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280화 (280/390)

280화.

연방 자치령 최고사령부.

벽면에 걸려있던 전략지도를 지 그시 바라보던 기플랫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국놈들이 수도권역까지 접근 했군."

그가 바라보던 전략지도에는 두 터운 붉은색 화살표가 남쪽에서 북쪽방향을 향해, 이곳 연방 수도 근교까지 주욱 그어져 있었다.

다름 아닌 연방의 적, 제국군의 진군 경로였다.

지도를 살피던 기플랫을 향해 휘하 참모가 고했다.

"각하. 애석하게도… 저희가 민간 인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놈들 이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수도 근방 도시들이 모조리 텅텅 비어있는데 말이다. 제국놈들은 덜떨어진 모지 리들이 아니다."

기플랫이 무표정하게 답한다.

그의 말대로, 애시당초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하기 힘든 행동이긴했다.

수도 근처 대다수 도시의 시민들을 모조리 징집해버렸다.

그리하여 지근 수도권역 대다수 도시들은 마치 유령도시와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

적이 눈치 채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허나 그렇다 한들.

"뭐, 제국놈들이 눈치 채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다. 놈들에게는 별다른 수가 없을 터이니."

바뀌는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식, 웃는 기플랫.

"우리는 그저 백만의 고기방패를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연방은 이미 민간인 징집절차를 거의 완료했다.

제국군이 이주일 가까이 행군해 오는 동안, 연방 자치령 내에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었다.

기플랫이 시선을 돌려, 전략지도 의 바로 옆에 자리해 있는 어떤 보고서를 집어 든다.

이번 무제한 동원령의 동원 결과 를 정리한 보고서였다.

그가 보고서를 눈으로 훑어보며 이어 말한다.

"… 물론. 그 백만의 전력은 쓰레기나 다름없지만."

백만의 전력, 그대다수는 허수에 불과했다.

농기구를 조잡하게 휘두르며 약간의 전투력을 발휘할 중장년 남자 들이 반 정도.

나머지는 여자, 성인도 못된 애송이, 혹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노인 따위니.

야전에서 맞붙는다면 단숨에 쓸 려나갈, 바람 넣은 풍선이나 다름없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을 운용한다 한들, 이쪽으로 북상해오는 제국군을 제대로 저지 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쓰레기는 쓰레기 나름대로 쓸모 가 있단 말이지."

기플랫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씨익.

그의 입가에 자리해있는 미소가 더더욱 진해진다.

"이제 놈들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자, 모두 모였나?"

나는 그리 말하고는 사령부 막사 내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내 측근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 들이 많이 보인다.

아주 이전부터 내 최측근이었던 오스카, 베르겐, 제피르부터. 북부 군의 여러 군단들을 지휘하는 장성 들. 전투마법단 단장들과 기사단 단장들. 더해 그들을 보좌하는 참모와 장교들까지.

무려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이 커다란 사령부 막사가 꽉 채 워질 정도로 퍽 많은 수.

나는 이어 말한다.

"이미 전파했다시피, 연방군 놈들은 민간인을 무제한 동원하려 한다. 그 수가 약 백만."

참모들이 조사한 바로는 그러했다.

연방 자치령 수도와 그 인근 도시들의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 적은 백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나는 이어 말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민간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갈 아버리고 피에 젖은 승리를 쟁취할 지.

혹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볼지.

사령부 내의 인원들에게 묻는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대들의 의견을 한번 듣고 싶군."

내 발언 허가가 나온 직후.

여러 장성과 단장들이 하나둘 입을 열어 의견을 교환했다.

"물을 것도 없군. 민간인이라 해 봤자 어차피 타국의 민간인이다. 간단하게 쓸어버리고 수도를 함락시키면 된다. 고민할 값어치가 하등 없군."

"그건 곤란한데 그래. 민간인을 학살하며 점령한 군대는 그 통치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점령지를 안정화시켜야 보급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인 병사들의 정신 건강도 문제될 것 같군. 원정이 오래 지속되는 만큼, 이 부분도 주의해야 하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연방 자치령을 철저하게 안정화시키지 않는다면 원정이 지속되는 동안의 보급망이 불안해진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정리해야…"

"차라리 수도를 포위하는 게 어 떠한가? 적에게는 백만의 징집병을 먹여살릴 만한 식량이 있을 리 만 무. 넉넉잡아 한달 정도면 항복하거 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스스로 무너질 터인데."

"한 달의 시간이 얼마나 긴 줄 아는가? 연방 원정군 주력이 중앙 대륙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 당장 움직여도 시원찮은 판에, 일개 자치령 수도 공략에 한 달이나 지연된 다면 절대 엘프를 구원할 수 없을 터다."

"그럼 군의 진군 경로를 우회시키지. 수도를 피해 북부 끝단 항구 만 장악한다면 원정에 문제는 없지 않은가?"

"보급망의 안정을 생각해야지. 언제든지 우군의 보급로를 급습할 수 있는 백만의 적 병력을 후방에 남 겨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자살 행위야."

"허면 어찌한단 말인가?! 민간인 징집병과 교전하는 건 피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간을 지연시 켜서는 안 되고, 우회 또한 불가능.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가만히 군관들의 회의 내용을 지켜보았다.

역시나, 압축되는 선택지는 대략 세 개 정도였다.

'첫째, 민간인 징집병을 격파하고 단시간 내에 수도를 장악한다.'

곤란하다.

민간인 징집병을 쓸어버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이후 점령지 를 관리해야 할 제국군이 학살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또한 이후 보급망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에 큰 차질을 겪을 터.

더해 여자와 아이가 포함된 노인을 죽이는 건 일선 병사들이다.

그들이 직접 검과 창을 휘둘러 민간인을 죽이게 된다.

정신 건강과 사기에 치명적이다.

지금 당장의 상황을 극복하는데 제일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이나 가 급적이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방법 이다.

'예전에, 게임을 즐겼을 적의 나 였다면 바로 선택했겠지만.'

이미 이 세상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나다.

전장을 전전하는 군인들도, 그들을 부양하고 지원하는 민간인들도.

생명을 가진 인격체들이다.

나는 민간인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다음 방법을 모색해본다.

'수도를 포위하고, 내분이 일어나 스스로 붕괴할 때까지 기다린다.'

두 번째 방법, 수도의 무기한 포 위전.

이 또한 곤란하다.

제국 병사들이 직접 민간인을 학 살하지 않는데다, 스스로 내분이 일어나 적의 전력을 크게 악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연방군 원정대 가 하나둘 항구 쪽에 도착하고 있다 들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지연시킨다면, 제시간 내에 중앙대륙에 도달할 수 없을 터.

그렇기에 궁극적인 목표-중앙대륙 엘프의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 서는 선택할 수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세 번째 방법을 짚어본다.

'수도를 크게 우회해 진군, 북쪽 끝단에 있을 항구 방향을 향해 나 아간다.'

역시나 곤란하다.

당장 우회해서 북쪽 방향으로 가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으나, 그렇게 된다면 이후 있을 보급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후방에 언제든지 이쪽의 보급망을 훼손할 수 있는 연방군 대규모 전력을 놔둔 채, 대륙간 원정을 진행한다?

생각만 해도 지옥이다.

세 번째 방법 또한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금 사령부 내의 전경을 둘러본다.

"제기랄. 그럼 어찌하란 말인가?! 전투도 안 돼, 우회도 안 돼, 포위 도 안 돼. 이대로 전쟁을 포기하고 회군하자는 말인가?!"

"… 그러니 의견을 교환해서 보다 나은 수를 찾아보기 위해 하는 회의 아닌가. 그렇게 성 내지 말고 진정하게."

"차라리 보급망을 포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엘프측에게 보급을 부담하게 한다면…."

"엘프는 그리 물질적이지 않은 종족이라 들었는데 . 그들이 우리 35만을 먹여 살릴 식량과 장비, 물 자를 보유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드는군."

"빌어 처먹을 연방 새끼들! 하필 민간인을 징집해서…."

"다른 방법이 없는건지…."

자리한 군관들의 얼굴 표정에는 하나같이 답답함과 짜증이 올라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적을 갈아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적이 민간인을 방패로 활용하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투사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방법은 이거밖에 없나."

사실, 위의 방법들 말고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면, 마이사의 본래 신원 또한 노출 될 수밖에 없으므로.

아니. 언젠가는 노출되겠지만 그 시기가 너무나도 이르게 때문에.

그렇기에 혹여나, 다른 대안이 있지 않을까 연 것이 이번 회의였 던 것이다.

허나 다른 대안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내가 미리 생각해놨던 방법밖에 없는 상황.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만. 모두 주목. 할 말이 있다."

짜악!

박수를 쳐 주의를 내게 돌렸다.

직후 시선을 집중하는 군관들.

혼잡스럽던 사령부 막사 내 대화 소리가 뚝 멈추고,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한다.

피식.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맹렬히 논쟁하고 있던 그들이, 내 박수소리 한번에 모조리 입을 다물다니 말이다.

나는 잠시 그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이어 말했다.

"정리하자면, 민간인 병력과의 직접 전투 없이, 수도를 함락시키고 연방군을 몰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 로군. 맞나?"

"… 맞습니다. 사령관 각하."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지."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내 목소리에 집중하는 군관들.

그들에게 어떤 사실을 하나 상기 시켰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모든 왕궁이나 황궁 등, 위정자가 기거하는 공간에는 반드시 비밀통로가 있기 마련이지."

이 세계에서는 상식이었다.

마법과 전쟁이 발전한 블랙 오케 스트라의 세계관이다. 세계는 혼란 스럽고, 국가의 수장인 국왕이나 황제 등은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기거하고 국사를 보는 자리에 반드시 비밀통 로를 하나 이상 만들어둔다.

'요한바르첸 공국조차 비밀통로를 가지고 있었으니 . 말다했지.'

과거 내가 천인장 시절일 때 상대했던 요한바르첸 공국. 그곳의 공 궁조차 비밀통로가 있었다.

헤임스 공작처럼 하찮은 국력을 가진 국가의 위정자도 비밀통로를 만들어 둘지언데.

하물며 한때 제국과 맞먹을 정도 로 성세했던 슈베츠 왕국이다.

당연히 비밀통로가 존재할 터.

"그 비밀통로를 통해 병력을 잠 입, 적의 중심부까지 이동해 적진의 수뇌부를 타격 제압한다. 적의 사령관을 처형하고, 민간인 징집군을 해산시킨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상황이 종료되지."

나는 말하고는 다시금 사령부 내 의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십 쌍의 눈동자.

그들의 눈빛을 읽었다.

드러나는 감정은 의아함.

그럴 수밖에 없다.

"한지훈. 그래서, 자네가 그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건가?"

멸망한 슈베츠 왕국 왕성과 이어진 비밀통로.

내가 알고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오스카가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모르지. 나는 슈베츠 왕 가의 인물이 아니니."

"… 허면 자네의 계획은 허황된 소리가 아닌가? 위치도 모르는 비밀통로를 이용해 적을 타격하겠다 니. 한지훈, 이상황에서 그런 소리 를 한다면…."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오스카의 말을 끊었다. 그의 잔소리가 얼마나 이어질지 몰랐으므로.

그리고는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비밀통로의 위치를 알고 있고, 한번 사용해 보기까지 한 인물이 한 명. 이자리에 있지."

그녀를 가리켰다.

"마이 라이젠.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 양녀지."

내 양녀이자, 지금은 하급 참모 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령부 회의에 참석한 인물.

그녀의 정체를 고한다.

"마이 라이젠의 본명은 마이사 슈베츠. 슈베츠 왕국의 제1왕녀이 자 제1왕위 계승자. 이전 연방의 침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슈 베츠 왕가의 마지막 핏줄이다."

사령부 내 모든 인물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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