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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279화 (279/390)

279화.

이후 행군은 순조로웠다.

우리 북부군의 진군을 가로막는 적은 전무했으며, 원정 준비 또한 철저했기에 물자나 식량의 부족함 또한 없었다.

덕분에 나는 마차에서 편히 앉 아, 멍하니 풍경구경이나 할 수 있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평화롭기 짝이 없는 행군에 불만을 가진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

"한지훈. 이상하다. 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리가 없는데 ."

다름 아닌 마이사였다.

비록 하급 참모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수뇌부 마차에 탑승해 있었다. 내 양녀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마이사. 뭐가 불만이냐? 적이 없어서 행군을 편하게 할 수 있으 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그건 맞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껏이어야 좋은 일이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그녀가 지도를 들어 올려 내게 보여준다. 다름 아닌 원정대의 행군 로를 표시해놓은 군사지도였다.

그녀가 우리의 경로 중에 자리해 있는 지형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나 에게 말해온다.

"봐라. 이번 행군로 중간 중간에는 우리가 노려질 수 있는, 우리에 게 불리한 지형지물이 많았다. 대로 를 틀어막는 요새, 적에게 지형적 이익이 있는 언덕과 산맥, 그리고 중간 중간 자리한 중소 도시들까지."

그녀의 말대로, 우리의 행군로에는 연방놈들의 공격이나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구조물이 퍽 많았다.

군사를 배치하고 방어를 굳힌다 면 최소 하루, 길어도 일주일 안에 우리군의 전진을 저지할 법한 곳이 많았던 것이다.

"헌데… 자치령이나 연방의 군대 가 코빼기?보이지 않아. 어째서?"

확실히. 마이사의 말을 듣고 보니 걸리긴 하다.

"그러고 보니 척후조차 없었지."

행군 자체가 너무나도 순조롭기에 간과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수상 한 상황이긴했다.

무려 삼십만이 넘는 수의 무지막 지한 병력이 북상해오고 있는 와중 이다.

헌데 연방놈들은 그 흔한 척후조 차 운용하지 않았다.

병력을 투입해 이쪽의 진군을 저지하려 하지조차 않았다.

군의 기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 연방놈들. 뭔가 노리는 게 있군."

놈들은 그저 제자리에 앉아 패배를 기다릴 정도로 무기력한 이들이 아니다.

놈들은 과연 뭘 노리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정보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지시한다.

"척후의 수를 늘려. 연방놈들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라."

불확실한 정황에 의해 군의 진군을 늦춰서는 안 될 노릇.

대신 나는 척후의 수를 늘려 정보수집 능력을 강화했다.

우리군은 계속해 북상해갔다.

자치령 수도가 가까워져간다.

"각하. 보고 드립니다."

연방군의 참모들 중 하나가 척 경례하며 보고한다.

보고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기플 랫 랜드바론.

그가 마주 경례해 답하고, 그러자 휘하 참모가 경례를 풀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수도와 인근 도시들의 징집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징집이 완료되었다고. 소요사태는 없었나?"

"도주하거나 반항하는 시민들이 꽤 많았습니다만, 기사와 기병대를 운용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

약 일주일 전. 기플랫은 지시했었다.

이곳 연방 자치령의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징집하라고.

연방이나 제국 같은, 시민이 주 권을 가진 국가였다면 절대 불가능한 조치였다.

국가란 결국 시민의 헌신이 없다 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집단이었 으니까.

그 시민을 죄다 전쟁터로 몰아낸 다는 것은 결국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한 짓.

만약 타국에서 무제한 동원령을 시행했다면 쿠데타가 일어나 국가 가 전복되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적으로 쿠테타를 진압 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한들, 그 국가는 경쟁력을 잃고 단기간에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너무나 무모하고도 소모적인 짓 거리.

그렇기에 타국이었다면 결코 시 행하지 않았을 명령.

허나 기플랫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제한 동원령을 시행했다.

"자치령 따위, 하등의 가치도 없다."

연방 자치령, 일부 자원만 공급 하는 군사력 없는 식민지.

이까짓 식민지 하나쯤 없어져도 연방의 국력에는 하등의 하락도 없다.

그리 판단한 기플랫의 무모한 징집 추진의 결과로.

"정확한 규모는 파악이 불가능 합니다만… 대략 시민 백만 정도를 단기간에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대한 수의 인력을 얻을 수 있었다.

백만.

무지막지한 수가 아닐 수 없다.

단순 숫자로만 비교하면 지금 이곳으로 북상해 오고 있는 제국 원정군의 몇 배에 달하는 수.

"자치령 수도와 그 인근 도시들을 모조리 징집해 완성한 숫자입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징집해 만들 수 있던 숫자였다.

짝, 짝, 짝기플랫이 양손바닥을 부딪쳐 박수친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흡족하 다는 표정이 떠올라있다.

"좋아. 아주 좋아. 백만이라, 솔직히 그 정도로 많이 모일 줄은 몰 랐는데 . 시민놈들의 저항이 그리 격렬하지 않았나보군 그래."

"자치령 시민들은 무력통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군대와 기사들을 동원하니 예상보다 반발이 적었습니다."

"식민생활 덕분에 노예근성에 찌 들어있다는 건가. 아주 좋군. 덕분에 훨씬 빨리 머릿수를 채웠어."

이때문에 기플랫은 북상해오는 제국군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병력과 인력을 동원해 수도 와 그 인근지역의 시민들을 끌어모 으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적을 지연시키거나, 심지어 정찰활동을 할 척후조까지는 운용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제 막 징집조치가 완료되 었고, 무려 백만의 고기방패를 얻게 되었으니 .

더 이상 거릴 껏이 없는 상황.

기플랫이 지시한다.

"놈들은 수도를 노릴거다. 수도를 요새화 하고, 고기방패들을 불러들 여라."

그들이 수도에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행군을 시작한 지 일주일하고도 나흘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는 북으로 전진해 마침내 자치령 수도권역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이변을 접하게 된다.

"사령관 각하. 도시에 사람이 없습니다."

"… 그래 보이네."

자치령 수도에서 그리 멀지않은 한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 자치령 수도 근처에 이곳저곳 널려있는, 인구 수 10만짜리 중소형 도시다.

고작 10만짜리 도시였지만 나름 대로 있을 건 있는 장소였다.

조잡하게나마 농기구를 찍어내던 대장간, 상인과 시민들로 북적거렸을 시장과 각종 축제가 벌어졌을 광장까지.

평소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도시.

헌데 이상하게도.

"정말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도시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도. 대장간에도. 심지어 주택가에서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꺼림칙한 상황. 그에 나는 한번 추측해 보았다.

"연방놈들. 설마 또 청야전술을 시행한 건가?"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청야전술을 펼칠 이유도, 펼친 광경도 아니었다.

먼저 이 도시는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는 근교 도시다.

그런데 이곳에서 청야전술을 펼친다 한들, 이미 우리 제국군은 목적지인 수도에 접근할 대로 접근한 상태.

놈들이 다시금 청야전술을 펼칠 것이었으면 진작 했어야 한다.

더해 도시의 상태가 너무나도 멀 쩡했다.

불태워진 곳은 하나도 없고, 건물들 또한 대다수 평상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

분명 청야전술을 펼친 것을 아닐 터.

다음 가설을 세워보았다.

"그렇다면… 퇴거 조치?"

적은 시민들을 미리 퇴거시켜둔 것이 아닐까.

곧 수도 인근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을 것이기에 미리 대피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아니. 기플랫 그놈이 그럴 리 없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의 지휘관은 아마도 기플랫 랜 드바론일 터.

내가 아는 그놈은 전투에 대비해 시민들을 미리 대피시켜놓는다는 기특한 생각 따위 결코 하지 않는다.

놈이라면 전투에 민간인들이 휘 말리든 말든 아무 상관하지 않을 터.

란트베이안에서 우리 제국군과 함께 난민들을 불태워버리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가설을 세워본다.

"퇴거 조치가 아니라면. 징집이라 도 했나?"

역시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징집을 했다 한들, 도시에는 징집 대상인 청 장년을 제외한 여자,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 남아있어야 한다.

가족이 징집되었다고 손쉽게 삶 의 터전을 버리고 갈 수는 없을테 니까.

하지만 도시에는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나는 자리에서 계속 고민하며 도시의 전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때.

"사령관 각하. 도시에서 떠도는 난민 몇 명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내 의문을 풀어줄 만한 인물들을 찾아냈다.

고개 돌려 병사들에게 이끌려온 이들을 바라본다.

저 난민들에게 묻는다면 정확한 사정을 들을 수 있을 터.

저벅, 저벅.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난민들의 앞에 섰다.

그러자 고개를 움츠리는 그들.

아무래도 내 제복을 보았을 터이 니, 고위직인 걸 한눈에 알아보고는 절로 위축된 것 같다.

그들이 위축되어 고개를 웅크리 든 말든, 나는 자리에서 물었다.

"아무나 대답해라. 이 도시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여기 살고 있던 사람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난민들이 하나둘 입을 오물거린다.

무언가 대답하고자 하는데, 겁먹 어서 말을 꺼내기 힘든 듯한 모습.

나는 재촉했다.

"어서 말해라. 이쪽은 시간이 많 지 않아. 헤치지 않을테니 안심하고 솔직하게 말하거라."

"… 그, 모두 끌려갔습니다."

"끌려갔다니?"

"병사들이 와서, 도시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갔습니다. 듣기로는 전쟁터에서 함께 싸울거라고…."

즉, 징집이라는 소리다.

헌데 이상하다.

나는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면 노인이랑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은? 어디 갔지? 징집대상과 함께 사라질 이유가…."

"아닙니다. 모두 함께 끌려갔습니다."

"뭐?"

순간 이해가 안가는 소리에, 내 눈가가 찌푸려졌다.

직후. 난민이 말하던 와중 설움 이 복받친 것일까.

그가 목청을 드높이며 이어 말했다.

"모조리 함께 끌고 갔습니다! 노인도, 어린애도! 여자도! 모두 전쟁 터로 내보낸다고 말입니다!"

"미쳤군."

드디어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쯧, 혀를 차며 읊조린다.

"기플랫. 이 정도로 또라이일 줄은 몰랐는데 ."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기플 랫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징집해 전쟁터에 내보낼 생각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곳을 제외하고도, 수도와 근방 도시들의 거의 모든 인력을 차출했을 터.

열세인 전력을, 한계까지 뽑아낸 병력으로 어떻게는 메꿔보려는 것 이다.

나는 눈을 감고 고민한다.

'그렇다면 수도에서 민간인들이 징집병으로 등장한단 것인가.'

징집병이라 한들, 별다른 무장이나 장비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아마도 농기구 따위를 들고 전장에 끌려나오겠지.

허면 어떻게 할까.

'솔직히 말해, 이기는 건 문제 없다.'

전쟁에서 머릿수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머릿수가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많은 수의 병력이라도, 잘 통제되고 훈련되지 않았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놈들이 설혹 수십, 아니 백만이 넘는 수를 동원한다 한들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투를 택하 기에는 꺼려졌다.

'민간인을 죽여야 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민간인인 징 집병들까지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 으니까.

그냥 민간인 징집병이 아니다.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애들까 지.

힘이 없어 무력한 이들까지 전장에서 죽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

윤리적인 고민을 안 할 수 없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자치령의 민간인들을 모조리 죽 이고 승리를 쟁취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볼까.

나는 고민하며 난민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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