가 있었다.
- 비밀통로 개방이 완료되었습니다. 어서 대피하셔야 합니다! 아르 고안 국왕 전하!
아르고안 덴버 슈베츠.
그 어느 국왕보다도 마음속 깊이 백성을 헤아리고, 하늘처럼 드높은 지성으로 국가를 현명하게 운영하는 .
혼란스러운 시대에 몇 없을 성군이었다.
…깊은 국가 슈베츠 왕국의 제21대 국왕이자, 마이사가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던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 자신의 아버지, 아르고안은.
- 아니. 국왕된 이로서 왕국을 포기하고 도주할 수는 없다.
대피를 재촉하는 근위기사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피하지 않겠노라고.
자신은 이자리를 지키겠노라고 말이다.
근위기사가 경악한다.
- 전하!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 나는 이곳 슈베츠 왕궁에 끝까지 남아있겠다. 슈베츠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슈베츠와 함께 죽 겠다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조금이 라도 더 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살아남을 수 잇을 터이니.
- 전하…!
아르고안은 그런 인물이었다.
국왕인 자신보다는 국가의 백성 과 민중을 헤아리던 인물.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왕국과 백성들을 아꼈었다.
- 내가 도주해 살아남는다면. 연 방은 도주한 나를 찾아 죽이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겠지. 그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죽고 다칠 것 이다.
- 어차피 패배한 전쟁이다. 우리 슈베츠는 패배했고, 연방은 승리했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전쟁. 더 길게 끌어봐야 백성들의 고통만 가 중될 뿐.
-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되었지… 내 목숨을 끊음으로서 말이야.
그래서 왕성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자신이 죽어야만 이전쟁이 끝나고, 연방의 파괴와 약탈행위가 멈출 것을 알고 있기에.
저벅, 저벅, 털썩.
허탈한 발걸음으로 옥좌를 향해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 아르고안.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 마이사.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 이리로 와 보거라.
그에 창가에 붙어있던 마이사는 총총 걸어가 아르고안의 바로 옆에 섰다.
아르고안이 마이사의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 마이사. 네게 슈베츠를 물려주 지 못해 미안하고도 아쉽구나. 총명 한 네가 다스릴 슈베츠 왕국이 모습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는데….
마이사는 고개를 들어올려, 아르 고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했다.
아르고안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체념의 감정이 가득했다.
허나 그는 애써 인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마이사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거다, 마이사. 하지만 이것 하나는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딸이 자, 우리 영광스러운 슈베츠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 왕녀다.
-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그 어떠한 고난을 마주하게 되어도. 가슴속 긍지와 신념을 버리지 말거라. 비록 슈베츠는 멸망했더라도. 우리 슈베츠의 혈통은 네 혈관을 따라 계속해 맥동할 터이니.
아르고안이 재차 마이사의 머리 를 쓰다듬을 때.
콰앙! 콰르르르릉! 쿠궁….
재차 굉음이 울렸다.
직후 왕성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 지면이 흔들리고, 창문이 깨져 유리 파편이 비산했다. 아까 전보다 더욱 많은 먼지가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 전하! 연방군이 왕성의 벽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 적 기사들이 진입! 놈들이 왕 성에 침입해 오고 있습니다!
- 경비들은 얼마 버틸 수 없습니다. 어서 대피하셔야 합니다!
다급히 외치는 군관들.
연방의 기사들이 왕궁의 벽을 뚫고 침투했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여러 전투 의 소음들.
창칼이 맞부딪히고, 오러로 강화 된 검날이 공기를 찢어발긴다. 경비 들이 내지르는 고함과 단말마 소리 가 울려온다.
아르고안이 마이사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 이제 헤어져야겠구나. 마이사. 부디 굳세게 살아가려무나.
- 전하! 어서 대피를-.
- 나는 내버려두고, 마이사를 대 피시켜라. 이 몸은 끝까지 이자리를 지키겠다.
- 안 됩니다! 전하께서도 대피하 셔야…!
- 내 마지막 명령이다. 빌로안 근위기사단장. 마이사를 비밀통로로 대피시키도록. 지금 당장.
- …제기랄! 국왕전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철그럭, 철컥.
기사단장이 마이사를 번쩍 집어 들었다. 직후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마이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기 에, 상이 제대로 맺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마이사의 눈가를 아르고안 이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 항상 하늘에서 지켜보마. 자랑 스러운 나의 딸아. 어서 출발하게. 빌로안.
- …알겠습니다. 왕녀 저하, 모시 겠습니다.
- 몸 건강하려무나. 마이사.
마이사는 제 아비의 이름을 목 놓아 외치고, 그때 그녀를 안아든 기사단장이 출발했다. 아르고아의 얼굴이 저 멀리 떨어진다.
그 직후.
콰앙! 우지끈!
커다란 굉음을 울리며 알현실의 문짝이 부서지고, 시퍼런 오러광을 철철 흘리는 일단의 기사들이 들이 닥친다. 연방의 기사였다.
그들이 알현실 내 슈베츠의 대신 들을 참살하기 시작했다.
퍽, 콰직. 서걱. 우드득.
푸른색 궤적이 그어질 때마다 퍽 튀어 오르는 붉은색 피보라.
고위 대신들이 힘없이 쓰러지고,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아든 군관들 또한 검째로 절삭되어 바닥에 곤두 박질친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것은, 가장 배후에 있던 아르고아였다.
퍼억!
심장에 검날이 박히고, 각혈하며 비틀거리는 아르고아.
그의 육신이 스르륵 무너지는 것을 끝으로 마이사의 회상이 끝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눈을 떴다.
"생각은 모두 정리했나보지? 마이사."
그러자 황량한 바위산을 배경으로,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어떤 청년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비밀통로를 찾고 보니 꽤 감회 가 올라온 것 같던데."
역시나 한지훈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마이사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는, 시선을 돌려서 어떤 방향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단번에 비밀통로를 찾아내다니. 네 기억력은 참 대단하구 만 그래."
마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지훈이 바라보는 곳을 똑같이 바라 봤다.
그곳에 있었다.
바위와 바위가 겹친 사이 틈. 어 둑한 음영이 드리워진 그곳에, 척 보기에도 견고한 철제 문짝이 자리 해 있었다.
과거 마이사가 도망쳐 나왔던 비밀통로의 출구였다.
그녀가 통로를 보며 말한다.
"왕궁에서 도망쳐 저 비밀통로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한지훈."
왕궁을 지키던 병사와 기사들. 연방 기사들의 창칼에 도륙 당했다.
자신의 아버지 아르고아. 마지막 까지 옥좌를 지키다 죽었다.
자신을 대피시키던 기사단장. 그녀를 비밀통로 출구 밖으로 데려다 주고는 곧 절명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아침에 일국 의 왕녀에서, 돌봐줄 이하나 없는 천애고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 경을 겪었던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시커먼 검 댕과 먼지로 얼굴을 가렸다. 남자 행색으로 돌아다녔다. 고아로서 멸 시받고 진창을 뒹굴었다. 심지어 소년병으로 징집당해 전장에 내몰리 기까지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는 이자리에 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복수.'
저벅, 저벅.
그녀가 천천히 걸어 비밀통로의 출구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전신갑주를 입은 백골 하나가 바위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근위 기사단장 빌로안 경."
마이사를 대피시켜준 인물이었다.
그는 비밀통로를 사용해, 마이사 그녀를 수도 밖으로 대피시키는데 에는 성공했으나.
추격해오던 연방군 기사들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결국 절명했었다.
그 근위기사단장 빌로안의 시체 가 바로 이 백골이었다.
그녀는 빌로안의 시체 앞에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고했다.
"내가 돌아왔다."
하지만 역시나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시체는 말이 없기에.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사는 계속해 고했다.
"나, 마이사 슈베츠 제1왕녀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그녀는 기억 속에 있던 인물들을 떠올린다.
"나의 아버지 아르고아 슈베츠 국왕,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던 그대 빌로안 근위기사단장, 왕국에 충 성을 바치던 대신과 관료들. 그리고 왕국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던 백성 과 병사들."
연방에 의해 희생당했던 이들.
모두 그녀의 가슴 한켠에 아릿하 게 묻혀있다.
마이사는 과거, 슈베츠왕국이 멸망했을 당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맹세했었다.
"그대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복수하겠노라고.
슈베츠 왕국을 차지한 연방놈들을 몰아내고, 멸망한 자신의 조국을 재건하겠노라고.
그리고 그때가 머지않았다.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하늘에서 똑똑히 지켜보아라. 연 방놈들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이상하군."
어둑한 밤. 기플랫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지도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보는 지도는 역시나 군사지도였다. 제국군의 움직임이 붉은색 화살표로 강조되어 있는.
그가 이어 중얼거린다.
"제국놈들의 움직임, 단순히 분열 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
지금까지 그의 눈은 승리에 대한 기대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그렇 기에 미처 눈치 채지 못했었다.
제국군의 움직임이 단순히 분열 되어 갈기갈기 찢어진 것으로 보기 에는 수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며칠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냉철한 시야를 되찾았고, 그렇기에 마침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열된 제국놈들의 군대. 크게 보면 두 방향으로 재합류하고 있다.'
놈들의 정예병력이 수도의 동쪽 방면에, 그리고 대다수 주력군이 수도 남쪽 방면에 모여들고 있다.
어째서 인가?
이미 제국놈들은 내분으로 인해 분열되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다시 금 뭉쳐지고 있는 것인가.
순간 기플랫은 깨달았다.
"제국놈들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콰앙!
책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서는 기플랫.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어 읊조린다.
"놈들이 부대를 잘게 쪼갠 것은 이쪽의 눈을 가리려는 기만책. 연막 이다!"
그가 시선을 돌려 수도의 동쪽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은 황량한 바위산 지대였다. 별달리 발전한 도시도, 쓸 만한 자원도, 식량을 얻을 농경지대도 없는.
헌데 왜 제국의 병력이, 그것도 볼로냐 기사단을 비롯한 북부군 최고의 정예병력이, 저 보잘것없는 바위산지대에서 자주 목격되는 것 일까.
행군의 편의성을 생각한다면 비교적 지형이 평탄한 평야지대에서 많이 목격되어야 할 터인데.
기플랫은 추론해본다.
'설마. 저 바위산 인근에 무언가 이쪽을 공략할만한 수단이 있는 것 인가.'
제국군이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 었던 추가 병력이라던가.
혹은 몰래 이곳 수도 안쪽으로 파고들 수 있는 비밀통로 라던가.
만약 그렇다면 곤란하다.
'정밀 정찰이 필요하겠군.'
기플랫은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렇기에 통신 수정구를 집어 들고 곧장 지시했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찰 전력을 수도 동쪽방면에 집중시켜 라. 무언가 수상한 것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 명령을 따릅니다. 사령관 각하.
합당한 지시였다.
제국군이 동쪽에서 무언가 꾸미 고 있는 기색을 감지한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대책을 수립해야 했으니까.
허나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각하! 급히 보고 드립니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기플랫이 명령을 하달하고 통신을 끊은 직후, 다시금 통신수정구가 발광하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곳 총독성의 경비를 맡은 경비대장 의 목소리였다.
그의 다급한 음성이 기플랫의 집무실을 울렸다.
- 적습! 적습입니다! 적의 병력 이 수도 내부로 잠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