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연방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구름처럼 몰려가는 인파의 무리. 뒤따르는 무수히 많은 마차 들. 그들이 치켜든 연방의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그 위용을 과시한다.
너무나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군세의 행렬이란.
높다란 성벽 위에서 군의 행군을 지켜보고 있던 러셀 통령.
그가 이 나직이 입을 열어, 어떤 숫자를 읊조렸다.
"백만."
이번 전쟁에 동원된 연방 원정군 의 숫자였다.
연방은 중앙대륙 정벌에 무려 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지금 보고 있는 대규모 군집단의 이동. 이곳 동부대륙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동부대륙 각지에 배치되어 있던 다수의 야전군이 이 시간부로 원정 군으로 재편, 일제히 서쪽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저들은 서부 해안지대에 집결한 뒤 수송선에 탑승해, 전투함들 의 호위를 받아 중앙대륙으로 향할 것이다.
통령이 군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어 읊조린다.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제 아무리 엘프라 한들 버틸 수 없겠지."
백만의 병력이란 너무나도 막대 한 병력이다.
하물며 자국에서 운용하는 것이 아닌, 타 대륙으로 원정 보내는 전력이 이 정도라니.
동부대륙 전체를 일통한 국가. 이 세계의 초강대국, 크루거 연방이 었기에 가능한 병력동원이었다.
그렇게 통령이 행군광경을 멍하 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사색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러셀 통령.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인기척조차 울리지 않았 음에도, 갑작스레 들려온 질척한 음성.
이미 익숙한 일일까. 통령이 표정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본다.
"크라함. 은밀하게 내 옆에 나타나는 짓거리. 다시는 하지 말라 했 을텐데."
통령의 옆에는 어느새 크라함이 자리해 있었다.
검은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 어쓰고, 후드 안쪽에서 섬뜩한 붉은 색 안광을 번들거리고 있는 이.
그가 발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통령의 바로 옆까지 걸어온다.
- 내 '체질'상 어쩔 수 없는 일 이라고 이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알고 있지만, 불쾌하군."
- 불평도 많군.
마침내 통령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크라함. 그 또한 시선을 돌려, 서쪽으로 행군하고 있는 연방군을 행렬을 바라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클클 웃었다.
- 원정군이라. 위용 하나는 대단 하군. 정작 일선에서 싸우는 건 우리 흑마법사일지언데.
통령은 이번 중앙대륙 침공에 무려 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그 백만의 전력은 온전히 엘프를 상대하는데 투입되지 않는다.
"… 주로 흑마법사들이 전투에 임 한다 한들, 이후 증원을 제국군과 전투하는 것은 우리 연방의 병사들 이다. 저 정도의 병력 동원은 필요 하지."
백만 연방군이 상대할 주적은 제국군이었다.
크라함과 러셀은 미리 자신들이 상대할 주적을 지정해놨던 것이다.
엘프와 전쟁하는 것은 크라함이 이끄는 흑마법 학파 볼라바아. 그리고 제국과 전투하는 것은 연방 원정군 이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흑마법사들은 파괴와 타락에 특 화된 이들. 덕분에 비교적 쉽게 엘프들을 상대할 수 있다.
연방 원정군은 제국군보다 훨씬 많은 머릿수를 지니고 있다. 그 숫 적 우위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제국군을 압도할 수 있다.
각각의 집단이 보다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적을 찾아 상대한다. 모든 전략의 기초였다.
통령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전쟁이다."
그가 시선을 돌려, 서쪽을 바라 본다. 해가 떨어져 짙은 노을이 진 방향.
저곳에 중앙대륙이 있다.
"중앙대륙, 엘프는 시작에 불과하다."
중앙대륙을 차지한 뒤에는 남부 대륙, 남부대륙을 차지한 뒤에는 서부대륙, 서부대륙을 차지한 뒤에는 북부대륙.
정복할 땅은 많다.
통령의 입가에 흡족함의 미소가 드리운다.
"내 꿈이 이루어질 때가. 머지 않은거다."
그는 아주 이전부터 위대한 정복 자가 되고자했다.
연방의 국기를 지금보다도 훨씬 드넓은 곳에 꽂아 넣고 싶었다. 자신의 영향력을 널리 퍼트려 위엄을 떨치고 싶었다. 역사 속에 위대한 정복군주로 남아 영겁도록 칭송받 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무수한 정적들을 해치우 고 온갖 음모와 암투를 거쳐, 비로소 연방의 통령이 되었음에도.
그는 정복자가 되지 못했었다.
이미 동부대륙 전체가 연방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에.
전쟁을 벌여도, 영토를 빼앗을 '적'이 없었기에.
그렇기에 통령은 적을 찾아냈다.
다른 대륙에 있는 새로운 적들 을.
"남부대륙의 제국. 그리고 중앙대륙 엘프."
과연. 만만찮은 적이다.
세계의 균형을 수호하는 엘프와, 남부대륙의 거의 전체를 장악할 만큼 강성한 국력을 가진 제국이라.
절대 쉬운 싸움은 아니다.
허나 통령은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크라함…."
그동안 철저히 준비했기에. 그리고 강력한 우군 또한 손에 넣었기 에.
그가 고개 돌려 크라함을 바라본다.
불길한 사내. 허나 그이상으로 유용하고도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
그에게 나직이 말한다.
"예의 물건… 세계검이라고 했 나."
과거, 통령은 크라함에게 기꺼이 유물을 넘겨줬다.
환상종의 핵.
그것이 있다면, 제대로 된 세계 검을 만들어 한지훈과 엘프를 능히 무찌를 수 있다고 자신하던 크라함 이었다.
지금은 그때 걸었던 기대를 보답 받을 때.
"세계검이 완성된다면 시나리오 를 비틀어 우리의 승리를 얻어낼 수 있다 했지. 확실한가?"
그렇기에 통령은 재차 확인하고 있다.
세계검을 완성한 지금, 확실히 승리할 수 있냐고. 엘프와 제국을 파괴하고, 이 세상의 시나리오를 비틀어 예정되지 않은 승리를 도출해 낼 수 있냐고 말이다.
그에 크라함이 대답한다.
- 어리석은 질문이로군.
크라함이 품속에서 어떤 단검을 꺼내든다.
예의 암흑색 단검. 빛조차 반사 하지 못해 윤곽조차 나타나지 않는, 블랙홀처럼 새카만 색의 단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크라함이 단검을 쥐고 미소 지었다.
- 보면 알거다. 제국이 어떻게 파멸하고, 엘프가 어찌 소멸하는지.
그가 쥐고 있는 단검. 이전보다 도 훨씬 진중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다.
크라함의 세계검은 이전보다도 훨씬 진보해있다.
"연방이 흑마법사와 연합했다고."
니디아와의 통신을 종료한 뒤.
나는 빛이 가라앉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흑마법사.
엘프의, 그리고 모든 지성체의 적.
사실 놈들이 다시 등장하리란 사실은 예상하고 있었다.
"크라함.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역시 그동안 힘을 비축하고 있었 어."
놈들은 몇 년 동안이나 잠잠했다.
그동안 힘을 키웠으리라. 내 주 적, 연방측의 지원을 받아 학파를 재건하고 흑마나를 축적했으리라.
나를 죽이고, 내 그릇을 빼앗기 위해서.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이쪽도 그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이상 대비조차 하지 않고 방치했을 내가 아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회의실의 무리 들 중간에 있는 한 인물을 바라봤다.
"바네사."
과거 시나리오에서 마녀라는 이 명으로 불렸던 이. 한때는 흑마법에 몸담았으나, 이제는 내 측근이 되어 연구와 개발에 종사하고 있는 인물.
바네사. 그녀를 호출한 것이다.
그에 저벅, 발걸음을 옮겨 내 앞 으로 다가오는 바네사.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흑마법 대항 아티팩트 개발, 얼마나 진척되었지?"
내 영지의 연구단지. 바네사를 주축으로 수많은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이 연구 활동에 매진하는 곳이다.
그리고 바네사는 흑마법사에 커다란 증오심을 가졌으면서도, 출중한 흑마법 지식을 가진 인물.
흑마법사에 대항할 아티팩트 개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가 쾌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은 아티팩트를 만들어 놨어요. 드워프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제 품 양산도 충분히 해놨고요."
"다행인데 그래?"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동안 내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바네사의 연구 결과는 꽤나 만족스 러웠다.
과거 카렌과의 전쟁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그녀의 아티팩트다. 지금쯤에야 그때보다도 훨씬 발전했을 터이니 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연방놈들과 싸울 때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고,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연방과의 전쟁 뿐.
피식. 나는 웃었다.
"그나저나. 백만 규모의 원정군이 라. 지가 무슨 수양제라도 된 줄 알아?"
현실 지구의 역사, 7세기 무렵 고구려 - 수 전쟁 당시. 수나라의 왕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대략 113만 정도라 한다.
113만. 실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지랄같이 많은 수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대륙, 그것 도 바로 옆나라를 치기 위한 원정 이었다.
헌데 연방놈들은 바로 옆 나라도 아닌, 타 대륙 원정에 백만대군을 밀어 넣다니.
아무리 현실 지구의 중세보다도 훨씬 인구수가 많은 세계관이라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허나 그래봤자다.
"어차피 이쪽이 이길 거지만."
적의 전력이 막대하고, 그 기세 가 강렬하다 하나 나는 게임을 한번 클리어해본 몸이다.
쫄 이유도. 걸어온 싸움을 피할 이유도 없다.
그저 맞서 싸우며 승리를 쟁취해 낼 뿐.
천천히 입을 열어 지시했다.
"전 북부군. 이동 준비해. 나는 폐하께 보고 드리지."
제국 황궁의 알현실. 커다란 황금옥좌가 자리해 있는 공간. 황제가 기거하며 국사를 다루는 곳이자, 이제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장소 이다.
평소였다면 묵직한 위압감과 적 막이 자리해 있을 공간이었을 터다.
헌데 지금의 알현실은 결코 적막 하지 않았다.
"연방군이 대규모 기동을 실시합니다!"
이변이 일어났으므로.
쉴 세 없이 울리는 통신수정구의 통신소리. 여러 군관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고위 관료와 대신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주시한다.
군관들의 입에서 하나둘 경악스 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동부대륙에서 막 들어온 첩보입 니다! 기동을 실시하는 연방군의 병력 수는 약 백만!"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수송함대 와 전투함들이 일제히 이동합니다!"
"급보입니다! 연방이 원정대를 조직한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규모, 약 50개 군단!"
"적의 모든 전력이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연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움직이는 적의 대규모 병력. 그들을 수송하기 위해 기동하는 수송선단. 막대한 물자와 자금의 이동까지.
모든 소식이 연방의 거병을 의미했다.
옥좌 위에 앉아 그 모든 소식들을 듣고 있던 인물. 제국 황제 아 르테니 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연방놈들. 그 빌어먹을 정복 야 욕을 또다시 드러냈군."
그가 시선을 옮겨 알현실 한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몹시나 커다란 지도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다섯 개의 대륙이 표기되어있는 지도. 황제는 그중에서 동부대륙, 연방의 땅을 바라보며 읊조린다.
"헌데, 이번에 연방놈들이 노리는 목표는 우리 제국이 아닌 것 같군 그래."
연방에서 백만에 달하는 병력이 움직인다. 그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 서쪽이었다.
이곳 남부대륙을 치고자 했으면 보다 가까운 남쪽으로 이동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서쪽으로 병력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그이유.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 있었다.
"엘프를 노리는군."
동부대륙에서 서쪽으로 향한다면 엘프의 땅 중앙대륙이 나오고, 남쪽 으로 향한다면 제국이 있는 남부대륙이 나온다.
서쪽으로 병력을 보냈다는 것은 연방은 중앙대륙을 칠 계획이리라. 그리 추론한 황제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 장관들. 주목하라."
그의 웅혼한 목소리에, 일순 알현실이 고요에 가라앉는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하나 그렇다고 제국 황제의 발언마저 무시 할 간 큰 인물은 이자리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황제가 자신의 지척에 자리해 있는 각 부처의 장관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연방은 우리 제국을 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엘프의 땅 중앙대륙을 침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황제의 말에 각 장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서부로 향하는 연방의 병력. 그 들이 중앙대륙을 노린다는 것은 자 명한 사실이다.
황제가 장관들에게 이어 말한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엘프는 우리 의 혈맹이다. 그동안 엘프들이 우리 제국에게 해주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필히 구원군을 파병해야겠지."
엘프는 제국을 도와줬던 적이 많 았다.
과거 공국전쟁 당시, 그리고 흑마법사의 수도 침공 당시. 이후 일어났던 협상동맹과의 전쟁과, 연방 원정군을 상대로 한 전쟁까지.
이미 몇 번이나 제국을 도와줬 고. 심지어 제국의 멸망위기조차 극복해내게 해준 종족이 바로 엘프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엘프라는 종족 에게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해주었던 것들을 생각한 다면 반드시 도와줘야 할 터.
하지만 그런 고마운 감정과는 별 개로 엘프를 돕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연방의 원정군이 무려 백만에 달한다. 막아내지 못한다면 엘프와 공멸할 것이고, 설사 기적적으로 막 아낸다 한들 제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커다란 피해를 입겠지."
백만.
제국군 총 병력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 무지막지한 병력 수였다.
그 정도로 막대한 병력을 연방은 중앙대륙으로 투사하고자 한다.
과연 막을 수 있을지. 설혹 막는 다 한들 얼마나 많은 피해를 감수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수 의 병력.
그렇기에 황제는 엘프에게 지원 군을 급파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장관들에게 묻고 있다.
"지원군을 파병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혈맹의 위기를 이대로 두고 봐야 하겠는가. 의견이 있는 장관. 내게 고해보거라."
위험을 감수하고 혈맹을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낼지.
아니면 아군의 위기를 무시하고 이쪽의 전력을 보전할지를 말이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위대하신 황제 폐하! 제가 감히 고하건데-한 장관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재무성 장관. 베네치오 슈라이버였다.
제국 재무성의 수장으로서, 식민 지를 비롯한 전 제국령의 모든 자 금 집행을 다스리는 이.
그의 말이 이어진다.
"제국은 이번 전쟁에 참전해서는 안 됩니다. 폐하, 엘프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십시오."