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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270화 (270/390)

270화.

포트 알파란이 함락되었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제국 병사들이 행진한다. 그들이 크게 고함쳤다.

"이 요새는 우리 제국군에게 점 령되었다!"

"남아있는 자치령군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순순히 투항한다면 죽이지 않겠다!"

"당장 무기 버려!"

그리고 비척비척 힘없이 걸어나 오는 연방 자치령의 군인들. 그들이 투항의 뜻으로 무기를 바닥에 내던 졌다.

챙그랑! 철그럭!

창칼 따위가 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소리.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그 경관을 주시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깔끔하네."

말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투였다.

아군의 손실은 경미. 전투마법사를 운용하지 않은 덕분에 자원의 소모는 적었고, 요새 또한 그리 큰 파손 없이 접수했다.

모두 한 명의 지휘관 덕분이었다.

"잘했다. 마이사."

나는 그리 말하며 바로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인물, 마이사를 바라 봤다.

헌데 어째서일까.

마이사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듯한 얼굴표정.

마치 넋이 나간 것 같다.

그녀는 이번 전투의 주역이었다.

때문에 이번 전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지금, 일반적인 군관이라 면 당당하거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였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저토록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는 것인가.

물론 그이유.

나는 알고 있다.

"마이사. 지금 너는 지도와 현장 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은데."

"…괴리감."

내 말에 반응해 이쪽으로 눈동자 를 마주쳐오는 마이사.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한지훈. 전쟁이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좀 더."

"좀 더?"

"좀 더 어지럽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전쟁이란 도상연습처럼 그리 깔끔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 지."

사관생도 시절의 그녀에게 지휘 란 지도 위 모형을 움직여 지략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그저 점수 를 잃고 성적이 하락할 뿐. 그 외 의 다른 불이익은 없었다.

허나 지금, 실전은 달랐다.

"마이사. 이 광경을 똑똑히 봐라. 제대로 머릿속에 각인시켜라."

나는 천천히 손짓해 주변의 경관을 가리켰다.

"전쟁은 지도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장소, 전장에서 행해지지."

내 손짓을 따라 마이사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자 하나둘 드러나는 전투 직후 전장의 풍경.

많은 것들이 보이고 느껴진다.

불타오르는 가옥. 바닥 이곳저곳에 꽂혀있는 화살. 지면에 아무렇지 도 않게 굴러다니는 병사들의 시체. 비릿하게 고여 있는 혈향.

철퍽, 철퍽.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울리는, 피에 절은 진흙이 밟혀 뭉개지는 소리까지.

걸어가며 마이사에게 말한다.

"네 지휘 한번에 수십, 수백의 병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도 있고."

고개를 돌려 행군하고 있는 제국군을 바라본다. 그들은 창칼을 꺼내 들고, 투항한 연방 자치령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밝을 수밖에 없다. 힘들 것이라 예상되었던 공성전을, 이토록 빠르 게, 그리 큰 소모 없이 해냈으니까.

승전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반면 네 실수 한번에 수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다시금 시선을 옮겨, 또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이번에 주시하는 것은 제국군이 아닌, 연방 자치령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몰골은 그리 양호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묻어있는 흙먼지와 핏자국. 피로와 절망에 절어있는 얼굴 표정. 부상과 탈진으로 절뚝거리며 걷는 이들까지.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이다.

만약 마이사가 졸장이었다면, 그리하여 제국군이 패배하거나 혹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저 패잔병의 모습을 한 건 자치령군이 아닌 제국군이었을 터다.

나는 피식 웃었다.

"뭐. 너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겠 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즐기던 내가 실제 이 세상으로 끌려들어와 방황했듯이.

그녀 또한 지도와 전장의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마이사. 하여튼 수고했다. 이제 마지막 일처리만 마치고 쉬어 라."

"마지막 일처리라니, 그게 무엇인가? 한지훈."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다는 듯이 묻는다.

그에 나는 허리춤의 장검을 매만 지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곧 알게 될거니까."

나와 마이사는 천천히 걸어, 주위의 병사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 며. 요새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요새는 함락되었다! 자치령 병사들은 투항하라!"

"무기를 버려라! 저항한다면 처 형하겠다!"

"순순히 항복해!"

선두의 병사와 기사들이 외치고, 투항하는 자치령 병사들을 포박했 으며, 도주하는 적병들을 추격 섬멸했다.

전장이 점차 정리되어간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나는 오른손을 들어올려, 어딘가 를 가리켰다.

"저기가 요새의 내성이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 의 성이 하나 보인다.

이곳 알파란 요새 중앙에 자리해 있는 내성. 저곳에 적 지휘관이 있다.

성은 반쯤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 안쪽에서 고함소리와 쇳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지금 저기 내성 안쪽에 기사들 이 투입되어 소탕을 진행 중이지."

계속해 발걸음을 옮겨 나아간다.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내성의 바로 코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내성의 정문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직후.

스르르릉.

장검을 뽑아들었다.

시선을 돌려 마이사를 바라본다.

"마이사."

"왜 그러나? 한지훈."

"사람 죽여본 적 없지?"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장검을 쥐 어준다. 내 아티팩트 장검, 가르강 이었다.

"… 한지훈. 설마."

불길한 상상을 한것일까.

순간 찌푸려지는 그녀의 눈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 검을 쥔 그녀의 손아귀.

나는 대답했다.

"아마 그 '설마'가 맞을거다."

지휘관의 덕목은 여러 가지가 있다.

휘하의 인물을들 사로잡는 카리스마. 적을 굴복시키는 위압감. 전 략과 전술에서 승리하는 군략. 전장을 지배하는 개인의 무력까지.

마이사는 이중에서 카리스마와 군략에 커다란 재능을 지니고 있다.

현장에서 싸우기 보다는, 배후에서 병력을 통솔하는 역할이 알맞은 재능.

그렇기에 그녀는 일선 장교가 아닌 지휘부의 참모가 되었고 덕분에 창칼을 꼬나쥐고 직접 전투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정말로 운이 좋다면.

평생동안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

허나 그래서는 안된다.

"마이사. 적을 죽여봐야 해."

군인이란 외적에게서 조국을 수 호하고, 치안을 확립하며, 국민의 안전을 도모한다.

적과 싸워서 말이다.

"지휘관이라는 인물이 손에 피 묻히는 걸 두려워해서는 업신여겨 질 뿐이야."

지휘관이 검을 쥐고, 적을 죽이는 걸 두려워 한다면 깔보일 뿐이다.

하물며 여성인 마이사다. 다른 지휘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터다.

그렇기에 보여줘야했다.

"마이사. 너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이자리에서 증명해야 해."

그녀는 살인을 두려워하지 않다 고. 적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주저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마이사에게 알린다.

"이제 곧 적 지휘관이 생포되어 나올거다. 놈을 네 손으로 직접 처 형해라. 참모관, 마이사 라이젠."

내가 말을 끝맺은 직후.

콰앙! 철그럭, 철컥!

내성의 문짝이 떨어져 나오며 일단의 기사들이 튀어나온다. 역시나 제국군 기사들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한발 앞서 내성의 제압을 진행하던 이들.

그들은 어떤 인물 하나를 끌고나 왔다.

"한지훈 사령관 각하! 알파란 요새장을 생포했습니다!"

생포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요새 장이었다.

이곳 알파란 요새의 모든 것을 감독하는 최고 지휘관.

시선을 내려, 포박되어 끌려온 적 지휘관을 바라본다.

"제기랄! 염병할, 제국 새끼들!"

끌려나온 인물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연방출신 지휘관인 것일까.

놈이 말하는 억양은 자치령의 것 이 아닌 동부대륙의 억양이었다.

병사들이 놈을 강제로 무릎 꿇리고, 녀석은 발악하듯 외쳤다.

"무모한 놈들! 나는 자치령의 요새장이자, 연방의 군단장이다! 너희 제국놈들이 우리 연방을 건드리고는 멀쩡할 것 같나!"

"저새끼 좀 닥치게 해."

"알겠습니다!"

내가 지시하고, 기사들이 충실히 따른다.

퍼억!

철제 건틀릿이 끼워져있는 기사 의 오른주먹. 놈의 옆구리에 틀어박 혔다.

"커헉…!"

커다란 고통. 그에 요새장놈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폐부의 숨을 토해냈다.

나는 마이사에게 지시했다.

"처형해. 마이사."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을거다. 그때마다 회피할 수는 없지 않나."

지휘관은 오직 전투 때만 검을 뽑아들지 않는다.

적의 지휘관을 처형해 아군의 사기를 드높일 때.

도주한 아군 병사나 장교를 처형 해군의 기강을 다잡을 때.

본보기로 처형해야 원하는 효과 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그녀는 경험해야 한다.

"적을 죽여봐야 해."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말이다.

"… 후우."

내 말뜻을 이해한 것인지.

그녀의 손 떨림이 드디어 멈췄다.

철그럭.

마이사가 양손으로 장검을 꼭 쥐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날카로운 장검의 검날이 드높이 올라서 태양 빛을 반사한다.

"마이사. 양 다리 간격을 더 벌리고, 허리를 세워라. 어깨를 긴장 시키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손잡이 를 꽉 붙잡아."

나는 그녀의 자세를 교정했다.

보다 수월하게 적장을 처형할 수 있도록.

그렇게 내가 마이사의 자세를 봐 주고 있을 때.

"나, 나를 처형할 셈인가!"

마침내 호흡을 회복한 적 지휘관 이 경악한 얼굴로 크게 외친다.

설마, 명색이 요새의 최고 지휘관인데 바로 현장에서 처형해버릴 줄은 몰랐겠지.

보통은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살 려두거나, 혹은 포로 교환을 해 나름의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 하니까.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고작 요새장 따위가 고급정보를 알아봐야 얼마나 알까.

빠르게 죽여 제국의 뜻을 확고히 하는 게 더욱 유용하다.

나는 계속해 조언했다.

"시선은 검을 휘두를 공간으로. 하체의 반발력과 허리의 탄력, 그리고 양 팔의 원심력을 동시에 끌어 내라. 그러면 여자인 너도 단칼에 목을 떨어뜨릴 수 있을거다."

"이게 무슨…!"

"좋아. 내려쳐."

마이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껏 검을 내려쳤다.

퍼억!

적 지휘관의 목이 떨어진다.

"방금 전 들어온 급보입니다."

연방 자치령의 총독성. 본래는 슈베츠 왕국의 왕성이었으나, 지금은 총독과 그 휘하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

그곳의 회의실에는 참모와 군관 들이 들어차 있었다.

군관이 이어 보고했다.

"제국군이 국경을 넘어, 포트 알 파란을 함락시켰습니다. 추산규모 약 35만. 적의 원정군입니다."

증원군이 마침내 연방 자치령에 등장했다.

제국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적이 나타났다.

자치령의 최남단 요새 포트 알파 란. 그곳에 무려 30만이 넘는 수의 적들이 등장했고 반나절만에 요새를 함락시켜 버린 것이다.

"저희 참모진들이 입안한 전투계 획서입니다. 검토해주십시오. 기플 랫 증원군 사령관 각하."

참모가 양손으로 어떤 서류뭉치 를 집어 들고는, 회의실의 가장 상석에 있는 인물에게 건냈다.

눈가에 기다란 전상자국이 남아 있는, 안대를 끼고 있는 붉은 머리 의사내에게 말이다.

기플랫 랜드바론. 연방 증원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현재 연방 자치령내 모든 우호병력을 통솔하고 있는 인물.

그가 서류를 받아들며 읊조린다.

"제국놈들이 드디어 자치령 땅을 밟았다."

팔랑. 넘어가는 서류.

기플랫은 서류를 살펴보며 나직 이 말을 이었다.

"35만. 예상된 원정군 병력 규모다. 반면 이곳 연방 자치령의 총 병력은 고작해야 10만. 아니, 알파 란이 함락되었으니 이제 8만밖에 없군."

"평범한 전략으론 제국놈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지."

기플랫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방 자치령에 주둔중인 병력은 이제 8만에 불과했다.

8만. 결코 적은 수의 병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군의 수는 무려 35만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고위 병종 의 수는 더더욱 열세인 상황.

제국군을 막는 것은커녕, 그들에게 제대로 된 손실을 입히는 것조 차 난해할 정도의 병력 격차.

기플랫이 피식 읏는다.

"허나 참모장. 자네의 참모진들이 입안한 이전투계획서, 너무나도 평범하군."

기플랫은 오른손으로 서류뭉치를 집어들고는 마치 보란 듯이 머리위 로 드높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직후.

화르르르륵!

그가 오러를 발현했다.

오러의 열기에 불타오르는 서류 뭉치.

연방군 참모진들이 노력을 아끼 지 않고 설계했던 전투계획서가 단숨에 타들어간다.

팔랑. 후드드득.

종이가 청염에 타들어가고, 타다만 종이쪼가리와 재들이 펄럭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직후 자리를 메꾸는 정적.

참모장을 비롯한 여러 군관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기플랫을, 그리고 기플랫이 불태워버린 자신의 전투 계획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세심하게 준비했던 전투 계획서가 단숨에 잿더미로 화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

허나 이자리에 있는 그 누구조 차도 감히 기플랫의 안전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이자리에 있는 모든 군관과 참 모들은 알고 있었다.

기플랫이란 인물이 얼마나 흉폭 하고 잔인한 인물인지를.

그가 말을 잇는다.

"이딴 무난해 빠진 전략으로는 제국놈들이 코웃음밖에 안 칠 거다. 그러니 요새도 반나절만에 빼앗겼 겠지."

"각하. 그렇다면 어떤…."

"내 특기. 그대들도 잘 알지 않 나?"

기플랫의 말에 자리해있던 군관 과 참모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특기. 이자리에서 모르는 인물이 없기 때문에.

기플랫이 질척한 미소를 짓는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모든 희생과 전력손실을 감수할거다."

그는 연방군 전체에서 가장 저돌 적이며 잔혹한 군관.

승리를, 그리고 적의 손실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대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소한 대가란. 휘하 병력뿐만이 아닌 민간 시민들의 목숨까지도 포함되어있다.

그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이어 말했다.

"잘 보고 배워라. 제국놈들의 치 를 떨리게 만들어줄 터이니."

마침내 기플랫이 연방 자치령 전 역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자치령군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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