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연방 전쟁국의 최고 지휘부.
다수의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있는 공간.
"모두 주목하라. 방금 전 외무국에서 들어온 보고다."
그곳에 러셀 통령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 깔렸다.
연방의 수장 러셀 베티스 사인펠드. 그의 청색 눈동자가 회의실에 자리해 있는 좌중들을 훑는다.
잠시 휘하 장성들을 살펴보던 그 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제국놈들이 우리 연방에게 선전 포고했다."
그의 말이 끝맺어진 직후, 회의 실 안 장성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제국의 참전은 이미 예상했던 일입니다, 각하."
"엘프가 무너진 뒤에는 자신들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 니."
"전쟁자금이 부족하다 한들 어떻게든 쥐어짜내 군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예상해왔던 상황이기에 그들은 경악하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통령의 말이 이어진다.
"제국놈들은 먼저 남부대륙에 있는 우리의 식민지, 연방 자치령을 노릴 거다."
그가 지휘봉을 들어 올려, 회의 실정면에 자리해 있는 지도를 짚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남부대륙의 최 북단, 해안가와 맞닿아있는 국가.
과거 연방이 정복했던 지역.
연방 자치령.
과거의 이름은 슈베츠 왕국.
통령이 나직이 읊조린다.
"지킬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넘겨주는 것도 마음에 안드 는군."
연방 자치령은 남부대륙에 있다.
그리고 연방 본토는 동부대륙.
제국의 침공에 자치령을 지켜내는 것은 힘들 터다.
비록 가진 국력은 연방이 압도하 나, 머나먼 자치령까지 대량의 물자 와 병력을 수송하기에는 시간이 없었으니 .
통령이 지시했다.
"대규모 초장거리 마법을 운용, 기사와 전투마법사들을 중원군으로 보내라."
기사와 마법사 등 고위병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지원군을 보내라 고 말이다.
그가 피식 웃으며 이어 말했다.
"자치령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 그저, 제국 원정군 놈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기만 하면 족하니."
사실 통령은 자치령을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남부대륙에 진출한 연방의 세력 이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뿐 별 다른 전략적, 경제적 가치는 없는 땅이다.
그렇기에 통령은 중부대륙 침공 계획에 차질을 빚으면서까지 자치령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통령이 한 인물을 호출했다.
"기플랫 사령관. 자네가 자치령군 과 우리 연방군을 지휘하도록."
통령의 부름에 한 장성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명령을 받듭니다, 통령 각하."
붉은색 머리칼을 가진 애꾸눈 사 내였다.
날렵한 몸에, 얼굴에 길게 새겨 진 상처. 관리를 안 해 덥수룩한 수염까지.
만약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연방 군 고위 장성의 정복이 아니었다면, 길거리 뒷골목 건달 정도로 여겨졌을 외양.
하지만 그는 일개 건달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
"기플랫. 자네의 특기는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공작이었지."
기플랫 랜드바론.
연방의 장성들 중에서도 유독 잔 인한 성격을 가진 인물.
그는 아군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까지, 그저 단 한 명의 적이라도 더 많이 죽이는 것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통령은 기플랫을 연방 자치령으로 보내고자 한다.
"자치령 시민이 몇이나 죽던, 그곳의 영토가 얼마나 황폐화되던 상관없다."
연방 자치령 따위 연방에게 그리 중요한 식민지가 아니기에. 얼마 든지 버리고 희생할 수 있는 영토 이기에.
"제국놈들을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이 죽여버려라. 그 어떠한 손해도 용인해주마."
가능한 많은 적을 죽여버리라고.
그러자 기플랫의 입가에 질척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저를 위한 전장이군요."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
분명 전쟁광의 그것이었다.
"각하의 명령대로 제국놈들에게 지옥을 선사하겠습니다."
기플랫 랜드바론이 이끄는 증원 병력이 연방 자치령으로 파견된다.
드높은 성벽 위에 올라, 저 멀리 북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장관이군 그래."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수히 많은 수의 병사들이 행군 하고 있다.
깃발을 드높이 치켜든 기수들. 그들을 따르는 일반 보병대. 그들을 선도하는 기병과 기사들. 뒤따르는 짐마차의 행렬들까지.
장관이다.
장관일 수밖에 없다. 무려 삼십 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흙먼지 를 일으키며 북상하고 있는 모습이 었으니 .
그렇게 얼마나 행군 모습을 주시 하고 있었을까.
"여기 있었네요. 한지훈 씨."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내게 말을 걸어온 인물을 바라봤다.
역시나 내 측근 중 한 명인 인물.
"바네사."
마녀 바네사였다.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드디어 흑마법사와의 전쟁이 목 전이네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바네사. 흑마법사 크라함에, 그리고 그가 이끄는 흑마법 학파 볼라 바아에 막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약간 상 기 되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흑마법사와의 전쟁. 그리고 복 수 '
두 가지 모두 그녀가 오랜 시간 꿈꿔왔던 것들이었으니 , 그녀로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군의 행렬을 지켜보던 바 네사가 문득 말했다.
"맞다, 제가 한지훈 씨를 찾아온 건… 이걸 드리기 위해서에요. 전장에 가지고 가세요. 한지훈 씨."자신의 품속을 더듬더니 이내 어떤 물건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주먹만 한 청색 수정구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내부에서 일 렁이고 있는.
"이게 바로 정제된 '유물'. 그러니까 안정화 된 리바이어던의 핵이 에요."
나는 그녀가 내민 수정구를 받아 들고는 살펴보았다.
손에 쥐는 순간 저릿한 감각, 비 유하자면 영혼이 흔들리는듯한 강 렬한 감각이 온몸을 휘저었다.
수정구 표면에는 기기괴괴한 마나회로가 빽빽하게 얽혀있고, 내부에서는 제대로 억제된 패도적인 기운이 맥동하고 있었으니 .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한지훈 씨. 당신과 엘프의 요청 대로 유물을 안정화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어요. 하지만…."
잠시 말꼬리를 늘이며 뜸을 들이는 바네사.
그녀가 주저하듯 이어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유물을 운용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어 요. 내부에 담긴 기운이 저로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격이고, 방 대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유물을 그리 쉽게 연구하고 다 룰 수는 없지.'
'유물'이란, 머나먼 과거 대지를 활보했던 최고위 환상종들의 핵.
일개 인간이나 지성체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 응축되어 있다.
아무리 천재 바네사라 한들 고작 몇 년 만에 유물을 완전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안정화는 성공시켰어요."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천재였고. 그렇기에 유물을 제대로 활용할 수는 없을지언정 안정화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이제 유물은 안전해요. 제멋대로 폭주하거나, 혹은 그 강대한 힘을 사방으로 투사해 주변을 위험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가. 그런데 바네사."
"네."
"이걸 어째서 내게 주는거지? 아직 세계검으로 만들 수도 없는데 ."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다.
안정화 되었다고 한들 아직은 그 힘을 이끌어 낼 수 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지니고 있어봤자 특별한 효과도, 혹은 전투에 써먹을 수도 있을 만 한 물건이 아니었으니 .
헌데 바네사는 어째서 이것을 내 게 건네주며, 전투 중 항상 지니고 있으라 청했던 것일까.
그러자 그녀가 대답한다.
"어떤 직감이 들었거든요."
"직감이라니. 어떤?"
"한지훈 씨가 이유물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직감이요."
"… 이해할 수가 없구만."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이유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 가지고 가봤자 자 칫 흑마법사에게 탈취당 할 위험만 있을 뿐. 안전한 루벤에 놔두고 계속해 연구하는 것이 더욱 합당한 일일 터.
허나 그녀는 내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고 있다.
예의 그 직감 때문에.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때문에 나는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려했다.
하지만 그때.
"한지훈 씨. 유물을 가져가세요."
바네사가 재차 강조했다.
"이 직감. 심상치 않아요. 흑마법사와 전투할 때 언젠가 이유물이 필요할 거예요."
바네사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꼭 가져가세요."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녀의 이어진 강요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물을 품속에 갈무 리했다.
현재 유물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 다름 아닌 바네사다.
그녀의 강요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 여겼기에 나는 그녀의 청을 따라 유물을 가져가려는 것이다.
그러자 바네사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지훈 씨. 몸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시고요."
"오냐."
이번 전쟁에서 유물이 어떤 역할을 해줄지 아직 잘 모르겠다.
허나 유물을 품속에 넣으니 .
나 또한 내심 기대가 되었다.
'유물의 힘.'
이번 전쟁에서 제대로 확인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시선을 돌려 다시금 지평선을 바라본다. 여전히 대량의 군세가 북으로 전진하고 있다.
군의 행군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전쟁인가."
이번 전쟁에서 많은 것을 확인하고,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훈련시켰던 북부군의 정 예도. 마침내 실전을 경험하게 된 마이사의 성장. 유물이 품고있는 힘. 마이사의 비원이었던 슈베츠 왕국의 해방. 그리고 비로소 드러난 흑마법사의 전력까지.
나는 수정구를 들어 올리고는 지시했다.
"각 장성들. 행군 현황 보고하라."
원정군이 북상한다.
중앙대륙 원정에 앞서 이루어질 전초전, 연방 자치령과의 전쟁이 곧 이다.
제국군이 전진한다.
기수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기병대와 기사들이 흙 먼지를 일으키며 선도정찰하고, 마법사들이 마차에 탑승한 채 뒤따른다. 대량의 짐마차들이 닦아놓은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삼십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행군과 야영을 반복하며 북상해갔다. 길을 개척하고 중간기지를 건설했다. 비콘을 설치해 통신망을 확장해갔다. 병력을 북으로, 북으로 전진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 행군했 을까.
제국 북부야전군의 하급 참모 마 이사 슈베츠.
그녀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여기서부터 슈베츠 왕국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전진해가고 있던 대량의 군세. 제국군 병사들이 치켜든 무수 히 많은 깃발과, 그들이 일으킨 흙 먼지구름 너머.
흐릿하게 보인다.
"국경요새 포트 알파란."
머나먼 과거.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모습과 똑같았다.
드높게 솟아있는 성벽. 남쪽으로 커다랗게 나 있는 성문. 유지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지 이곳저곳에 균열이 있고, 성벽 위에는 노후 화된 발리스타들이 설치되어 있다.
크고 웅장한 제국의 요새들에 비 해 볼품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마이사는 그 허술한 외양 에도 불구하고. 가슴속 깊숙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그녀의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감 회.
어릴 적, 왕국이 연방에게 침략 당해 멸망 당한 뒤 얼마나 많은 고 난을 겪었는가.
신분을 숨기고 남자 행세를 하며 공국의 소동으로 생활했다. 정처 없이 떠돌다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다. 전쟁포로가 되었다.
그러다 한지훈을 만났다.
이후 그녀는 한지훈의 아래에서 성장해왔다.
영지군을 지휘해 보았으며, 사관 학교에 입교했으며, 군사교육을 마 쳤다. 제국의 참모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했다.
'슈베츠 왕국 해방.'
자신의 비원을 이룰 장소에.
그렇게 그녀가 전방의 요새, 포 트 알파란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툭, 툭.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그녀는 고개 돌려 자신의 바로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역시나. 익숙한 인물이 자리해 있었다.
"마이사. 이제 시작이다."
전쟁고아였던 자신을 주워 키워 주었던 인물. 그녀의 보호자인 한편 스승이기도 한 이.
한지훈 라이젠.
그가 나직이 말을 잇는다.
"그동안 갈고닦아왔던 네 실력. 어디 한번 마음껏 발휘해 봐라. 마 이사 슈베츠."
한지훈의 말에, 마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맡겨만 두어라. 한지훈."
이제는 그녀가 활약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