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란트베이안 전투가 끝난 다음날. 동틀 무렵.
우리군은 진군을 개시했다.
부우우우우- - .
울리는 뿔나팔 소리.
군악대가 연주하고, 병사들이 행 군한다. 그들이 드높이 치켜든 여러 군단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나는 마차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 며 중얼거렸다.
"큰 사건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별다른 피해 없이 넘어갔네."
내 말대로, 우리 원정군은 하마 터면 이곳 란트베이안에서 돈좌될 뻔했다.
하지만 나와 여러 군웅들이 활약 하고, 휘하 병력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준 덕에 적의 마법사를 소탕했다.
퀘스트를 완수했다.
그리고 결국.
"내 정보."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북부 야전군 사령관]
[스킬 : 군단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상급)]
[스킬 : 기마술(상급)]
[스킬 : 투창(입문)]
[스킬 : 은신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50]
[민첩 167]
[내구 77]
[체력 64]
[마나 134]
(남은 포인트는 325pt 입니다.)
325포인트를 가지게 되었다.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까."
사실, 휴식기를 거치던 근 몇 년 간 고민했던 문제였다.
협상동맹과의 전쟁이 끝난 뒤, 별다른 전투나 전쟁이 없는 탓에 기존에 보유했던 것 이상의 포인트 를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섣불리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고 온전히 아껴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금 전쟁이 일어났다.
연방은 중앙대륙을 침공했고, 우리 제국군은 혈맹인 엘프를 지키기 위해 중앙대륙으로 파병 가는 상황.
많은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수 많은 퀘스트가 부여될 것이다.
즉 대량의 포인트를 얻어,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고민해본다.
"능력치. 아니면 스킬. 아니면 둘다."
포인트로 어떤 능력치를 높이고, 어떤 스킬을 상향시킬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포인트 의사용이 주저되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지금 내 능력치에서 부족한 건 없다.'
부족함이 느껴지는 능력치가 별 달리 없었기에.
인간들 중 무력으로 날 상대할 인물이 없고, 엘프들 또한 엘븐가디 언급의 강자가 아니라면 나를 대적 할 수조차 없다.
이전의 나는 그때그때, 부족함이 느껴지는 능력치를 가장 먼저 상향 시키고는했다.
헌데 오히려 가진 능력과 스킬이 풍족해지자 선택에 곤란함을 느끼 고 있는 것이다.
피식 웃었다.
'배가 부른 고민이구나. 한지훈.'
문득 이 세상에 처음 끌려들어왔을 적을 떠올려본다.
별다른 스킬도 없고, 가진 능력치는 밑바닥을 기었을 시절.
그때의 나는 아주 소량의 능력치 를 십분 활용해 수많은 역경과 고 난을 돌파했다.
하지만 나는 강해졌고 이제 여유 를 가지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것이 쉬워 졌으니까.'
강력한 권력, 강성한 세력, 드높은 무력! 더해 풍족한 재화와 아 군과의 굳건한 유대. 그리고 모아놓 은 대량의 포인트까지.
여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심하면 안 돼. 이 게임 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확신할 수 있다.
이 개 같은 게임, 개 같은 시나리오 관리자가 내가 이토록 쉽게 시나리오를 진행하게 할 리 없다.
분명 무언가 새로운 역경이 찾아 올 것이다.
과연 그 역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돌파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지만 알 길이 없다.
'…일단 포인트는 아껴두자.'
그저 미래에 있을 시련을 돌파하 기 위해, 지금 당장은 포인트를 비 축해놓고 있을 뿐.
그렇게 내가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 한지훈, 들리는가.
품속에 있던 통신수정구를 통해 어떤 인물의 음성이 들려온다.
제피 르였다.
나는 수정구를 들어 올려 답했다.
"들린다, 제피르. 무슨일이지?"
- 긴히 할 말이 있다만.
나는 이어진 제피르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 심상치 않은 직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목소리.
언뜻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나는 그의 감정에 따른 음색의 미묘한 차이마 저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 제피르는 당황하고 있는 상태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광인 그가 당황할만한 이야기라니.
과연 그게 무슨 일일까.
나는 기다리고, 그가 잠깐의 침묵 끝에 이어 말했다.
- 어제 불의 장막 마법. 그 술식 이 왠지 눈에 익어서 말이다. 방금 전 데필루나 놈들의 시체를 확인해 봤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전투 당시 불의 장벽 마법을 보고는 눈에 익은 마법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 데필루나 전투마법단의 단장, 다니안. 다니안은… 나랑 같은 스승을 섬기던 놈이다.
* * *
- …제피르, 자네와 같은 스승을 섬겼었다고?
"그래."
통신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 온다. 한지훈의 목소리였다.
제피르는 나직이 대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볼품없는 모양새로 널브러져 있는 한 구의 시체가 보였다.
죽은 지하루가 넘어 보랏빛으로 물든 얼굴.
목에 뚫린 큰 구멍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목구비.
다니안의 시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제피르가 이어 말했다.
"이놈 또한 나처럼 엘프 대마법사의 가르침을 받았지…. 여기 있어 서는 안 되는 놈인데. 아니, 있는 것이 불가능한 놈인데."
- …잠깐. 제피르. 이해하기 힘든 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제피르의 두서없는 설명에 한지훈이 다시 질문했다.
보아하니 지금 제피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혹은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모습.
한지훈의 말에 제피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조리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시체의 얼굴을 확인한 뒤부터 경 황이 없던 탓일까. 자신의 설명이 미흡했단 걸 깨달은 제피르가 목을 가다듬고는 이어 말했다.
"다니안은 나와 같은 스승을 섬 기던 놈이었다. 녀석 또한 가진 재능을 인정받아 엘프 대마법사 아래에서 마법을 수양했었지."
제피르는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 린다.
그가 아직 지금처럼 강대한 마법사가 되기 이전.
제피르는 다니안과 함께 엘프에 게 재능을 인정받아 제자로 들여졌다.
엘프 대마법사의 아래에서 마법을 전수 받고 마나를 익히며 실력을 키워나갔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련을, 실전을 경험했었다. 고위 마물의 퇴치와 소규모 흑마법사들의 토벌. 당시 나와 다니안이 맡았던 시련이었지."
제피르는 엘프 대마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후 시련을 경험해 야 한다는 미명 하에 실전을 치르 게 되었다.
그와 다니안은 함께 힘을 합쳐 마물을 토벌했다.
자잘하게 흩어져있던 소규모의 흑마법사 거점들을 급습하고, 섬멸했다.
그리고 그 와중.
"다니안은 죽었었다."
제피르가 다시금 시선을 내리깔 아 시체를 바라봤다.
확실했다. 그는 다니안이었다.
비록 그가 알고 있던 중년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완연한 노인 의 모습으로 자리해있었지만.
분명 그는 다니안이었다.
"녀석은 분명 죽었다. 흑마법사의 마탄에 목이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단 말이다."
헌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 가.
제피르는 다니안의 시체를 노려 본다.
* * *
"…다니안이 이미 죽었던 인물이 라고?"
나는 제피르의 통신을 받고는,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사자소생.'
이미 여러 번이나 봐왔던 종류의 이능이었다.
한스 요한바르첸.
내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난 이.
놈은 이미 여러 번이나 내게 죽 었다가 되살아났었다.
나를 가로막을 때마다 녀석은 목숨을 잃었고, 그때마다 흑마법사 크 라함이 놈을 되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알던 사자소생이랑은 다른데.'
생각해보면 다니안이라는 인물의 겉모습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피부는 완전한 사람의 그것처럼 멀쩡했고, 눈빛 또한 생기있었다. 더해 전신에서는 흑마법의 흔적 따 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 마주했던 나조차 사자소생 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 했을 만큼, 너무나도 생기 어린 모습이었다.
반면 내가 만나봤던 사자소생으로 되살아났던 이, 한스 요한바르첸 은 그렇지 않았다.
놈의 피부는 퍼석퍼석했고, 눈가는 귀기 어린 붉은색 안광으로 번 들거렸다. 전신에서는 질척한 혹마 나의 기운이 일렁였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흑마법의 힘 으로 억지로 목숨과 영혼을 붙여놓 고 있던 모습.
다니안과 전혀 다르다.
만약 제피르의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니안이 이미 죽은 사람이란 걸 추호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잠시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 려본다.
'설마. 흑마법사들의 사자소생 마법이 더욱 진보한 것인가.'
그리하여 .
과거 한스 때처럼 죽은 자를 불 완전하게 살려내는 것이 아닌, 이제는 완전하게 살아 숨 쉬는 몸뚱이 로 살려낼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르다.'
아직 흑마법사 놈들의 사자소생마법이 저토록 완벽하진 않을거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 한켠에서는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일렁이고 있다.
'만약 흑마법사 놈들이, 완벽한 사자 소생 마법을 완성했다면.'
생각해보면 크라함과 놈이 이끄는 볼라바아 학파의 능력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 세계검을 이쪽보다도 훨씬 빠르게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스를 되살리는 등 여러 경악할 이능을 발현하기도했다.
그만큼 유능한 집단이 바로 크라 함과 볼라바아 학파다.
더해 놈들은 지금쯤 동부대륙의 '유물'을 확보하고, 몇 년에 달하는 기나긴 휴식기 동안 가진 힘을 축 적했을 터.
그동안 유물의 힘과 세계검의 이 능을 빌려, 사자소생 마법을 발전시켰다고 한다면?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유물.
과거 환상종의 핵.
일개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어마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
세계검.
이 세계의 모든 법칙과 제약을 절삭해 개변시키는 아티팩트.
지성체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 볼라바아 놈들은 세계검과 유물, 두 가지 모두를 손에 넣었을 터.
그 두 가지의 요소가 충족되었으니 놈들은 지금 흑마법의 수준을 극도로 발전시켜둔 것이 아닐까?
쯧, 혀를 차며 생각해본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데 ."
만약 크라함과 볼라바아가, 과거 내가 상대하던 것보다도 훨씬 발전해 있다면.
어쩌면 당하는 것은 놈들이 아닌 내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 고민해보고 는, 나직이 읊조렸다.
"모아놓은 포인트. 어쩌면 예상보 다도 훨씬 빨리 사용하게 될 수도 있겠어."
무언가 꺼림칙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