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사령부가 적막에 휩싸였다.
너무나 뜬금없는, 그리고 갑작스 러운 소식이었기에.
그 누구도 미처 반응할 수 없었 던 것이다.
허나 사령부를 그득 메웠던 숨막 히는 적막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나둘, 내가 밝혔던 소식에 대해 반응을 시작했다.
"마이가 슈베츠 왕가의 인물이라 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한지훈!"
"… 슈베츠 왕가는 이전에 모두 전멸했다고 들었다만,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던 건가."
"믿기지 않는군…. 마지막 왕녀 라…"
나는 그들을 둘러 살펴보았다.
반응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경악하거나, 놀라거나, 혹은 내 말 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눈초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말했다.
"마이사가 슈베츠 왕가의 일원이 었다는 사실, 믿기지 않을거다. 믿지 않아도 좋아."
중요한 건 바로 그녀가 슈베츠 왕궁으로 향하는 비밀통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 .
나는 시선을 돌려 마이사를 바라 봤다.
그녀 또한 내가 갑작스레 자신의 정체를 밝힐지 몰랐던 것일까. 이쪽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 마이사. 적절한 시기에 밝힐까 했다만 어쩔 수 없었어."
"허…. 귀뜸이라도 해주지 그랬 나, 한지훈."
"글쎄. 나는 이렇게 회의를 열고, 다양한 의견들을 듣다 보면 새로운 방법이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군. 별 수 있나. 네가 알고 있을 비밀통로를 사용할 수밖에."
이전에, 마이사는 내게 말한 적 이 있었다.
슈베츠 왕국이 몰려드는 연방군 의 군세에 의해 함락당 할 무렵. 오직 그녀만이 슈베츠 왕궁 내에 마련된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네가 사용했던 비밀통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마이사?"
물론 전혀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의 시나리오를 진행했던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지능이 얼마나 드높은지. 그녀의 기억력과 사고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마이사 슈베츠란 그런 인물이었다.
여성이라는 성별조차 그 끝을 모르는 지략과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극복해버렸던 인물.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할지 라도, 그녀라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터.
"나는 모지리가 아니다. 한지훈."
그런 내 추측은 당연히 틀리지 않았고.
"비밀통로의 위치 정도야, 똑똑하 게 기억하고 있지."
마이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지휘봉을 집어 든다. 그리고 직후.
"비밀통로의 위치는, 이곳이다."
탁.
소리가 나도록, 전략지도 위 어느 지점을 봉으로 짚는 마이사.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수도 근교, 서쪽 바위산의 중턱에 작은 동굴이 있다. 그 동굴 안쪽에 슈베츠 왕궁까지 이어진 기다란 비밀통로가 있지."
"바위산 중턱이라. 너무 포괄적인 데. 길을 안내해줄 수 있나?"
"길 안내라…. 나를 저 인근 지역에 데려다준다면 안내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현장에 가서 주변 지형지물을 본다면 정확한 위치가 떠오를테니."
"좋아. 그럼 길 안내를 부탁하지. 마이사."
비밀통로의 위치를 알게 된 이상, 우리 군은 모든 문제점을 해결했다.
병력을 지상이 아닌, 지하를 통 해 슈베츠 왕궁 안쪽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말인 즉, 밖에서 희생양 역할을 맡은 민간인 징집병과 전투를 회피하면서, 적의 수뇌부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이제부터, 각 단장들에게 임무를 하달하지. 막힌 귀 파고 잘 들어라."
어떤 병력이 비밀통로를 통해 침 투할 것이고, 어떤 병력이 야지에서 적의 주의를 끌 것인지.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볼로냐 전투기사단과 각 군단의 레인저 연대는 비밀통로를 통해 왕 궁으로 잠입하는 침투조다. 그리고 나머지, 군단 주력군과 볼로냐를 제 외한 전투기사단과 전투마법단은 야지에서 적의 주의를 끄는 양동조다."
"양동조가 적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동안, 침투조가 왕궁 내부에 있을 적의 수뇌부들을 처치하는 것이 로군요."
"바로 봤다."
나는 군을 두 집단으로 나눴다.
비교적 출중한 정예도를 지니고 있는 볼로냐 기사단과, 각 군단의 레인저들을 침투조로. 나머지 대다수 병력 구성원들은 양동조로.
침투조는 적의 수뇌부를 처치하는 주공이고, 양동조는 적이 이쪽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하기 위한 연막 겸 조공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 띠링!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연방 자치령-슈베츠 왕궁까지 침투. 연방군의 사령부를 완전히 제 압하고, 참모진을 모조리 처치하라.]
나는 침투조를 지휘하게 되었다.
즉, 직접 일선에서 병력을 이끌 어 적의 중심부까지 직접 파고들게 되었단 소리다.
피식 웃었다.
"자. 연방놈들 모가지만 따면 슈 베츠 왕국에서의 전쟁은 끝난다.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연방놈들의 대가리를 날려버리는 일. 예상보다 쉬울 것이다.
나는 곧 있을 전투를 준비한다.
"제국놈들. 역시나 우왕좌왕하고 있군."
기플랫 랜드바론이 지도를 바라 보며 그리 읊조렸다.
퍽이나 흡족한 것일까.
그의 입가에는 질척한 미소가 그 려졌고, 눈동자 속에는 기쁨의 감정 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기야 기쁠 수밖에 없다.
"슈베츠의 버러지들과 함께 공멸 하거라. 한지훈."
곧 한지훈에게, 그리고 그가 이 끄는 제국군에게 민간인 징집병을 앞세워 강력한 일격을 가할 것이었 으니까.
기플랫은 내심 확신했다.
'이번 전투로 제국군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아니, 치명적인 걸 넘어 원정군 그 자체가 돈좌 될 수도 있지.'
이번 수도 공방전에 동원된 민간 인의 숫자만 백만이요, 전투에 투입 될 정규군 병력 또한 팔만이나 되었다.
무려 백만하고도 팔만의 거대한 군세가 제국군을 덮치는 것이다.
아무리 정예도가 제국군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다 한들.
민간인 징집병들이 전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들.
제국군의 수 배에 달하는 , 아예 자릿수가 다를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연방군에게 있다.
전쟁이란 머릿수로 하는 것은 아니다만, 머릿수의 이점을 결코 무시 할 순 없는 노릇.
때문에 자연히 높은 수준의 전공을 기대하게 되는 기플랫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기플랫 최고사령관 각하. 보고드 립니다."
덜컹!
기플랫의 휘하 참모가 사령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아무래도 그가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을 보아, 꽤나 다급한 사 안일 터.
참모가 입을 열어 보고했다.
"제국군이 기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 놈들이 드디어 전투를 벌 이려는 것인가."
기플랫의 입가에 다시금 환희의 미소가 떠오른다.
"곧 슈베츠와 제국이 서로를 난 자하는 광경을 볼 수 있겠군."
정말 곧이다.
곧 제국놈들과 전투할 수 있다. 역겨운 슈베츠의 민간인 놈들과, 혐 오스러운 제국군 병사들을 충돌시켜 두세력이 서로를 난자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리 기대하는 기플랫이었다.
더해 좋은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령관 각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적은 민간인 백만이 전 장에 동원됐다는 사실에 분열된 듯 보입니다. 적의 전력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흩어집니다."
보고하던 참모가 어떤 서류를 꺼내 보여준다.
기플랫이 그것을 받아들어 살펴 보니, 다름 아닌 전략지도였다.
수도 근교에 도달했던 제국군의 최신 동향을 정리해놓은 군사지도 인 것이다.
그리고 지도를 훑어보던 기플랫 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확실히… 놈들이 분열되기 시작했군."
지도에 보이는 제국군의 움직임 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이었다.
크고 작은 제국군의 군세가 뿔뿔 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군단은 수도 방향으로 북진을 하는가 하면, 어떤 천인대 규모 의 부대는 오히려 후방으로 물러나기도했다. 몇몇 기사단들이 전장인 수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동쪽이나 서쪽으로 우회하기도했다.
말 그대로 사분오열되어 각자도 생하는 모습.
씨익. 기플랫이 기분좋은 미소를 짓는다.
"나약한 제국놈들이라면 반드시 분열이 일어날 줄 알았지."
이 또한 기플랫의 노림수 중 하나였다.
민간인을 학살하며 승리할 것인 가, 말 것인가.
이것은 몹시 민감한 문제였다.
어떤 장성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한이 있어도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할 것이다.
반면 어떤 군관은 전투를 회피하고, 명령에 불복종하는 한이 있더라 도. 민간인을 죽이는 걸 거부할 것 이다.
개개인의 가치관과 양심에 따라 마찰이 생기면서, 마찰은 곧 대립으로 발전할 것이고.
대립은 분열을 야기할 터.
실제로 적은 지금 사분오열되는 중이다.
누군가는 전투하기 위해 전진해 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민간인과의 전투를 회피하기 위해 우회하거나 후방으로 물러나고 있다.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부대 간 의 연계가 무너진다.
기플랫이 피식 비웃는다.
"하지만 제국놈들. 생각보다도 훨씬 나약한 놈들이었어. 설마 놈들이 이토록 빠르게 분열될 줄은 나도 예상 못 한 일이다."
제국군의 분열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다.
벌써부터 단독행동하는 부대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니.
이래서야 제대로 된 회전 한번 없이 적을 이긴 꼴이나 다름없다.
허나 기플랫은 여기서 이상함을 느꼈어야했다.
어째서 제국군의 분열 속도가 이 토록 빨랐는지.
제국군이 분열되어 뿔뿔히 흩어 지고 있음에도, 어째서 저토록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지.
이상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추 리했어야했다.
하지만 곧 있을 승리에 취한 기 플랫은 그런 세세한 이상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한 이상은 연방의 대 패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자치령 수도 공방전이 곧이다.
"연방군 놈들은 분명 우리가 분 열되었다 생각하고 있을거다."
두두두두두.
전투마를 타고 달린다.
왼손으로는 고삐를,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매만 지며, 고개를 들어 올려 전방을 바라본다.
그러자 저 멀리 보인다.
바위산.
회의에서 마이사가 짚었던 그 바위산이다.
드문드문 나 있는 풀쪼가리를 제 외하고는, 별다른 식물 등이 보이지 않는 메마른 산.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저곳 어딘가에 슈베츠 왕궁 내부 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다.
두두두두두.
나는 바위산을 향해 달려가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기만이었다. 모든 건 비밀통로를 탐색하고, 그곳으로 병력을 보내는 걸 가리기 위한 연막작 전에 불과하지."
나는 병력을 뿔뿔히 흩어 기동하 게 만들었다. 적에게 이쪽의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겉보기로는 병력이 분열돼 사분 오열된 것처럼.
실제로는 추리고 추린 정예병력 이하나둘 바위산 근처로 접근하고 있었으니 .
"이제 비밀통로만 찾는다면, 놈들의대가리를 손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 이거지."
고삐를 살짝 당겨, 전투마의 속도를 늦췄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지축을 울리던 말발굽 소리가 가 라앉고, 터덜터덜 걷는듯한 맥빠진 소리가 인다. 그리고 나는 바로 뒤, 마이사를 바라봤다.
마이사는 퀭한 얼굴로 내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마의 전력질주가 퍽이나 위협적이었던 모양.
나는 픽 웃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토하고 싶으면 말해. 바로 내려 주지. 내 등짝에다는 하지 말고."
"…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
마이사가 그리 말하고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뒤늦게 멀미가 몰려오는 모양.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토 따위를 내가 할 성 싶은가?"
"방금 전 거의 할 뻔한 거 같은 데."
"닥치고 어서 내려주기나 하거라.
이러다 진짜 그대의 등짝을 더럽힐 수도 있으니 ."
"그럼 곤란하지. 이 갑주가 얼마 짜리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를 지면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마이사 가 눈가를 찌푸린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심호흡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고, 먼 풍경을 바라봐. 그렇게 하면 멀미가 좀 가라앉을거다."
마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 호흡했다. 그리고 시선을 아득한 곳 으로 던졌다. 주변의 풍광을 살핀다. 나 또한 마이사를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이 바위산의 드넓은 전경이 보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 일렁이는 흙먼지 너머로 보이는 바위산의 허전한 모습.
잠깐 주변의 경관을 살피던 마이 사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이 풍경. 눈에 익은데."
"그러냐."
아무래도 그녀의 기억속에 있는 풍경인 듯하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마이사.
저벅.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한지훈. 비밀통로가 어디인지 알 것 같다."
나는 그녀가 향하는 곳을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